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서(序) — 장터의 혀

by 진동길

제1부: 땅의 주인들 (1970~1997)


제2편: 형제들의 탄생 (1977~1985)


서(序) — 장터의 혀 (1977년 1월 / 해원 오일장)


해원천 바람이 장터로 불어 들어오면, 사람들은 먼저 냄새를 맡고 나서 말을 꺼냈다. 겨울 흙냄새, 짐승 기름 냄새, 젖은 짚 냄새. 그 냄새들이 한데 모이면 해원 오일장이 섰고, 장이 서면 마을의 혀가 함께 섰다. 장터의 혀는 물건 값을 흥정하기 전에 사람 값을 먼저 흥정했다. 누구는 흥했고, 누구는 망했고, 누구는 웃었고, 누구는 밤마다 울었다. 땅이 사람을 삼키듯, 말이 사람을 삼켰다.


해원장도 그 혀를 피하지 못했다. 담장이 높아도 소문 앞에선 낮았고, 문이 두꺼워도 말 앞에선 얇았다. 집안이 오래될수록 바깥의 말은 더 쉽게 스며들었다. 낡은 집은 늘 그렇다. 기둥에 스민 습기처럼, 타인의 말도 기둥을 타고 올라 안채까지 번진다.


그 겨울, 혀가 가장 오래 씹어 마모시킨 이름이 있었다. 소피아 김.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보다 먼저 말투를 이야기했다. 낯선 억양, 먼 데서 굴러온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돌아온 사람에게서만 나는 기척. 돌아온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를 남기고 온다. 떠나온 땅의 흔적, 떠나온 시간의 빚, 떠나온 관계의 금.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처럼 몸에 걸려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발목을 잡는다.


“저 여자는 바다 건너서 살았다더라.”
“근데 왜 돌아왔노.”
“돌아올 때는 이유가 있지. 돈 아니면… 빚이지.”

누군가는 ‘빚’이라는 말을 혀끝에서 굴렸다. 그 말은 장터에서 가장 빨리 부풀었다. 빚은 사람을 묶는 끈이고, 끈은 늘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다. 소문은 자세를 갖추지 않았다. 다만 방향만 가리켰다. 어느 날은 “집안이 기울었다”로, 어느 날은 “부모가 무너졌다”로. 그리고 마침내—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문장 하나가 확인된 사실처럼 굳어졌다. “빚이 사람을 끌고 온다.” 그 끈이 그녀를 어디로 끌고 왔는지, 사람들은 또 다른 끈을 잡아당겼다. 최태국의 이름이었다.




해원 오일장의 혀는 결혼을 사랑으로 믿지 않았다. 장이 믿는 것은 거래뿐이었다. 누군가를 데려오려면 값을 치러야 하고, 누군가에게 묶이려면 담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례’ 앞에서도 장부를 펴야 했다.


“저 집안은 뭐가 급했길래…”
“급한 쪽이 값을 더 치르는 법이라.”

그 말들이 국밥집 김 사이로 떠올랐다가,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정 할머니 국밥집은 말들의 우물이었다.
사람들은 국밥 한 숟갈 뜨며 남의 사정을 퍼 올렸다. 뜨거운 국물 앞에서 말은 더 잘 미끄러졌다.
정 할머니는 말을 말로 이기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말을 오래 두었다.
오래 두면 거짓은 먼저 냄새가 나고, 진실은 끝내 더 단단해진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그날도 누군가 혀를 세워 말했다.
“돌아온 건 사정이 있어서고, 결혼은 더더욱 사정이 있어서지.”
“사정이 뭔데.”
“사정은… 빚 같은 거지. 빚은 사람을 고향으로도, 남의 집안으로도 끌고 가.”
마지막 말은 낮게 깔렸다.
“부모 빚은 자식이 갚는 거라.”

정 할머니는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잠깐 장터의 혀를 멎게 했다. 멎은 사이, 정 할머니의 눈이 먼 데를 보았다. 해원장 쪽이었다.
사람들은 몰랐다. 정 할머니가 보고 있는 것이 ‘소문’이 아니라 ‘흐름’이라는 것을.
땅이 사람을 붙들어 놓듯, 집안도 사람을 붙든다. 붙잡힌 사람이 숨을 크게 쉬면, 그 숨은 언젠가 다른 생명으로 옮아 간다. 그렇게 집안은 이어지고, 땅은 더 무거워진다.




소피아는 장터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씹혔다. 보이지 않는 것은 더 많이 상상되고, 상상된 것은 더 쉽게 확신이 된다.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을 정확히 모르면서도 말했고, 그녀의 사정을 정확히 모르면서도 단정했다. 장터의 혀는 언제나 그렇게 마을의 운명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해원장은 그 혀가 써놓은 문장을, 말없이 받아 적는 집이었다.
안채의 새벽은 여전히 조용했고, 조용함 속에서는 속을 비우는 소리만 더 또렷했다.

겨울의 집은 닫혀 있었지만, 닫힌 것들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 있었다.


봄이 오면 흙은 풀리고, 풀린 흙에서는 새 뿌리가 나온다.
뿌리는 먼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땅의 결을 바꾸고, 물길을 바꾸고, 집안의 숨길을 바꾼다.
해원장도—아직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를 품고 있었다.


장터의 혀는 그 뿌리의 이름을 모르면서도 이미 예감했다.
이 집안은 더 많은 숨을 낳을 것이다. 더 많은 피를 만들 것이다. 더 많은 형제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형제들은 자라서, 이 땅과 집안의 주인이 되려 들 것이다.


소문은 늘 한 발 먼저 태어난다.
해원 오일장 한복판에서, 그 해의 봄보다 먼저 태어난 것은 말이었다.
말이 먼저 태어나고—그 다음에 사람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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