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부요 속으로 돌아가는 여정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남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제 형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해주십시오”라며 청하는 장면을 봅니다. 어쩌면 그 남자의 말은 매우 정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는 억울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청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다릅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예수님은 그의 요구를 곧장 해결해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마음 깊은 곳을 향해 눈을 돌리게 하십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헨리 나웬 신부님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너는 진정 무엇에 배고파 있니? 무엇이 너를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니?”
내면의 빈방에 귀 기울이기
헨리 나웬은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관계’**이며,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라고요.
복음 속 부자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고 더 큰 곳간을 짓습니다. 그는 그 안에 자신의 미래, 안전, 안식을 넣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음성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생명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여기서 하느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단지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하느님 없이 자기 삶을 세우려 했다는 것, 그리고 자기 영혼을 다른 이와의 관계가 아니라 ‘소유’ 안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내면’이 만들어낸 안전의 거짓 신화
헨리 나웬은 『가난한 자의 예수』에서
우리가 탐욕에 빠지는 이유는 사실,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깊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버림받을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끊임없이 소유하고, 축적하고, 경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필요한 것은 ‘더 큰 곳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안길 수 있는 ‘내면의 집’**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네가 가진 것이 곧 너다. 네가 이룬 성취가 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전혀 다른 대답을 주십니다:
“너는 내 사랑받는 아들이며,
너는 내가 너를 지었기에, 내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헨리 나웬은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 부유하다는 것은 단순한 삶을 사는 것,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 정체성의 중심에 두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버드, 예일, 노트르담을 떠나 지적 영광을 포기하고, 장애인들과 함께 살며 ‘사랑받는 자’로서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고, 내 눈을 바라보며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이가 있을 때, 나는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 각자의 ‘곳간’을 묻습니다.
나는 어디에 나의 안식과 미래를 두고 있는가?
내 마음이 진정으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자리는 어디인가?
헨리 나웬 신부님의 목소리를 빌려 말씀드립니다.
“가난하게 되어야 비로소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소유를 포기할 때,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 깊이 다짐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부유해지기로, 그리고 사랑 안에 머물기로.
그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주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