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山二十四番地 (산 24번지)
1978년 겨울, 해원천의 소리
해원천 물줄기는 겨울이면 더 또렷해졌다. 여름에는 장터 먼지와 사람들 목소리, 풀벌레 울음에 묻혀 슬쩍슬쩍 지나가던 물이, 찬바람이 골짜기를 비집고 내려오면 제 숨을 도로 찾아왔다. 얼음이 다 막지 못한 틈으로 물은 얇고 길게 숨을 쉬었고, 돌은 그 숨을 붙들어 소리로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 소리를 “땅이 속으로 우는 소리”라 했고, 누군가는 “세상이 바뀌기 전날의 소리”라 했다.
물소리는 늘 같아 보이지만,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다. 흘러가는 것들은 늘 새로웠고, 남는 것들은 늘 오래되었다. 사람도 그랬고, 땅도 그랬다. 사람은 떠나고 땅은 남는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떠나간 사람의 이름이 땅 위에 남아 오래도록 마른 자국처럼 눌어붙는다.
산 24번지는 해원천 상류 쪽, 화림리와 읍내 사이를 어정쩡하게 걸친 비탈이었다. 오래전부터 그 산은 산이라기보다 번호였다. 지도 위의 숫자요, 면서기들 서류철 속의 산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그걸 “산뒷골” “도랑너머” “솔밭”이라 불렀으나, 관청에서 내려온 종이에는 딱딱하게 山二十四番地라 적혀 있었다.
그 숫자가 어느 날부터 사람들 혀끝에서 자꾸 굴렀다. 굴러서 닳고, 닳아서 매끈해지고, 매끈해진 끝에—마침내—돈 냄새가 배어 나왔다.
시장 안쪽, 떡집과 어물전 사이 좁은 골목을 지나면 예전엔 잡화점이 있던 칸이 하나 있었다. 그 칸에 ‘태국금융’ 간판이 걸렸다. 간판은 새것인데 글씨는 낡은 듯 굵었다. 유리문 안쪽은 늘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종이들이 하얗게 떠 있었고, 도장들은 붉게 살아 있었다. 먹 냄새가 났다. 흙 냄새가 아니라, 도장 냄새였다.
책상 위에 쌓인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등기부, 계약서, 위임장, 각서, 인감증명—종이들이었다. 종이들은 다 얇았으나 모이면 사람 목을 죄는 밧줄이 되었다. 최태국에게 땅은 발로 밟는 것이 아니었다. 종이로 소유하는 것이었다. 땅이 사람을 먹는 게 아니라, 종이가 사람을 먹는—그런 세상.
최태국은 사무실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기보다, 사무실을 등에 업고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사무실이 사람을 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굵은 손가락, 거친 손등, 까만 잔털. 그는 종이를 만질 때도 살을 만지는 듯했다. 종이는 그에게 가장 편한 살이었다.
“자, 이거 봐라.”
그가 펼친 것은 지적도였다. 지적도 위에 산 24번지가 기형처럼 누워 있었다. 경계선이 얽혀 있고, 그 선 사이사이에 소유자 이름들이 박혀 있었다. 이름은 글씨였으나 태국의 눈에는 모두 숫자였다. 면적, 대금, 이자, 그리고 무엇보다—시간. 시간이란, 사람을 늙히고 땅을 빼앗는 데 가장 값싼 칼날이었다.
옆에 선 이영숙이 지적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눈은 빠르고, 손은 더 빨랐다.
“사장님, 이 땅은 언제쯤…?”
최태국은 지적도 한 귀퉁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내년쯤이면 압류 들어갈 기다. 세금도 밀리고, 근저당도 잡혀 있더라. 연락도 끊겼다 아이가. 법원은 서류만 있으면 움직인다.”
‘행방불명’은 말끝에 붙는 장식이었다. 진짜 칼날은 “압류”와 “근저당” 같은 글자였다. 사람은 사라져도 종이는 남고, 종이는 사람 대신 판결을 받는다. 그러고 나면 누군가는 웃지도 않은 얼굴로, 그 판결을 주머니에 넣는다.
이영숙이 장부를 펼쳤다. 붓끝이 먹을 머금고 숫자를 삼켰다. 스물여섯. 허리는 가늘고 입술은 붉었다. 시장 2층 방의 밤은 그녀가 관리했고, 낮은 최태국이 관리했다. 둘은 서로를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이용했다. 이용하는 자들은 늘 서로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대신, 서류를 믿는다.
