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10장 세 번째 탯줄

by 진동길

10장 세 번째 탯줄


1979년 7월 초순이었다. 해원천 물은 낮에 달궈진 흙을 식히느라 더디게 흘렀고, 더딘 물소리 위로 개구리 울음이 들끓듯 얹혔다. 논둑 풀벌레들은 날개를 비벼대며 열기를 견뎠고, 안채 처마 밑으로 박쥐 한 마리가 한 번 휙 스쳤다가 사라졌다. 밤은 깊어가는데 더위는 가라앉지 않았다. 마루에 놓인 부채는 누가 손을 대지도 않는데 힘없이 기울어 있었다. 바람은 없었다. 있는 것은 눅눅한 공기와 땀 냄새, 그리고 안방에서 새어나오는 숨 막히는 신음뿐이었다.

소피아는 이불깃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젖었다. 땀이기도 했고, 몸 깊은 데서 솟아나는 뜨거운 물 같기도 했다.

"으윽…."

허리께가 서서히 조여 오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쥐어짜는 듯했다. 둘째 이현을 낳을 때도 이랬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게가 달랐다. 아랫배가 돌덩이처럼 내려앉아 숨 하나가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문밖에서 막돌이 어멈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낮으되 단단한 소리였다.

"마님, 괜찮습니꺼…?"

소피아는 대답 대신 숨을 삼켰다. 어멈은 그 숨소리만 듣고도 더 묻지 않았다. 진통의 얼굴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 얼굴을 오래 본 손이었다.

어멈은 부엌으로 갔다.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고 가마솥에 물을 올렸다. 불길이 일어서는 냄새가 먼저 부엌을 채우고, 곧 끓는 물의 습기가 기둥과 천장에 달라붙었다. 가마솥 뚜껑이 덜컹거렸다. 그 덜컹거림이 안방으로도 스며들어, 소피아의 통증을 더 조급하게 흔들어 놓는 듯했다.

마당 한쪽, 사랑채 처마 밑에는 다섯 살짜리 수만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이는 말이 없었다. 말을 못한다기보다—말이 나오는 길이 막힌 아이였다. 입술은 닫혀 있고 눈만 열려 있었다. 안채 쪽 불빛을 멀거니 바라보는 그 눈은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렸다.

수만의 어멈이 작년 겨울 세상을 뜬 뒤로 막돌이 어멈이 그 아이를 품에 끼고 키웠다. 밥을 먹이고, 옷을 꿰매 주고, 겨울이면 아궁이 앞에 앉혀 손을 비볐다. 양자처럼, 아니 양자보다 더 가까이 두고 키웠다. 그런데도 아이는 말이 없었다. 말 대신 눈으로 집안을 배웠다. 그 눈이 오늘 밤도 안채를 향해 붙박여 있었다.




밤 열 시쯤, 대문이 삐걱 열리며 산파 박 씨가 들어섰다. 마흔 중반쯤의 여자였다. 걸음은 빠르되 서두르지 않았다. 손에는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그 보자기 속에는 칼과 실과 약재와, 사람 생을 건너게 하는 작은 것들이 들어 있을 터였다.

"왔심더."

막돌이 어멈이 마중을 나갔다.

"고맙심더. 어서 들어오이소."

"진통이 언제부턴교?"

"저녁 여섯 시쯤부터…"

박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채로 들어섰다. 방 안 공기는 이미 젖어 있었다. 땀과 뜨거운 물과 오래된 이불의 눅눅한 냄새가 한 덩어리로 뭉쳐 있었다.

박 씨는 소피아의 배를 짚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단단한 것이 밀고 올라왔다 내려갔다 했다.

"마님, 아직 멉니더. 숨 크게 들이마시고… 참아 보이소."

소피아는 턱으로 끄덕였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물 한 사발만요. 뜨겁지 않게."

어멈은 부엌으로 나갔다가 물을 떠 오며 마당을 지나쳤다. 수만이 그대로였다.

"수만아. 이리 와라. 밤이 찬데."

아이의 눈이 잠깐 어멈을 향했다가 다시 안채로 갔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멈은 더 말하지 않았다. 물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뜨거운 그릇의 온기가 누군가의 체온이 되어 주는 것 같았다.




