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6장. 버려진 자식

by 진동길

6장. 버려진 자식

(1975년 10월 ~ 1976년 11월)


가을이 깊어졌다.

추수가 끝난 들녘은 허전했다. 논바닥에는 짚만 남아 바람을 타고 굴러다녔고, 낫질이 지나간 자리마다 흙빛이 드러났다. 코스모스는 시들어 목을 꺾었고, 뒤란 감나무 잎은 하나둘 떨어져 마당을 덮었다. 계절은 늘 그렇듯, 세상을 내려놓는 쪽으로 조용히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해원장 안에서는, 내려놓는 대신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기백은 말을 잃었다.

엄마가 사라진 지 한 달이 지나도 아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막돌이 어멈이 “밥 먹자, 도련님” 해도, 최태국이 “대답해라” 해도, 기백은 고개만 아주 조금 움직일 뿐이었다. 말은 목구멍 어딘가 깊은 곳에 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밥도 거의 먹지 않았다. 수저가 입술에 닿으면 고개를 돌렸다. 막돌이 어멈이 “안 먹으면 죽는다” 해도, 아이는 죽는 것쯤은 이미 겪은 얼굴이었다. 국 한 숟가락, 밥 서너 술—그것이 하루였다. 뺨은 홀쭉해지고 눈은 커졌는데, 그 눈에는 사람을 찾아 붙는 힘이 사라졌다. 아이 눈은 원래 사람을 붙잡아두는 법인데, 기백의 눈은 사람을 피해 달아났다.

밤이면 악몽이 왔다.

“엄마—!”

기백은 땀에 젖은 채 벌떡 일어나 숨을 헐떡였다. 막돌이 어멈이 달려와 품에 안아도, 아이의 몸은 한참을 떨었다.

“아가, 괜찮다카이. 꿈이라카이.”

하지만 기백에게는 꿈과 현실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 엄마가 떠난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아이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버텼다. 잠든다기보다, 견딘다는 쪽이 맞았다.




10월 말, 산파 박 씨가 찾아왔다.

막돌이 어멈이 급히 불러온 것이었다. “밥을 안 먹는다카이, 말도 안 한다카이.” 산파는 대문을 들어서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이 집은 늘 뭔가가 부서져 있었다. 사람도, 마음도, 가끔은 숨도.

“기백이는 어데 있노?”
“안채 방에 있심더. 하루 종일 벽장 앞에 앉아 있습니더.”

산파가 안채로 들어가니, 기백은 벽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벽장 문을 조금 열어 안을 들여다보던 아이는 산파의 기척을 느끼자 재빨리 벽장 문을 닫았다. 마치 자기 심장도 같이 닫아버리는 것처럼.

“기백아.”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 박 씨 할매다.”

그제야 기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퀭했다. 산파는 가슴이 쑤셨다. 아이는 아직 다섯인데, 눈빛은 이미 어디까지 가버린 것 같았다.

산파는 아이 곁에 앉았다. 아이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힘도 없는 듯했다.

“니 엄마가 왜 떠났는지… 아나?”

기백은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살려고 떠난 기다.”

그 말에 아이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산파는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니 엄마는 여기 더 있으면 죽을 것 같았던 기다. 니 아부지한테, 이 집한테.”

산파가 손을 뻗어 아이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아이 손은 원래 따뜻해야 하는데, 이 집 아이 손은 벌써 겨울 같았다.

“그래도 니를 버린 기 아이다. 니를 살리고 간 기다. 니가 살아남길 바라면서.”

기백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울음도 말처럼 막혀 있었다. 산파는 아이를 가만히 안았다.

“울어라. 울어도 된다.”

그제야 기백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는 눈물이었다. 울음은 목구멍에서 막히고, 눈물만 조용히 흘렀다. 아이는 산파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작은 손이 힘껏 붙잡았다. 놓치면 또 사라질까 봐, 붙잡을 수 있는 건 뭐든 붙잡아야 하는 것처럼.

산파는 아이 등을 쓸어주며 중얼거렸다.

“살아야 한다. 기백아. 니 엄마를 위해서라도.”




첫눈이 내린 날이었다.

12월 중순, 해원에 눈이 내렸다. 처음에는 가루처럼 흩어지던 것이, 이내 함박눈으로 바뀌어 소리 없이 세상을 덮었다. 마당도 담장도 뒤란 감나무도 하얗게 변했다. 세상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홍시같이 벌어진 상처 위에 시린눈을 덮었다.

기백은 뒷문 밖에 서서 눈을 맞았다. 쾡한 눈두덩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가 녹아내렸다. 차갑고 축축했다. 아이는 그 차가움이 좋았다. 마음속 어딘가도 같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얼어붙으면, 덜 아플 것 같았다.

