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길 위에 피어나는 하느님의 약속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에 함께 섰습니다.
‘순례자’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멀고 험한 길을 묵묵히 걷는 모습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례자가 목적지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과정’**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걸음이 느려질 때도 있고, 때로는 잠시 멈춰 서야 할 때도 있겠지만, 방향만 분명하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은 바로 그런 걸음을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희망은 단순히 '잘 될 거야'라는 막연한 낙관이나 덧없는 기대를 넘어섭니다. 희망은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빛을 붙잡는 용기이며, 눈물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깊은 내면의 힘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따라가며 우리 안에 잠든 희망의 의미를 함께 탐색해 볼 것입니다:
* 왜 우리는 ‘순례자’인가?
* 희망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가?
* 희망의 순례자는 결국 어디로 향하는가?
이 세 질문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희망의 여정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왜 우리는 ‘순례자’인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먼저 가장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 봅시다. 우리는 왜 ‘순례자’일까요?
1-1. 인간 존재론적 관점: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이미 완성된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미’**가 아니라 **‘아직’**이라는 모습으로 창조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갈망하고, 더 나은 나를 꿈꾸며, 궁극적인 평화를 찾아 헤맵니다.
위대한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당신 안에서 우리 마음은 쉴 때까지 쉴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 곧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길은 단순히 고통스러운 고행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Via pulchritudinis, 곧 아름다움의 길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선함과 진리를 끊임없이 좇아 걸어가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순례자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끊임없는 여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1-2. 성경적 순례자: 멈춰 있는 자가 아닌, 걷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구원
성경을 펼쳐보면,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인류의 이야기는 한 편의 위대한 순례의 서사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가장 먼저,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본토와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보이지 않는 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적지가 불분명했지만, 그는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며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벗어나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랑했습니다. 그들은 이 고된 순례를 통해 자신들이 누구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떠셨습니까? 루카 복음 9장 5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단호히 길을 나서셨다.” 그분 역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십자가라는 궁극적인 순례길을 걸으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명확히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멈춰 있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걷는 이들, 끊임없이 묻는 이들, 진리를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우리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는 중입니다.
2. 희망은 어떻게 자라나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그 고된 순례의 길 위에서, 우리 안의 희망은 어떻게 자라날까요?
2-1. 고난 안에서 피어나는 씨앗: 절망 속에서 피는 꽃
우리는 희망이 따뜻한 햇살 속에서만 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은 대개 고난의 깊은 밤에서 그 씨앗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5장 3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낳습니다.”
즉, 희망은 눈부신 성공이나 안락함 속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닥을 치는 절망 속에서, 고통의 한가운데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피어나는 놀라운 꽃입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사람은 의미를 발견할 때,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그렇습니다. 고통을 단순히 피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깊은 의미를 찾고, 그 의미가 하느님께 굳건히 뿌리내릴 때, 우리 안의 희망은 비로소 단단하게 자라납니다. 고통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희망을 벼리는 용광로가 됩니다.
2-2. 신학적 희망 vs 낙관주의: 하느님의 침투
우리가 말하는 희망은 그저 "잘 될 거야"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는 심리적인 위안과는 다릅니다. 신앙인에게 희망은 하느님의 약속이 참되다는 굳건한 믿음에서 오는 힘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실재들을 확증해 줍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약속이 실재한다는 믿음이 바로 희망의 근원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대해 이렇게 통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죽음 이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느님의 침투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저 멀리 미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향해 오시고, 이미 그분은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일하고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 이것이 바로 우리 희망의 진정한 근원입니다.
2-3. 희망의 아이콘: 십자가 – 절망에서 피어난 부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희망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가장 깊은 절망과 고통의 자리에 세워졌던 십자가는, 이제 인류에게 가장 큰 희망의 문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고통은 끝이 아니다. 죽음조차도 마지막 말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그저 없애버린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그 죽음을 온전히 통과하여, 새로운 생명을 찬란하게 열어젖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희망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시련의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피어나는 부활을,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놀라운 약속을 굳건히 붙잡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희망의 시작점입니다.
3. 희망의 순례자는 어디로 가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이 희망을 품은 순례자는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3-1. 희망은 공동체로 이어진다: 함께 타오르는 불꽃
희망은 결코 나 혼자만 품고 끝내는 이기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진정한 희망은 다른 이에게 건네지고 나눌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루카 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곁에 홀연히 나타난 길벗—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그분이 함께 걸으며 말씀을 풀어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은 다시 뜨겁게 불타올랐습니다. 절망에 젖었던 그들의 마음에 희망의 불꽃이 다시 지펴진 것입니다.
희망은 전염됩니다. 누군가의 따뜻한 한 마디 말, 이해심 가득한 눈빛, 함께하는 진심 어린 기도, 그리고 말없이 내미는 손길… 이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있는 누군가의 삶을 다시 피어나게 하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3-2. 순례자의 세 가지 걸음: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다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로서 세 가지 중요한 걸음을 함께 내딛습니다.
* 기억의 걸음: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며, 그 순간순간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이끌어주셨던 하느님의 흔적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은총이 나를 지금까지 인도하셨음을 되새길 때, 우리는 미래를 향한 힘을 얻습니다.
* 현재의 걸음: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이 나와 함께 걷고 계심을 굳건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불확실하더라도, 그분께서 동행하고 계심을 믿을 때 우리는 평화를 얻습니다.
* 미래의 걸음: 아직 오지 않은 그 나라, 아직 도달하지 않은 그 약속을 바라보며 꾸준히 계속 걷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란, 하느님이 이미 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굳게 믿고, 오늘도 다시 한 걸음을 힘차게 내딛는 것입니다.
4. 정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나약한 흙으로 빚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흙 안에는 하느님의 거룩한 숨결, 성령의 생명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길이 부서지고, 우리 안의 희망의 빛이 완전히 꺼진 듯한 절망감을 느낄지라도, 우리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와 함께 있다.”
희망은 우리가 어떻게든 도달해야 할 하나의 목표라기보다는, 그분과 함께 걷는 바로 그 여정의 방식 자체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걸음을 멈추지 마십시오.
눈물을 흘리더라도, 그 눈물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계속 걸으십시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이 지상에서의 순례 여정을 마치는 그날, 우리 주님은 따뜻한 미소로 우리를 기다리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했다, 착하고 성실한 나의 종아. 너는 진정 나의 희망의 순례자였다.”
마무리 묵상 질문 (소그룹 나눔용)
* 내 삶에서 희망의 걸음을 멈추게 했던 순간은 언제였으며, 그때 나를 다시 일으킨 것은 무엇이었나요?
* 지금 내 삶 속에서 조용히 피어나고 있는 희망의 씨앗, 혹은 작은 기쁨은 무엇인가요?
* 나는 오늘, 또는 앞으로 누구에게 '희망의 순례자'가 되어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건넬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의 이 거룩한 여정에
주님의 평화와 힘이 늘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