자정이 지나자 밤은 더 깊어졌다. 깊어지면 시원해져야 하는데 그날은 거꾸로였다. 열기는 땅 밑에서부터 다시 올라와 마루 밑을 후볐고, 사람 숨은 더 무거워졌다.

소피아의 신음은 잦아들었다가도, 어느 순간 크게 터졌다. 박 씨는 말이 적었다. 말이 적은 사람은 손이 정확했다. 손을 씻고, 이마의 땀을 닦고, 다시 배를 짚고, 다시 기다렸다. 기다림이 산파의 일이라는 듯.

"이제 슬슬 내려옵니더."

소피아가 겨우 물었다.

"…얼마나 더…."

"한 시간… 두 시간… 더 걸릴 낀데요. 마님, 기운 빼지 마이소. 지금부턴 힘 아껴야 됩니더."

소피아는 천장을 응시했다. 전등은 흔들리지 않았는데도 불빛이 어쩐지 일렁였다. 진통 속에서는 눈도 제멋대로였다.

그때 마당에서 발소리가 났다. 사랑채 문이 열리며 기백이 나왔다. 일곱 살 남짓한 사내아이였다.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비비며 안채 쪽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의 불빛은 아이에게 늘 '무슨 일이 났다'는 신호였다.

"어멈! 무슨 일인교?"

막돌이 어멈이 부엌문 틈에서 아이를 봤다.

"기백아, 들어가 자라."

기백은 불빛을 턱으로 가리켰다.

"안방에 불은 와 켜놨노…"

"마님이 애 낳으신다."

기백 얼굴이 딱 굳었다. '엄마'라는 말이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 있던 아이였다. 윤 씨는 이미 없었다. 그 빈자리로 들어온 여자의 아이가 또 하나 는다. 아이는 '또'라는 말을 삼켰다. 삼키면 더 쓰게 남는 말이었다.

"…또요?"

"그래. 또다."

어멈은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돌려세웠다.

"네가 나설 일 아이다. 들어가라."

기백은 마당을 한 번 더 훑었다. 그리고 처마 밑 수만을 보았다. 다섯 살짜리, 말 없는 아이. 두 아이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웃음은 없었다. 서로의 처지를 알아보는 눈이었다. 엄마가 없다는 것, 그게 사람을 어떻게 조용하게 만드는지.

기백은 사랑채로 돌아갔다. 문을 닫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문 너머의 신음과 물 끓는 소리가 아이의 머리맡에 눌러앉았다.




새벽 두 시 반.

소피아의 비명이 방을 찢었다. 그 소리가 마당을 넘어 해원천 쪽까지 닿았을지도 모른다. 개구리 울음이 잠깐 멎었다가, 더 크게 다시 시작했다.

박 씨가 소리쳤다.

"마님! 힘 주이소! 지금이다!"

소피아는 이불을 움켜쥐고 온몸을 한쪽으로 몰아붙였다. 땀이 눈에 들어가 앞이 흐려졌다.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 박 씨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나온다… 나온다…."

그 순간 박 씨 얼굴빛이 한 번 달라졌다. 잠깐이었지만 그 잠깐이 방 안 공기를 얼렸다.

"…탯줄이…."

소피아의 숨이 끊겼다.

"뭐라예…?"

"목에 감겼심더."

박 씨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는 익숙하게 손가락을 밀어 넣어 아이의 목을 옥죄고 있는 탯줄의 결을 읽어냈다. 자칫 당기면 끊어지고 머뭇거리면 아이 숨이 넘어갈 판이었다. 박 씨는 탯줄과 아이 목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꼬인 타래를 하나하나 밀어 올리며 감긴 고리를 벗겨 냈다.

한 번.

아이의 목은 작은데 탯줄은 끈질기게 두 겹으로 감겨 있었다.

두 번.

생을 잡아당기는 끈처럼.

"됐다."

아이의 몸이 세상 밖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그러나 울음이 없었다.

방 안이 이상할 만큼 조용해졌다. 조용함은 때로 소리보다 무섭다. 소피아의 숨소리만 가늘게 이어졌다. 박 씨는 아이를 들어 올렸다. 작았다. 너무 작아서, 손 안에서 부서질 것 같았다.

박 씨는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한 번.

아무 소리 없었다.

