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7장. 소피아가 온다

by 진동길

7장. 소피아가 온다



해원 장날, 소문은 생선 비린내보다 먼저 풍겼다.
쌀가게 앞에 사람이 모이면 쌀 얘기보다 사람 얘기가 먼저 나왔고, 막걸릿집 문턱엔 막걸리보다 말이 먼저 찼다.

쌀가게 주인은 되를 들고 있다가도 손을 멈췄다.
“최태국이 요새 시내를 자주 나가데이.”
옆에서 되를 받던 여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윤 씨 도망간 뒤로 더 독해졌제.”
막걸릿집 주모가 잔을 닦으며 한마디 보탰다.
“독해진 게 아니라… 뭘 꾸미는 기다. 눈빛이 그라더라.”
장터 한켠, 국밥집 사내가 헛웃음을 삼켰다.
“에이, 뻔하지. 새 마님 들이겠지.”

말은 불쑥불쑥 튀어나와 서로의 손을 더럽혔다.
사람들은 남의 사정을 씹으며 제 사정을 잠깐 잊었다.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단맛은 누군가에겐 피 맛이었다.

막돌이 어멈은 장에 나가면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사람들이 “그 집”을 말할 때, 막돌이 어멈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귀는 막을 수가 없다. 사람 마음이 약한 데가 귀다.

“윤 씨는 진짜 남자 따라갔을까?”
“아이고, 남자 따라갈 팔자였으면 그 집에 들어갔겠나.”
“그럼 죽었나?”
“죽었으면 말이 먼저 죽지. 말이 살아 있는데 사람만 죽겠나.”

생선전 앞에서 비늘을 털던 여자가 손을 탁탁 털었다.
“사람은 없어도 말은 남아예. 사람보다 말이 더 질깁니더.”
그 말에 누군가가 웃었고, 누군가가 웃지 못했다.

그날, 막돌이 어멈은 생선비늘을 털다 말고, 우연히 시내버스 기사 말도 들었다.
버스기사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손바닥을 비벼 추위를 털었다.

“김포서 외제 차 하나 내려온다 카던데.”
“외제 차?”
“그래. 서울서 내려오는 기라. 최태국이 직접 마중 나간다 카더라.”

‘외제 차’라는 말이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외제 차는 곧 ‘외제 사람’으로 바뀌어 돌았다. 말은 그렇게 자라난다.

“미국서 여자 온다 카더라.”
“미국서? 최태국이 거기까지 손이 닿나?”
“돈 있으면 닿는 기지.”
“돈이면… 사람도 바뀌나?”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라, 사람 위에 얹히는 게 바뀌지.”

사람들은 웃었다. 어떤 웃음은 부러움이었고, 어떤 웃음은 경멸이었고, 어떤 웃음은 두려움이었다.
땅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 땅이 바뀌기 직전, 사람들은 늘 먼저 불안해진다.

그 소문은 장날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 입이 밤새 말을 삭히고, 다음 장날에는 더 단단한 말로 다시 내뱉었다.
그리고 마침내, 말이 아니라 차가 내려오기로 한 날이 잡혔다.




1976년 12월 15일, 김포공항 국제선 도착장은 겨울 장터 같았다.
기다림과 체면이 먼저 붙고, 그 체면 뒤로는 돈 냄새가 아주 얇게 묻었다. 안내 방송은 쇠소리로 울렸고, 사람들은 서로를 기다리는 눈으로 서로를 재고 있었다.

최태국은 검은 양복을 꺼내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눌렀다. 반듯해 보이려는 몸짓이었으나, 몸에 걸친 반듯함은 늘 마음을 더 거칠게 드러냈다.
그는 ‘아내’를 맞으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공항에 서 있는 그의 어깨 위에는 ‘아내’보다 먼저 ‘집안’이 올라앉아 있었다. 대, 체면, 말뚝.

출구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 공기가 한 번 바뀌었다.
사람들 시선이 한쪽으로 아주 얇게 쏠렸다.

소피아 김이 걸어 나왔다.

낙타털처럼 누런빛 도는 코트, 검은 안경, 짐 세 덩이.
짐을 끄는 손끝이 단정한 건 오래 버틴 사람의 습관이었다. 그녀는 안경을 벗고 최태국을 봤다. 반가움보다 먼저 확인이 들어간 눈. ‘맞나.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같은 눈.

최태국이 입꼬리를 올렸다.
“오느라 수고했소.”

소피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숨을 들이켰다.
공항 공기보다 더 차가운 어떤 공기가, 이미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음을 아는 사람의 숨이었다.

