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특이점(1)

영혼 없는 기술 지식인,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by 진동길


1. 2024년 11월 28일 서울대학교 교수, 연구자들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대통령을 거부한다'는 제목의 시국 선언문을 내어, “서울대가 교육과 연구에서 제대로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르치지 못한 채 ‘영혼이 없는 기술 지식인’을 양산해 온 것은 아닌지 참담하고 죄스러운 마음”이라고 했다. 이날 2시 기준, 해당 시국 선언문에는 서울대 교수와 연구자 525명이 연명했다.


이날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는 기자 회견에서 역사학부 교수는 “(현재 상황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는 지식인은 없을 것”이라며, “분노 지수가 임계점을 넘어, 우리 사회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큰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종교적으로만 쓰이던 ‘영혼’이라는 말이 공적 문건에 등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영혼! 그렇다.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 근거. 그것을 영혼이라고 한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외형만 남을 뿐, 속 깊이를 들여다보면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면 그때의 인간에게 무엇이 남을까? ‘기술 지식’만 남는다. 그것을 우리는 인공지능(AI)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의 겉모습을 닮은 인공지능을 우리는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라고 한다.


2. 이 휴머노이드가 ‘기술 지식’에서 인간을 뛰어넘을 시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2005년, 레이 커즈와일은 그때를 ‘싱귤레어리티’(singularity, 기술적 특이점)라고 부르며, "싱귤레어리티가 가깝다"는 책을 통해 그때가 2045년쯤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거의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며, 가당치도 않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 일이 애초에 가능하지 않으며,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수백 년 뒤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2024년에 같은 저자는 "싱귤레어리티가 더 가깝다"라는 책에서 그때가 2029년쯤이라며 본래보다 훨씬 앞당겨 잡았다. 그런데 2025년 중반에 들어선 지금, 일론 머스크 등 몇몇 관계 전문가는 그때가 1-2년 안에 도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듣는 우리 대중의 첫 반응은 불안,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포까지 느낀다.


실제로, 사태의 이런 발전에 관해서 가장 낙관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커즈와일조차, 싱귤레어리티에 대비해서 ‘겉’으로만이 아니라, ‘안’, 곧 인간의 정신, 영혼까지를 잘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이 기술 지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않으면 인류가 파국을 맞이할 수 있다며, 그런 인재를 만들어 내기 위한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싱귤레어리티 대학교’가 그것이다.


3. 12.3 비상 계엄 사태에 대해,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국내 여러 대학교 교수와 연구자들, 그리고 종교인들과 각계각층의 거센 반발로, 마침내 비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국민 중 많은 이가 ‘영혼’을 되찾기 위해, 탱크와 총검을 가로막아 서서 목숨을 걸고 지켜 낸 민주주의의 승리다. 위기를 맞을 때마다, 이렇게 지켜 내는 우리나라 국민의 성숙한 모습을 보고, 한때 현대 민주주의의 종주국 역할을 하던 나라조차, 우리의 민주주의를 부러워하며, 그 주역들을 잠시 ‘빌려 가서’ 자기네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을 해낼 수 있기를 바라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한 나라와 국민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교육 기관이 제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 자칫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 모든 교육 기관이 ‘영혼 없는 기술 지식인들’의 대량 생산 공장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속에 그 답이 들어 있다. ‘영혼’을 가꾸고 잘 길러 주는 것. 영혼을 잃었으면 되찾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아는 것’에 관한 한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는 휴머노이드의 출현을 바로 앞두고, 사람이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이며, 인공지능이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인간이 해 오던 일을 그것이 다 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그 인공지능을 종으로 부리며, 인간 특유의 존엄성과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 그리고 미덕을 한껏 계발함으로써, 인간 자체를 한 단계 끌어올려 초인超人 아니면, 적어도 월인越人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길이다.


4.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우리가 들은 성서의 말씀들이 대단히 큰 빛을 준다.


먼저, 마태오 복음(8,28-34)을 깊이 들여다보자.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마귀 들린 사람들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났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갑자기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하고 소리 질렀다.


마침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돼지 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들은 예수께 “당신이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들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마귀들은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는 온통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 떨어져 물속에 빠져 죽었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읍내로 달려가서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사람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읍내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러 나와서 예수를 보고는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태오 복음 8장 28-34절, 가다라 지방에 마귀 들린 사람과 예수, 그리고 마귀들이 돼지 떼로 옮겨가 바다로 떨어져 죽는 모습. (이미지 출처 = Freepik)


우선, 약 2천 년 전에 기록된 이 글에는 오늘,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당연히 생소한 표현들이 나온다. 불과 10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쓴 문건을 지금 우리가 읽어도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이 많이 나타나는데, 2천 년 전, 우리와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생산된 문건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말 가운데 ‘마귀 들린 사람’이라는 표현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 당시 그 지역에서는 전통적 관습에 따라, 오늘이라면 정신과적 질병을 가리켜서, 한마디로, ‘마귀 들렸다’고 표현했다. 육체 혹은 겉에 생긴 문제를 그냥 ‘병’이라고 한 데 반하여, 정신 혹은 내면에 일어난 문제를 ‘마귀 들렸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대단히 넓은 영역의 문제를 구분 없이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돼지’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전통에 따라, ‘더러운 짐승’에 속하는 것으로, 가까이하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루카 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이, 결국 돼지막에까지 들어가, 그것들하고 먹을 것 경쟁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 바닥을 치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치였다.