기백은 해원천 쪽으로 걸어갔다.

막돌이 어멈이 뒤에서 “도련님! 어딜 가십니꺼!” 불렀지만, 아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눈 내리는 들녘을 가로질러 다리로 갔다. 다리 위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나무가 젖은 숨을 내쉬듯 낮게 삐걱거렸다.

강물은 얼지 않았고, 검게 흘렀다. 검은 물 위로 흰 눈이 떨어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들이—요 며칠, 요 몇 달—너무 많았다.

기백은 한참을 물을 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그 한마디는 오래 잠겨 있던 문을 겨우 밀어 여는 소리 같았다.

“엄마, 어데 있노?”

눈이 더 세차게 내렸다. 바람이 아이 뺨을 스쳤다.

“내는… 여기 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말없이 흐르는 물소리뿐이다.

막돌이 어멈이 헐레벌떡 달려와 아이를 안아 올렸다.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십니꺼!”

기백은 어멈의 어깨에 얼굴을 묻지 않았다. 그저 저편 화림리 쪽을 바라봤다. 다리 너머, 엄마가 사라진 방향. 눈발 사이로 그 길은 희미했고, 그 희미함이 기백은 더 무서웠다.

“어멈…”

“예?”

“엄마… 안 오나?”

어멈은 말이 막혔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낍니더’라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이 아이 가슴에 칼처럼 꽂힐까 봐, 막돌이 어멈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아이의 등을 한 번, 두 번 쓸어내렸다.

“그래도… 마님은 도련님을 사랑했습니더.”

기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말은 아이에게 아직 너무 뜨거웠다. 뜨거운 건 잡는 순간 손이 데이는 법이라, 아이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날 밤, 기백은 아무도 모르게 벽장 깊숙한 곳을 열었다. 엄마가 남긴 보따리—아이 손으로는 다 풀어내기 어려운 매듭을, 한참을 끈질기게 만지작거려서, 마침내 풀어냈다. 종이 뭉치가 나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서 유난히 컸다.

한자로 빽빽이 적힌 종이들, 붉은 도장, 낯선 인장. 아이는 읽지 못했고 이해도 못했다. 다만 종이 위에 찍힌 붉은 자국들이 엄마의 핏방울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작은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글씨는 아이 눈에 그림처럼 남았고, 엄마 손이 지나간 자국처럼 느껴졌다.

기백은 그 쪽지를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문질렀다. 마치 그 종이에서 엄마 온기가 다시 묻어나올 것처럼.

그리고 종이 뭉치를 가슴팍에 꼭 끌어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문서가 아니었다. 약속 같은 것이었다. 엄마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그럴지도 모른다는—아이의 마지막 기도였다.




1976년 봄이 왔다.

감나무에 새순이 돋고, 들녘에 보리가 자랐다. 해원천 얼음이 풀리며 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세상은 살아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윤 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백은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네.” “아니요.”
짧은 대답뿐이었다. 막돌이 어멈이 “식사 하시오” 하면 “예” 하고 입은 열리는데, 목소리에는 온기가 없었다. 밥 냄새가 나도, 국 김이 올라와도, 아이는 그 앞에서 배고픈 얼굴을 하지 않았다. 말은 나왔지만 마음은 나오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예전엔 엄마가 이야기를 건네면 함박웃음이 먼저 터지던 입술이, 이제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법이 없었다. 얼굴이 굳었다. 굳은 얼굴은 어른 같았고, 어른 같은 아이는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어멈은 아이를 볼 때마다, 무언가가 아직도 그 다리 위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꼈다.

막돌이 어멈이 산파 박 씨에게 속삭였다.

“도련님이… 달라졌습니더. 아이가 아이 같지 않습니더.”

산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가 깊은 기다. 상처에는 시간도 필요하고, 흙도 필요하고, 물도 필요하다.”

“근데 나으리는 새 마님 들일 준비를 한다카이.”

산파는 한숨을 쉬었다.

“그 양반은…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기다.”

그 말은 막돌이 어멈의 마음 한구석을 더 시리게 만들었다. 어멈은 그 시림을 입 밖으로 못 내고 손끝으로만 내보냈다. 기백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불을 덮어주고, 밥상을 차리는—그런 일들로.




어느 날, 최태국이 기백을 불렀다.

“기백아, 이리 와봐라.”

아이는 사랑채로 갔다. 최태국은 책상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연기가 방 안에 눌어붙어 벽지까지 누렇게 만드는 냄새였다. 그 냄새 속에는 늘 태국의 탐욕과 술기운이 찌들어 있었다.