두 번.

여전히 고요했다.

세 번.

아이는 울지 않았다.

박 씨는 아이의 입을 벌려 숨을 불어넣었다. 따뜻한 숨이 아이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등을 쳤다.

그제야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으애…."

약한 울음이었다. 그러나 울음은 울음이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울음은 생의 첫 언어였다.

박 씨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 속에 안도와 피로가 섞여 있었다.

"마님, 아들입니더."

소피아는 천장을 보았다. 천장은 흐릿했다. 눈물 때문이었다. 눈물이 났다. 기쁨인지 안도인지, 아니면 '또 한 번 살아남았다'는 어떤 체념인지—그것은 섞여서 흘렀다. 섞인 눈물은 하나의 감정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생은 늘 그렇게 복잡했다.

막돌이 어멈이 따뜻한 물과 수건을 들고 들어왔다. 박 씨가 아이를 씻기고, 어멈이 포대기를 준비했다. 물은 아이의 몸에서 핏물을 씻어 냈다. 씻겨진 아이는 더 작아 보였다. 작고, 붉고, 떨리는 몸이었다.

소피아는 아이를 가슴에 안았다. 포대기 속에서 아이는 잠깐 눈을 떴다. 까만 눈동자 하나가 어머니를 향해 고요히 떠 있었다. 그 눈은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눈 속에 세상이 처음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소피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름을 부르려다 멈췄다. 이 집에서 이름을 짓는 건 늘 태국이었다. 태국의 붓끝에서, 태국의 침묵에서, 사람의 생이 표식처럼 찍혔다. 이름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겨지는 것이었다.

소피아는 아이의 이마에 입맞췄다. 탯줄이 목을 죄고도 살아 나온 아이. 그 살아남음이 앞으로의 삶까지 미리 말해 주는 것 같아, 소피아는 잠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이 있다. 앞으로 올 시간들. 그 시간 속에서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소피아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예감만 있었다. 이 아이는 조용할 것이다. 조용하지만, 깊을 것이다.

창밖으로 동이 트기 시작했다. 어둠이 천천히 물러갔다. 물러가는 어둠 뒤로 빛이 스며들었다. 새벽빛이었다. 새벽빛은 하루 중 가장 조용한 빛이다. 조용한 빛 속에서, 새로운 생이 시작되었다.




소피아는 아이를 내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밤새 휘몰아쳤던 통증의 자리엔 뜨거운 공백만 남아 있었다. 창밖으로 개구리 울음이 잦아들고, 어둠이 얇아지기 시작했다. 소피아는 그 얇아지는 소리 속으로—탈진한 몸을 맡겼다.

박 씨는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물기 어린 손에서 여름밤 냄새가 났다. 막돌이 어멈이 밥을 지어 한 그릇 내놓았다. 밥은 뜨겁고 김이 났다. 뜨거운 밥이 사람을 살리는 때가 있다.

"고생했심더."

"별일 아입니더."

박 씨는 숟가락을 들었다가 말을 한 번 삼켰다.

"근데…."

어멈이 눈을 들었다.

"뭐 말입니꺼."

"탯줄 목에 감기고 나온 애들… 더딘 경우가 있심더."

"더디다꼬예?"

"말이 늦거나… 성정이 조용해지거나…."

어멈은 잠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침묵 속에 '그래도 살아났다'는 안도와, '앞으로도 길겠구나' 하는 예감이 같이 있었다.

"살았으면 됐지예."

박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모요."

밖으로 나오니 새벽 공기가 어젯밤보다 조금은 가벼웠다. 개구리 울음도 잦아들었다. 박 씨는 대문을 나서다가 한 번 뒤돌아보았다. 안채 창문에 불빛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불빛은 집안의 숨은 것들을 끝까지 비추고 있었다.




사흘 뒤 해원 시장이 섰다. 시장은 늘 '살았다'는 소리로 가득했다. 고추 냄새, 젓갈 냄새, 땀 냄새, 그리고 사람 말소리. 그 속에서 국밥집 정 할매가 앉아 있었다. 손은 고추를 만지작거리는데 눈은 어딘가 먼 데를 보는 눈이었다.

옆 좌판 떡장수 김 씨가 말을 걸었다.