짐을 차에 싣는 동안, 그녀는 자기 가방 손잡이를 한 번 더 꽉 쥐었다.
손잡이 안쪽, 천이 두 겹으로 덧댄 자리에 얇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접힌 영어 문장 몇 줄. 날짜. 서명. 그리고 “조건”이라는 단어 하나.
그 종이는 누군가에게는 종이였지만, 소피아에게는 돌아갈 길이 막힌 사람의 마지막 울타리였다.

최태국이 트렁크를 닫으며 말했다.
“멀리서 와가꼬 고생했네예.”

소피아는 웃는 모양을 잠깐 만들었다가 지웠다. 웃음이 습관이 된 사람의 얼굴이었다. 습관은 낯선 곳에서 사람을 살린다. 그러나 습관은 진심을 숨기기도 한다.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이번엔, 손해 보는 쪽이 되면 안 된다.’
욕심이 아니었다. 살아남는 계산이었다.




차가 공항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고개를 틀자, 도시가 뒤로 밀리고 겨울 논이 벌거벗은 등짝을 드러냈다.
나무들은 잎을 다 털어내 뼈대만 남았고,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소피아는 창밖을 오래 봤다. 미국의 빛은 넓게 퍼지지만, 여기 빛은 낮게 깔려 사람 발목을 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 옆으로 해원천이 스치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겨울 물은 얼지 못하고, 검게만 흘렀다.

소피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이 입안에서 몇 번 굴렀다.
“그 아이… 기백이… 괜찮아요?”

최태국은 핸들을 잡은 손을 한 번 움켜쥐었다가 풀었다.
“말이 없는 기라.”

“말이… 없어요?”
“엄마 생각에 그러겄제.”
그가 잠깐 숨을 내쉬었다. 숨에도 체면이 붙는 사람의 숨이었다.
“니가 오면, 애도… 덜 버틸 거 아이가.”

그가 “엄마”를 말할 때 목소리에 따뜻함이 붙지는 않았다. 원인을 가리키는 말. 흉터를 가리키는 말.
소피아는 그 차가움을 알아챘다. 이 집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자리’가 먼저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그녀의 속이 잠깐 서늘해졌다.

최태국이 창밖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저 논, 저 밭 보이제. 저거 다, 결국 내끼 될 기다.”

그 말은 자랑이라기보다 선언이었다.
소피아는 그 선언을 듣는 동안, 자기 손가락 끝이 자꾸 모아지는 걸 느꼈다. 성호를 긋는 습관이 몸에서 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손을 폈다. 기도는 길게 하면 티가 난다. 티 나는 건 이 집에서 곧바로 값이 매겨진다.

그 대신, 그녀는 마음속으로만 십자가를 그었다.
‘하느님, 제가… 여기서라도 살아남게 해 주세요.’
기도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생각이 따라붙었다.
‘살아남으려면, 뭘 먼저 붙잡아야 하지.’

기도와 계산이 같은 숨에서 나왔다.
그 모순이 바로 소피아의 씨앗이었다.

소피아는 검은 물길을 다시 떠올렸다. 물은 길을 안다. 사람만 길을 모르고도 들어간다.




해원장 대문 앞에 차가 멈췄을 때, 담장은 높고 대문은 쇠였다.
집은 컸고 마당은 텅 비어 넓었다. 붉은 벽돌이 새것인데도, 공기는 오래된 집처럼 눌어 있었다. 사람의 기운이 빠져나간 자리에서만 나는, 눅진한 냄새.

막돌이 어멈이 허리를 깊이 굽혔다.
“마님, 어서 오이소.”

‘마님’이라는 말이 소피아 귀에 걸려 잠깐 흔들렸다.
그녀는 그 흔들림을 삼켰다. 이 집에서 흔들리면, 흔들리는 값부터 매겨진다.

안채 창문 틈에 아이 눈이 붙어 있었다.
기백. 다섯 살, 아직 애기 티가 남았다. 그러나 다섯 살답지 않게 ‘세상이 사람을 어떻게 부수는지’ 이미 본 눈.
아이는 소피아의 코트 깃, 손목의 광택, 낯선 냄새를 차례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엄마 냄새가 아니다.

소피아는 아이를 보고 무릎을 꿇었다.
“기백아.”

이름을 불렀다가, 자기 입에서 나온 그 소리가 낯설어 잠깐 멈췄다.

아이는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방 한쪽에 웅크린 채 눈만 들어 올렸다.
소피아는 아이 눈빛에서 ‘싫다’보다 먼저 ‘잃었다’를 봤다.
잃은 아이는 먼저 붙잡을 줄 안다. 그리고 붙잡는 방식이 날카로워진다.