“니 엄마 일은 이제 그만 생각해라.”

기백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계집은 우리를 버리고 간 기다. 돌아올 리 없다.”

말끝에 침이 묻어났다. 최태국은 그 침을 아무렇지도 않게 삼키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볐다. 불씨가 죽는 소리가 났다.

“니는 이제 최 씨 가문 장손이다. 똑바로 해야 한다.”

잠깐 뜸을 들인 다음, 그는 더 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곧 새 엄마가 올 끼다. 그때부터는 똑바로 행동해라. 알았나?”

그때 기백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봤다. 다섯 살 아이의 눈에는 원래 묻는 게 많아야 하는데, 그 눈에는 묻는 대신 버티는 것이 있었다. 두려움도 슬픔도 아닌, 한 겹 더 깊은 차가움. ‘왜’라는 말 대신 ‘싫다’가 먼저 들어앉은 눈빛이었다.

최태국은 순간 멈칫했다. 그 눈빛이 아이 것이라기보다, 어디서 오래 삭아 올라온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담배 연기가 목에 걸린 사람처럼.

“…나가봐라.”

기백은 돌아서서 나갔다. 발소리는 작았지만 단단했다. 최태국은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가 부서진 게 아니라, 굳어가는 것 같았다.
굳은 것은 잘 안 부서진다.
대신—사람을 찌른다.




여름이 지나고, 다시 가을이 왔다.
들녘은 또 한 번 벼를 익혔고, 해원천은 같은 소리로 흘렀다. 사람들은 또 낫을 들었다. 해원 시내는 개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땅값이 오른다, 읍내가 커진다, 길이 난다—그 말들은 마치 새로운 계절처럼 사람들을 들뜨게 했다. 하지만 기백에게 계절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의 시간은 여전히 다리 위에 묶여 있었다.

기백은 때때로 뒷문을 바라봤다. 누가 부르면 대답은 했지만, 대답과 마음은 늘 따로였다.

정 할머니가 화림리에서 찾아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화림리 장터에서 국밥집을 하는 노파였다. 마을 사람들은 집안에 큰일이 나면 정 할머니를 먼저 불렀고, 마음이 무너졌다 하면 그 국밥집 문턱을 먼저 밟았다. 장터의 소문이든, 집집마다 숨겨둔 사정이든, 할머니 귀에는 다 흘러들어 갔다. 그래서 정 할머니는 소식통이었고, 누군가의 속을 붙잡아주는 상담자였고, 때로는—사람들이 말로는 못 붙이는 내일을—툭 건드려 예언처럼 던지는 사람이었다.

그날도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느리게 마당을 건너왔다. 발끝이 낙엽을 한 장씩 건드리며 지나갔다.

안채 쪽으로 가려던 할머니는 걸음을 잠깐 멈추었다. 뒤란 감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감나무는 윤 씨가 시집올 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름엔 그늘을 내주고, 가을엔 홍시를 달아주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로 집안을 훤히 드러내던 나무였다. 윤 씨가 기백의 탯줄을 묻었던 자리도, 그 나무 밑이라고들 했다.

정 할머니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낮게 말했다.

“이 집 감나무가… 볼 꼴, 못 볼 꼴 참 많이 봤제.”

나무가 본 것은 홍시 익는 계절만이 아니었다. 밤마다 들리던 숨죽인 울음도, 새벽의 빈 이불도, 마당을 가로질러 뒷문 쪽으로 스미던 발자국 소리도—그런 것들까지 죄다, 말없이 봤을 터였다.

정 할머니는 나무에서 시선을 거두고 안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루 끝에 서 있던 막돌이 어멈이 할머니를 보자 허리를 굽혔다. “오셨능교…” 하는 말이 입 끝에서 맴돌았지만 끝내 나오지 못했다. 대신 두 사람은 잠깐, 말 없는 눈빛만 주고받았다. 막돌이 어멈의 눈에는 ‘어찌해야 됩니꺼’라는 말이 고여 있었고, 정 할머니의 눈에는 ‘내가 다 들었다’라는 말이 앉아 있었다.

안채로 들어서자 방 안 공기가 이상하게 눌어 있었다. 불을 때도 따뜻해지지 않는 집, 사람의 기운이 빠져나간 자리처럼.

기백은 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인기척이 있어도 내다보지 않았다.

정 할머니는 막돌이 어멈과 한 번 더 눈빛을 나누고, 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의 침묵이 너무 깊어서, 사람 말이 닿을 자리부터 사라져 있는 듯했다.

“기백아.”

정 할머니가 낮게 불렀다.