“원 소유자가… 누굽니꺼?”
이영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태국은 대답 대신 지적도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손가락이 산 24번지 위에서 멈췄다.
“윤….”
그는 끝까지 읽지 않았다. 이름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지워지는 법이었다. 지워진 이름 자리에, 종이는 새 이름을 앉히려고 이미 자리를 덥혀두고 있었다.
1979년 가을, 벽장 속의 비밀
서하가 태어난 지 석 달째 되던 가을, 밥상머리에서 최태국이 툭 말했다.
“내년부턴 산 24번지까지 손에 넣을 낀다.”
소피아가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국물 표면에 김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김은 늘 불안처럼 보였다. 집안에서 불안은 밥상 위에 먼저 앉아 사람들 숟가락을 느리게 했다.
“산 24번지요?”
“해원 북쪽 임야다. 한… 오천 평쯤. 세금 밀리고 근저당 잡힌 거라 곧 넘어온다.”
기백은 숟가락을 든 채로 멈췄다. 아홉 살의 손끝에서 쇠가 차갑게 식었다. 산 24번지. 처음 듣는 말인데도, 기백은 알아차렸다. 어머니가 남긴 보자기 속 종이들—그 종이들 어딘가에 숨어 있을 단어.
소피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땅, 원래 주인이… 누구였습니까?”
최태국은 밥을 씹으며 고개도 들지 않았다.
“몰라도 된다.”
짧은 말이었다. 짧은 말은 길게 남았다. 기백은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가의 기름기, 씹는 턱, 눈동자. 저 사람이 감추고 있다. 아이의 직감은 늘 빠르다. 그 직감으로 아이들은 살아남는다.
그날 밤, 기백은 보자기 안의 종이들을 다시 꺼내보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묵은 냄새, 군데군데 붉은 도장 자국. 시간이 멈춘 듯한 것들이 보자기를 푸는 순간 기백의 손끝에서 온전히 되살아났다. 기백은 숨을 고르며, 한 글자씩 다시 읽었다. 글자들은 아이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친 것은 사람뿐이었다.
“기백아.
엄마가 너한테 이거 남긴다.
이거는 니 거다.
山二十四番地라 쓰인 땅이 있다. 그기 너 거다.
아부지가 빼앗을라 카면, 절대로 보여주지 마라.
나중에 니 크면 정 할매한테 가 봐라.
엄마는 너 사랑한다.
1975년 9월 23일.”
글씨가 끝나는 데서도 어머니 냄새가 났다. 종이는 차가웠으나, 그 차가움 속에는 어머니 손바닥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기백의 손이 떨렸다. 산 24번지. 아까 밥상에서 아버지가 말한 그 땅. 그 땅은 어머니의 것이었고—지금은 기백의 것이어야 했다.
기백은 이를 악물었다. 아이의 이는 아직 작았지만, 악물면 단단했다. 그 단단함은 사랑이 아니라, 잃지 않으려는 본능이었다. 본능은 가르치지 않아도 자란다. 특히 빼앗긴 아이들한테서는.
1980년 봄, 정 할매 국밥집
정 할매 국밥집은 시장 끝자락, 해원천으로 난 길목에 붙어 있었다. 국밥집은 늘 뜨거웠다. 뜨거움이 가난을 잠시 잊게 했다. 쌀뜨물 같은 김이 천장에 들러붙어 검게 묻었고, 고춧가루가 공기 속에 떠다녔다. 사람들은 그 뜨거움 속에서 속을 풀고 혀를 풀었다. 혀가 풀리면 세상 일이 풀리는 줄 알았다.
정 할매는 국을 퍼 올리며 손님들 말을 들었다. 듣는 척도 아니고, 듣지 않는 척도 아니었다. 국자를 들었다 내릴 때마다 말들이 국물에 섞여드는 것만 같았다. 소문은 국물처럼 끓을수록 진해지고, 진해질수록 사람 속을 덥혔다가, 나중에는 속을 데었다.
“할매, 들었제? 산 24번지 말이다.”
떡장수 김씨가 또 시작이었다. 남의 소문을 자기 밥처럼 퍼먹는 사람.
정 할매는 국을 툭툭 떠 그릇에 담았다.
“들었다. 들었다. 니는 들은 거만 묵고 사나.”
“아이고, 할매. 소문도 묵고 살아야지예. 최 사장님이 그 땅 다 사모은다카더라.”