기백이 아주 작게 말했다.
“엄마 있어.”

소피아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아이가 이어 말했다.
“엄마는… 안 없어.”
(한 박자)
“아줌마는… 아니야.”

그 말은 울음이 아니라 결심처럼 굳어 있었다.
소피아는 그 굳음을 보며, 아이를 달래는 법보다 이 집에서 살아남는 법을 먼저 떠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방 한쪽 벽장 쪽으로 스쳤다. 아이에게 뭔가 숨겨져 있다는 걸, 오래 떠돌다 들어온 사람은 말보다 냄새로 먼저 안다.

그때 뒤에서 최태국 목소리가 터졌다.
“기백아! 니 지금 뭐라카노!”

기백은 아버지를 보지 않았다. 소피아도 보지 않았다.
아이의 몸은 이미 돌아서 있었다. 마루를 지나, 뒤란 쪽으로. 감나무 쪽으로.
발소리는 작았으나 단단했다. 단단한 발소리는, 아이가 이미 마음속에서 굳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최태국이 한 발 따라나서려 하자 소피아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손바닥이 공중에서 잠깐 떨렸다.
“시간… 필요해요.”

그 한마디가 최태국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다만 그가 더 따라가지 않게 만들었다.
최태국은 입술에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는 손끝이 잠깐 떨렸다. 그는 성냥을 한 번 더 그었다. 불씨가 붙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기부터 내뿜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어야, 일이 자기 편이 되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




그날 저녁 상은 대청에 차려졌다.
된장찌개가 끓는 냄새가 먼저 올라오고, 구운 생선의 비린 기름이 뒤따르고, 김치의 매운 숨이 코끝을 찔렀다.
원래 밥 냄새란 사람 사는 집을 잠깐이라도 덥히는 법인데, 해원장에서는 그 따뜻함이 오래 머물지 못했다.
냄새는 기둥과 벽지에 부딪혀 되돌아오며, 금세 식은 공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소피아는 젓가락을 쥐었다 놓았다. 젓가락 끝이 그릇 가장자리를 건드릴 때마다 사기그릇이 얇게 울렸다.
손끝이 아직 이 집의 그릇과 숟가락을—자기 몫이라고—붙잡지 못했다.

막돌이 어멈은 소피아와 최태국 사이를 눈으로 재다가, 반찬그릇을 괜히 한 번 더 당겨 놓았다. 상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옆에서 하인 하나가 물병을 들고 서 있다가, 아무도 부르지 않자 팔꿈치를 한번 접어 올렸다. 그 또한 이 집의 공기에 맞추는 중이었다.

“마님… 입엔… 영 안 맞을 낍니더. 촌반찬뿐이라예.”
말은 낮았고, 말끝은 기둥에 걸려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최태국은 대꾸하지 않았다. 밥을 한 숟갈 떠 넣고, 씹고, 또 한 숟갈.
이 집 밥상 앞에서 말이 오가면, 말보다 먼저 금이 간다.

기백은 늘 그렇듯 밥그릇만 바라보고 있었다. 숟가락도 들지 않은 채, 멍하니.
그러다 소피아 쪽에서 흘러온 향수 냄새가 목젖을 건드렸는지, 아이의 가슴이 얕게 들썩했다. 헛구역질 같은 숨이 짧게 새어 나왔다.

기백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젓가락을 내려놓고—조용히 일어섰다.

“기백아! 어딜 가노!”

아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답도 없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만, 딱 한 번—대청의 따뜻함을 잘라내듯—났다.

소피아는 밥그릇 위로 오르는 김을 한참 바라봤다.
김은 따뜻했는데, 그 따뜻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이 집에서 따뜻한 것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해원장엔 기척이 줄었다.
소피아는 안방에 혼자 앉아 창밖을 봤다. 뒤란 감나무 가지가 달빛 아래 검게 흔들렸다.
나무는 겨울을 앞두고도 서 있었다. 떠나는 사람도 있고, 버티는 나무도 있었다. 그 대비가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며칠 뒤, 새벽이 채 밝기 전이었다.
부엌에는 물 끓는 소리만 있었다. 막돌이 어멈이 장작을 더 밀어 넣고, 하인은 쌀독 뚜껑을 조심스레 닫았다.
소리가 크면 이 집이 깨어날까 봐, 사람들은 소리를 억제했다.

소피아는 앞치마를 둘러매고 밥을 저어 보았다.
손이 익숙한 손놀림은 아니었다. 쌀알이 손끝에서 자꾸 흩어졌다.
막돌이 어멈이 입술을 달싹였다가, 말은 삼켰다. 말하면 틀릴까 봐가 아니라, 말하면 이 여자가 더 외로워질까 봐였다.