아이는 한참 뒤에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정 할머니는 마루 아래, 마당의 흙을 한 번 내려다봤다. 그리고 마치 집 전체에 들리게 하듯 말했다.

“흙이, 니 발밑에 있어서 만만해 보이제. 흙이 암것도 모르는 것 같제?”

기백은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흙’이라는 말이, 엄마가 사라진 날의 냄새와 어딘가 맞닿아 있는 것처럼 가슴이 잠깐 쿵 했다.

정 할머니가 다시 아이를 보며 말했다.

“엄마는 니를 버리고 간 기 아니다.”

할머니는 하늘과 땅을 한 번 쓸어보았다.

“흙은 거짓말 안 한다. 흙이 울면 사람도 울고, 흙이 숨 쉬면 사람도 살아 있다.”

기백은 끝까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살아 있다’라는 말 하나는 가슴에 들어왔다.

정 할머니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마치 국밥집에서 손님 앞에 그릇을 내려놓을 때처럼, 서두르지 않고 숨을 고른 다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뜨거운 김이 스며들 듯 천천히 방 안에 퍼졌다.

“기백아, 살아야 된다.”

할머니는 아이를 보지 않고, 마루 아래 흙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그 흙은 윤 씨 발자국도, 기백의 맨발도, 밤마다 누군가 삼키던 울음도 다 받아먹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사람이 살아야… 기다릴 것도 기다리고, 찾을 것도 찾는다. 죽어버리면—그라모 끝이라. 엄마도 못 찾고, 엄마가 니한테 남긴 것도 다 남의 손에 넘어가삔다.”

정 할머니는 그제야 기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작은 몸이 돌처럼 굳어 있는 걸 보면서도, 할머니는 말을 세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다만 한 숟가락 더 떠먹이듯, 마지막을 조용히 얹었다.

“니가 살아 있는 게, 니 엄마한테는… 아직 끊기지 않은 줄 하나다. 그 줄 놓치면, 진짜로 끝이다. 알았나?”

기백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손가락 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치 뜨거운 그릇을 만진 것처럼. ‘살아 있다’라는 말이, 그 작은 손끝에서부터 조금씩 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1월이 되자, 해원장에는 바람결이 달라졌다.
바람이 달라지면 사람 손도 달라진다. 막돌이 어멈은 장롱 깊은 데서 새 이불을 꺼내 햇볕에 말리고, 안채 마루를 몇 번이고 걸레질했다. 장독대 둘레의 잡풀을 뽑아내고, 뒤란은 괜히 한 번 더 쓸어냈다. 마치 집이 스스로 숨을 고르며, 누군가를 들이기 전의 자세를 갖추는 것처럼.

최태국은 시내를 자주 나갔다 들어왔다.
옷차림이 전보다 반듯해졌고, 머리칼도 기름을 발라 눌렀다. 말끝에는 어딘가 가벼운 웃음이 묻어났다. 그 웃음이 오히려 방 안 공기를 더 낯설게 만들었다.

기백은 그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알지 못했다.
그래도 느꼈다. 집이 다시 “누군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준비 속에는, 엄마 자리만 비어 있다는 것도.

막돌이 어멈은 아이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해도 아이가 받아낼 자리가 없을까 봐서.

기백은 말 대신, 더 자주 벽장을 바라봤다.
밤이 되면 이불속에서 슬그머니 손을 뻗어 보자기 매듭을 더듬었다. 종이의 모서리, 천의 올, 먹이 번져 거칠어진 쪽지의 감촉—그걸 손끝으로 확인했다. 누가 건드렸는지, 무언가 사라졌는지, 그런 건 아이가 말로는 몰라도 손은 알아챘다. 아이에게 세상은 아직 그 보따리 안에 갇혀 있었다. 엄마 냄새가 묻어 있는 천 조각과, 엄마가 남기고 간 것들의 촉감 속에. 기백은 그 손끝에 남은 흔적을, 고집스레 지키고 있었다.

그해 가을 끝자락, 기백은 뒷문 앞에 서서 한참을 밖을 보았다.
들녘은 다시 비어 가고, 바람은 마당 낙엽을 몰아 담장 밑으로 쓸어 넣었다. 감나무는 잎을 털어내며, 자기 속을 점점 드러내고 있었다.

기백은 아주 작게—숨처럼—중얼거렸다.

“엄마… 나는 안 잊는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
듣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 말이었다.

해원천은 여전히 흘렀다. 감나무는 낙엽을 털어냈다. 계절은 내일을 향해 또 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해원장에도—윤 씨가 비워둔 자리를 다른 이름으로 메우려는—다음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계절의 문턱에는—아직 얼굴도 모르는 한 여자 이름이, 벌써부터 발소리처럼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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