옆에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던 농부가 코웃음을 쳤다.
“다 사모으긴 뭘 사모아. 땅은 손바닥만큼만 있어도 된다. 밥만 나오면 된다.”
정 할매가 그 농부를 흘겨보았다.
“밥만 나오면 된다카는 놈치고, 밥 뺏기모 제일 먼저 운다.”
농부가 입을 다물었다. 정 할매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문틈으로 바깥을 보았다. 시장 바깥쪽에 태국금융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간판이 시장의 목을 죄는 것처럼 보였다. 간판 하나가 사람들 숨구멍을 얼마나 좁게 만드는지, 정 할매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소피아가 들어왔다.
소피아는 늘 조심스럽게 걸었다. 발이 땅을 밟는지 물 위를 걷는지 모를 만큼. 그러나 조심스러운 사람의 등 뒤에는 늘 무언가가 따라다녔다. 두려움, 의심, 또는 기록해야 한다는 습관—그런 것들. 습관은 가난한 자의 무기이기도 하고, 가난한 자의 올가미이기도 했다.
소피아는 아기 서하를 업고 있었다. 서하는 업힌 채도 조용했다. 울지도 웃지도 않고 눈만 크게 떴다. 그 눈빛은 갓난아이의 것이 아니라 오래 산 사람의 것이었다. 오래 산 눈은 세상을 일찍 알아본다. 그래서 더 슬프다.
정 할매가 입을 삐죽했다.
“왔나.”
“네, 어머니.”
소피아는 정 할매를 ‘어머니’라 불렀다. 친어머니가 아니라, 해원에서 살아남는 법을 아는 어머니.
정 할매는 국 한 그릇을 내밀며 낮게 말했다.
“니 요새 태국이 서류 만지는 거 보나?”
소피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은 대답하면서도 도망갈 길을 찾고 있었다.
“그 사람은 늘 서류를 만지죠.”
“늘 만지던 거 말고. 요새는 더 만지더라. 도장 찍는 소리, 밤에도 난다카이.”
소피아는 서하의 등을 토닥였다. 아기 등을 토닥이는 게 아니라, 자기 심장을 토닥이는 손놀림이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물었다.
“윤 씨… 살아 있나요?”
정 할매는 국자를 내려놓았다. 국자 끝에서 국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사람들 말소리가 잠깐 멎었다가 다시 붙었다. 세상은 늘 그렇다. 중요한 말이 오갈 때, 주변은 잠깐 조용해졌다가,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떠들기 시작한다.
“살았든 죽었든, 태국이 입에서는 죽었다 카더라. 죽었다 해야 도장이 쉬이 찍히제.”
소피아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그 차가움을 감추려 더 낮게 말했다.
“윤 씨의 도장은….”
정 할매가 입술을 쫙 폈다.
“그거를 니가 왜 묻노.”
소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순간, 자기 발목에도 그 도장 밧줄이 묶일 것 같았다.
정 할매는 한참 뒤에야, 국물처럼 느리게 덧붙였다.
“세상에는 죽은 사람도 살려 놓고 써먹는 놈이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도 죽여서 서류에 눕히는 놈도 있다.”
소피아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말은 종이보다 약했다. 종이는 사람 대신 살아남아, 사람을 눌렀다.
1982년 여름, 빼앗긴 땅
1982년 6월. 기백은 열두 살이 되었다. 글을 배웠고, 이제 서류도 더듬더듬 읽을 수 있었다. 보자기 속 종이들에서 어머니 이름을 찾아낼 수 있게 된 것도 그때였다.
서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所有者: 尹○○
地番: 山二十四番地
地目: 林野
面積: 5,000坪
登記日: 1971년 3월 15일
기백은 그 종이를 몇 번이고 읽었다. 이름은 사람의 것이었으나, 서류 속에서는 물건의 이름이었다. 이게 내 땅이다. 아이의 마음속에서 그 말이 돌처럼 굳었다. 돌은 한 번 굳으면 잘 부서지지 않는다. 다만, 돌도 물에 오래 닳는다. 기백은 자신이 닳아가는 줄 모르고, 굳어갔다.
그해 여름, 최태국은 마침내 산 24번지를 손에 넣었다. ‘행방불명’이어서가 아니었다. 행방불명 같은 말은 핑계였다. 진짜 이유는, 그가 먼저 줄을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세금 고지서, 근저당, 압류. 종이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달아나며 한 사람을 끌어내렸다. 끌어내린 자리에 최태국이 앉았다. 앉는다는 건, 누군가가 서 있던 자리를 빼앗는 일이다.