"할매, 소식 들었심니꺼? 해원장 댁에 아 하나 더 났다 카데예."

"그래? 몇째고."

"셋째라 카더만요. 아들이라네예."

정 할매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매끄러운 고추 한 알이 마른 손끝을 빠져나가 바닥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핏줄이 다 제각각인 게지. 첫째는 영락없는 윤 씨 피고, 그다음은 순 새댁 핏줄이더만…."

김 씨가 웃으며 넘기려 했다.

"에이, 할매도. 애가 무슨 죄가 있다꼬—"

정 할매가 김 씨 말을 끊으며 목소리를 한 톤 더 낮췄다.

"근디 말이다…."

김 씨가 귀를 가까이 기울였다.

"저 집에 하인 자식 하나 있잖는교. 강수만인가 뭔가…."

"아, 막돌이 어멈이 작년 겨울에 그 어미 보내고 키운다는 그 애?"

"맞다. 그 애 말이다…."

정 할매는 고추를 한 알 집어 들고 빙글 돌렸다.

"사람들 입에서 말이 돈다 아이가. 저 애가… 진짜 하인 자식이 맞나 싶다 카이."

김 씨의 눈이 커졌다.

"그기 무신 소리고예?"

"글쎄 말이다. 나도 확실히는 모르제. 근디 저 집 드나드는 사람들 말 들어보면… 저 애 코며 입이며, 묘하게 닮은 데가 있다 카더만."

"누구를?"

정 할매는 대답 대신 턱으로 해원장댁 쪽을 가리켰다. 김 씨가 입을 쩍 벌렸다.

"할매!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함부로가 아이제. 다들 그카던데 내가 어째. 공공연한 비밀이라 카이. 핏줄은 숨길 수 없다 아이가…."

정 할매는 잠깐 침묵했다가, 목소리를 더 낮춰 이었다.

"그라이께 저 집은 더 꼬인 기라. 첫째는 윤 씨 핏줄, 둘째 셋째는 새댁 핏줄… 그런디 그 사이사이에, 하인 자식이라 카는 애가 하나 더 있는디, 저 애가 진짜 누구 씨인지는…."

할매는 말끝을 흐렸다. 흐린 말이 더 오래 남는 법이다.

"아무도 입 밖에 안 낸다 카더만. 근디 눈 있는 사람은 다 본다 아이가. 저 애 걸음걸이며, 턱선이며… 긴가민가 싶어도 자꾸 눈이 간다 카이."

김 씨는 입을 다물었다. 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말 속에 담긴 집안의 그림자가 너무 짙어서였다.

정 할매가 다시 고추를 만지작거렸다.

"그라고 이번에 탯줄 목에 감기고 나온 셋째 애는… 운명이 한번 꼬인 기라."

"그기 또 무슨 소리고요."

"말이 적고, 눈이 깊고, 속은 더 깊다. 겉으론 조용해도… 속에선 다 안다 카이."

정 할매는 더 말하지 않았다. 말이 많아지면 예감은 장터 소문이 돼 버린다. 할매는 고추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땅이 울 낀데."

그 말이 누구 귀에 들어갔는지, 들어가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말은 때로 들려서가 아니라 '있음'으로 남았다.




7월 15일 밤이었다. 집은 조용했으나 소피아는 잠을 못 잤다. 아이는 젖을 먹고도 한참을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아이의 숨은 더 또렷했다. 가슴께는 젖어 축축했고, 몸은 다 부서진 것처럼 무거웠다.

안채 밖, 멀리 사무실 쪽에서 종이가 넘겨지는 소리가 났다. 태국이 장부를 넘기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늘 사람의 마음을 비켜 갔다. 아이가 태어나도, 집안이 뒤집혀도, 종이 넘기는 소리만은 일정했다. 소피아는 그 일정함이 오히려 두려웠다. 무엇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옆에서, 사람은 자기 마음이 어디까지 무너질지 가늠을 못 한다.

소피아는 낮에 보았던 수만의 눈을 떠올렸다. 말이 없는 아이의 눈. 보는 법을 너무 일찍 배운 눈. 그 눈이 오늘밤 일을 그대로 품고 오래 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소피아는 이부자리 곁에 습관처럼 놓아둔 공책을 끌어당겼다. 기록으로 게워 내지 않은 밤은 몸속에 고여 독처럼 썩어 가기 마련이었다. 기록은 용서를 구하는 고백이 아니라, 생의 벼랑 끝에서 버텨 내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소피아는 망설임 없이 펜촉을 세웠다.