5. 이렇게 볼 때, 오늘 복음의 의미는 분명하다. 마귀 들린 사람은 영혼을 잃은 사람, 그래서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 겉으로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죽은 존재, 그래서 죽은 사람들이 누워 있는 묘지에 사는 사람이다.


“누가 흰 것이 무어냐고 묻거든 검은 것으로 대답하고, 검은 것이 무어냐고 묻거든 흰 것으로 대답하라”는 격언대로, 모든 것은 정반대되는 것을 배경으로 해서 볼 때, 그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죽음과 어둠의 존재가 생명과 빛의 존재를 제일 예민하게 알아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어둠의 존재는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46) 하시는 분을 바로 알아보고 소리 지른다.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그리고는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곳, 바로 먹을 것만 주면 거기가 어디든 덤벼드는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예수께서 “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마귀들은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돼지들은 인간이 영혼을 잃고 짐승처럼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똑똑히 보여 준다. 그러자 돼지 떼는 온통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 떨어져 물속에 빠져 죽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절망적이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그런데 예일대학교 나종호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의 자살률은 세계에서 단연 1위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자 수)은 다른 선진국에 견줘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1991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자살률이 16.9명인데 한국은 8.6명에 그쳤다. 하지만 외환 위기를 전후로 한국의 자살률은 가파르게 올랐고 상황은 금세 역전됐다. 2003년 이후로 한국은 단 한 번도 ‘자살률 1위’ 자리를 내어 준 적이 없다.


나 교수에 따르면 “사회가 발달하고 파편화될수록 사람들이 정신 건강에 취약하고 자살률이 높아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며, “OECD 국가 중 최근 10년간 자살률이 증가한 곳은 우리나라와 미국 정도밖에 없다”고 했다. 실제로 OECD 회원국의 자살률은 차츰 떨어져 10.7명(OECD 보건 통계 2024)으로 내려앉았다. 반면 한국의 자살률은 24.8명(국내 기준으로는 2023년 27.3명)에 달한다. 특히 청소년들의 사망률은 더욱 엄청나다. 심하면 두 살부터 특수 학원에 가야 할 만큼 상상할 수 없는 경쟁의식에 짓눌리는 한국의 오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오늘 복음의 결론은 어느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 인간의 무서운 타성을 잘 보여 준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읍내로 달려가서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사람들의 일을 알렸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성서 대목의 논리에 따르면, 영혼이 빠져나가고 겉모양만 남은 인간은 돼지와 다를 바가 없다. 하는 행동도 그것들을 닮는다. 그래서 참사람이 될 일생일대의 기회를 스스로 박차 버린다. 야곱의 우물가에 나왔다가 우연히 메시아를 만나게 된 사마리아 여자의 말을 듣고, 그를 만나러 나왔던 그 동네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더없이 슬픈 장면으로 끝난다. “그러자 온 읍내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러 나와서 예수를 보고는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였다.”


6.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해방되고,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던 ‘영혼’을 회복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 우리가 방금 들은 창세기 21장 5절과 8-20절이 답을 준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양식 얼마와 물 한 부대를 하갈에게 메어주며 아이를 데리고 나가게 하였다. 하갈은 길을 떠나 얼마쯤 가다가 브엘세바 빈들을 헤매게 되었다. 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덤불 한구석에 아들을 내려놓고 “자식이 죽는 것을 어찌 눈 뜨고 보랴.” 하고 탄식하며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아 이스마엘을 바라보았다. 하갈은 이스마엘이 소리내어 우는데도 주저앉아 그저 바라만 보았다.


하느님께서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천사를 시켜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이르셨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어서 가서 아이를 안아 일으켜주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하느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주시니, 그의 눈에 샘이 보였다. 하갈은 큰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셨다. 그는 자라서 사막에서 살며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었다."


영혼을 회복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부모의 마음, 특히 어미의 심정을 다시 찾는 것이다. 아버지며 그보다 더 어머니인 하느님의 마음. 그것이 본래 인간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 모습의 가장 확실한 특징이다. 세상 어머니의 마음도 하느님의 마음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십자가 위에 못박혀 계시면서 군사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그렇게 해서 인간을, 우리 하나하나를 다시 낳아 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인간의 본 모습. 잃었던 영혼을 되찾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병호 주교(빈첸시오)

전 전주교구장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s://www.catholicnews.co.kr); 유튜브 https://youtu.be/uj8c3qyXXmY?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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