그날 밤 해원장 안채의 불은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바깥에는 여름 소나기가 퍼부었다. 빗소리가 마당을 두드리고, 해원천 물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물소리가 커질수록 집 안은 더 조용해졌다. 조용한 집은 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숨기는 자는 조용하고, 숨겨진 자는 더 조용해진다.
최태국은 서재—라기보다 서류방—에 앉아 있었다. 책은 없고 서류만 있었다. 서류는 사람보다 믿을 만한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는 등기부등본 한 장을 펼쳤다.
소유자: 윤○○(연락두절/행방불명)
1982년 6월 15일 경매(공매) 낙찰
낙찰자: 최태국
행방불명. 그 글자는 사람을 한 번 더 죽이는 말이었다. 죽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살아 있다고 인정하지도 않겠다는—그런 말. 살아 있는 자의 숨을 서류로 막는 말. 최태국은 붓끝에 먹을 찍어 장부에 적었다.
“산 24번지. 오천 평. 낙찰가….”
그는 숫자를 적으며 웃지도 않았다. 웃지 않는 얼굴이 더 탐욕스러웠다. 종이를 접어 서류 더미 사이에 꽂았다. 종이가 사라지자 윤○○라는 이름도 함께 사라지는 듯했다. 서류 속에서 사람 이름이 지워지는 일은, 시장에서 한 사람의 숨이 꺼지는 것만큼이나 흔했다. 흔하다는 건, 죄가 가벼워진다는 뜻이 아니다. 흔하다는 건, 죄가 제법 살기 좋아졌다는 뜻이다.
그날 밤, 기백은 최태국이 서류방을 나간 뒤 몰래 들어갔다. 손끝이 먼저 움직였다. 서류 더미 사이에서 등기부등본을 찾아냈다.
기백은 종이를 보는 순간 온몸이 떨렸다. 어머니 이름 옆에 행방불명. 그리고 낙찰자: 최태국.
엄마 땅을 아부지가 가져갔다.
기백은 종이를 찢고 싶었다. 그러나 찢으면 남는 건 분노뿐이었다. 분노는 증거가 아니다. 기백은 공책을 꺼내 베껴 적었다. 날짜, 소유자, 낙찰자, 경매—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글씨가 삐뚤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남기는 일이었다. 남겨야, 언젠가 꺼낼 수 있으니까.
그는 베껴 쓴 공책을 보자기 속에 넣었다. 보자기는 어머니가 남긴 품이었다. 품이라는 건, 한 번 안아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래도록 숨을 넣어주는 자리다. 기백은 그 품 속에서, 울지 않는 법을 배웠다. 울면 들킨다는 것도, 들키면 더 빼앗긴다는 것도, 그 애는 너무 일찍 알았다.
그날 밤 기백은 편지를 다시 읽었다.
“이거는 니 거다.”
그러나 등기에는 아버지 이름이 박혀 있었다. 기백은 마룻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소리 없이, 눈물 없이. 울면—그 울음이—아버지 귀에라도 닿을까 봐. 울음은 약한 자의 신호탄이 된다. 약한 자는 신호를 보내면 안 된다. 그 집에서는 특히 그랬다.
아직은… 아무것도 못 한다.
하지만 아이는 다짐했다.
언젠가는 찾는다. 반드시.
그 다짐은 땅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남은 사람을 지키려는 다짐이었다. 땅은 빼앗길 수 있어도, 사람이 다 빼앗기면 끝이었다.
밖에서는 비가 더 퍼부었고, 해원천 물소리는 더 또렷해졌다. 물은 늘 흘러가면서도,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남기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기백은 창문 없는 어둠 속에서, 손바닥에 남은 종이의 결을 만지며 생각했다. 땅이 사람을 살린다고 믿었던 세상에서, 이제는 종이 한 장이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종이는, 누군가의 손에서 아직 완전히 타지 않은 불씨처럼—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불씨는 당장 불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씨가 있는 집은, 언젠가 반드시 타거나 밝아진다.
기백은 눈을 감고, 속으로만 말했다.
“엄마, 내가… 안 잊을 낍니더.”
그 말이 끝나자, 해원천이 한 번 더 울었다. 땅이 속으로 우는 소리 같았고, 세상이 바뀌기 전날의 소리 같았다. 그리고 여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