“하느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삶의 무게와 그 속에서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느님과 재물, 즉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습니다. 언뜻 들으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말씀이 왜 이렇게 강하게 다가오는 걸까요?
1. “걱정하지 마라”는 명령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도 목수의 아들로서 노동을 하셨고, 배고픔과 갈증, 피곤함과 추위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외면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이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이 말은 단순히 “잘 될 거야”라는 감정적 위로가 아닙니다.
이는 성부 하느님께서 당신의 섭리로 우리 삶 전체를 감싸고 계시며, 그 사랑이 우리의 필요를 기억하신다는, 존재론적 신뢰에 근거한 선언입니다.
2. 걱정은 수명을 늘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날카로운 질문을 하십니다:
“걱정한다고 해서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이 물음은 단순한 수사적 질문이 아닙니다.
오늘날 심리학은 불안과 스트레스가 오히려 인간의 면역력과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걱정’은 내일을 대비하는 힘이 아니라, 오늘을 마비시키는 그림자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뢰’와 ‘불안’은 함께 머물 수 없다는 영적 진리를 마주합니다.
신앙은 불안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안을 껴안고도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3. 들꽃 하나에도 깃든 하느님의 시선
예수님께서는 들에 핀 나리꽃을 가리키십니다.
그 꽃은 애쓰지 않고도, 솔로몬보다 더 아름답게 차려입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깊은 영적 통찰을 발견합니다.
들꽃도 하느님의 손길 아래 있다면, 하물며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이는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회복입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은 신학적으로 보면 은총의 시선 아래 자신을 바라보는 법입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소중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와 의로움을 먼저 찾는다는 것은 곧, “나는 세상이 주는 조건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존재의 가치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4.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먼저’라는 단어는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깊은 중심’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내려놓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밥상을 차리는 손길 안에, 아이를 안는 품 안에, 타인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 순간, 하느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입에서 참된 자유와 평화를 듣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이 말씀은 도피가 아니라, 오늘을 충만하게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십시오.
하느님의 시선을 믿으십시오.
그분 안에서 존재하는 자신을 다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저의 주인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오늘 하루, 당신만을 신뢰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하느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