1979년 7월 11일 새벽 2시 47분. 셋째 아들 출생.

출생 시 탯줄이 목에 두 번 감김. 울음이 약했으나 살아 있음.

산파 박 씨 말: 이런 아이는 말이 늦거나, 성정이 조용해질 수 있다고 함.

태국은 아무 말 없음.

기백은 나를 보지 않음. 이현은 아직 어려 모름.

수만은 마당에서 밤새 앉아 있었다.

말은 없지만, 눈이…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 아이는 기억할 것이다.

소피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공책을 덮어 책상 서랍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고는 열쇠를 돌려 잠갔다. 서랍 안에 가둔다고 해서 기록된 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둠 속에 봉인된 것일수록, 공기 중에서보다 더 질기고 선명하게 살아남는 법이었다.




그날 밤, 막돌이 어멈은 부엌에 앉아 있었다. 아궁이 불은 꺼지고 재만 남았다. 재는 죽은 불의 얼굴 같아서 들여다보면 사람 마음이 푸석해졌다.

어멈이 수만을 불렀다.

"수만아, 이리 와라."

수만은 천천히 걸어왔다. 어멈은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아이는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사람 하나의 생이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을 만큼.

"니, 오늘 밤 다 봤제."

수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이 애 낳는 거. 탯줄이 목 감긴 거. 산파가 숨 불어넣는 거… 다 봤제."

수만이 다시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멈은 아이 머리를 쓸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머리카락이 얇게 휘었다. 그 얇음이 어멈 속을 건드렸다.

"수만아. 니는 이 집 자식이 아이다. 알제. 하인 자식이다. 그라니께… 저 아들들하고는 다르다."

어멈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말이 다짐이 되도록.

"근데 괜찮다. 내가 키운다. 밥 줄 거고, 옷 꿰매 줄 거고, 재울 데 줄 거다."

수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어멈은 안다. 사람은 말로만 사는 게 아니다. 말이 없을수록 더 깊게 남는 것도 있다.

어멈은 아이를 꼭 껴안았다.

이 애는 기억할 것이다. 오늘 밤을. 탯줄에 목이 묶이고도 살아 나온 아이를. 그리고 언젠가… 사람들 입에서 "그날 밤"이 다시 나오는 날이 오면, 내 혀가 아니라 내 눈이 먼저 말하게 될 낀데.

어멈은 그 '언젠가'에서 생각을 끊었다. 미래는 말로 부르면 더 빨리 온다. 다만 느낌이 있었다. 이 집안 아이들은 언젠가 서로 부딪힐 것이다. 피는 섞이지 않아도 운명은 엉킨다. 탯줄이 목을 감듯이.

"자거라."

수만은 사랑채 쪽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부엌에 남은 것은 재와, 아직 식지 않은 물의 온기와, 어멈의 오래된 숨뿐이었다.




해원천은 흘렀다. 물은 늘 그래 왔듯이 흘렀고, 사람들은 늘 그래 왔듯이 자기 사정을 끌어안고 살았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안채에서 소피아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울음을 아끼는 듯 고요했다.

소피아는 창밖을 보았다. 산 너머로 해가 올라오고 빛이 퍼졌다. 빛은 늘 새것처럼 와서, 집안의 낡은 것들을 더 또렷하게 드러냈다.

소피아는 아이의 이마에 입맞췄다.

"…살아라."

그 말은 축복이면서도 부탁이었다. 탯줄이 두 번 감겼다가 풀린 그 새벽의 끈은, 아이 목에서 풀렸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풀린 끈은 보이지 않는 데로 옮겨 가 집안 어딘가에 매달린다.

첫째의 눈, 하인의 눈, 새로 태어난 아이의 숨—그 세 가닥이, 서로 다른 곳에서 조용히 당겨지며 하나의 매듭을 만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 매듭이 풀릴지, 조여질지, 그건 아직 아무도 몰랐다.

다만 물은 흘렀고, 여름은 깊었고, 해원장댁에는 또 하나의 숨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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