“마님… 이 집 밥은… 물을 좀 덜 잡아야예.”
막돌이 어멈이 그제야 아주 작게 말했다.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조금… 조금씩.”

그때 마루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기백이었다. 아이는 부엌 문턱에 서서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오지 않는 게 이 집에서 아이가 가진 힘이었다.

소피아가 급히 웃음을 붙여 보였다. 손에 과자 한 봉지를 쥐고 있었다. 서울에서 사 왔다며 최태국이 던져 준 것.

“기백… 이거… 먹어.”

기백은 과자를 보지 않았다. 소피아의 손목을 봤다. 손톱을 봤다. 비누 냄새와 향수의 잔냄새가 섞인, 낯선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
아이는 입술만 움직였다.

“엄마는… 이런 거 안 줘.”

소피아의 손이 잠깐 멈췄다.
막돌이 어멈은 솥뚜껑을 더 세게 잡았다. 손아귀가 솥뚜껑에 붙었다. 어멈은 시선을 내리깔고, 눈동자만 옆으로 굴렸다. 보아도 못 본 척하는 눈이었다.

소피아는 과자를 내려놓고, 말 대신 밥주걱을 다시 잡았다.
손이 밥주걱에 익어가면 마음도 따라 익을 거라고—자기에게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었다.

그때 마당 쪽에서 최태국 목소리가 툭 날아들었다.
“시간 지나면 잊을 기다.”

그 말은 그냥 말이었다. 그에게는.
그러나 그 말이 누군가의 가슴을 찢는 칼이라는 걸,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기백은 문턱에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뒤란 쪽으로 갔다. 감나무 밑이었다. 감나무는 낙엽을 다 털어내 앙상한 가지로 집안을 훤히 드러냈다.
아이의 어깨가 아주 작게 들썩였다. 울음은 아니었다. 숨이 모서리에 걸리는 소리였다.

“엄마… 나는 안 잊어.”

그 말은 들리면 더 아플 말이었다.
막돌이 어멈은 멀리서 그 등을 보고도 다가가지 못했다. 다가가면 아이가 더 멀어질 것 같아서였다.

해원천은 겨울에도 검게 흘렀고, 해원장은 조용히 사람을 삼켰다.
그 겨울, 안채에는 새 이름이 걸렸다.
이름이 걸리자 공기가 굳었다. 사람보다 먼저.




그 겨울, 안채에는 새 이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이름이 걸리는 순간부터—이 집 공기는 더 단단하게 굳기 시작했다.

이름이 걸리자 공기가 굳었다. 사람보다 먼저.
그 굳음은 눈처럼 소리 없이 내려와 마루 틈과 문지방, 솥뚜껑 손잡이까지 스며들었다. 해원장의 겨울은 원래도 매서웠지만, 그해 겨울은 유난히 사람 사이가 추웠다.

소피아는 첫겨울부터 배웠다. 이 집에서 따뜻함은 불이 아니라 권력에서 나온다는 걸. 최태국이 대청에 앉아 담배를 한 번 길게 빨아들이면 방마다 숨이 동시에 낮아졌다. 누가 먼저 말을 삼키는지, 누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지—그 순서가 곧 이 집의 난방이었다.

기백은 그 난방에서 벗어난 자리였다.
“아줌마”라는 말 뒤로 아이는 더 조용해졌다. 조용해진다는 건 항복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칼을 숨기는 법이었다. 소피아도 알았다. 억지로 다가가면 더 멀어진다. 그래서 그녀는 달래지 않고 거리를 지켰다. 그 거리 위에, 기도와 계산이 같은 숨으로 얹혔다.

막돌이 어멈은 그 둘 사이를 매일 보았다. 기백이 숟가락을 들지 않는 날이면 소피아도 젓가락을 들지 못했고, 소피아가 멈추면 부엌의 숨도 멈췄다. 집은 더 조용해졌고, 최태국은 그 조용함을 “정리”라고 불렀다. 정리된 집의 가운데는 늘 그의 자리였다.

겨울은 길었다. 말은 적었고, 눈은 많이 오갔다.
그러는 사이, 기백의 침묵은 더 단단해지고 소피아의 숨은 더 얇아졌다. 그 얇은 숨으로도 버티는 법을 배울 즈음—마당의 눈이 녹기 시작했다. 얼음 밑에서 물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해 봄이 왔다.

1977년의 봄은 해원천 진흙탕 속에서부터 꾸역꾸역 밀려왔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으며 내뱉는 숨결은 비릿했고, 산자락 생강나무 꽃은 노란 독기처럼 피어올랐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검은 흙의 아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