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독사와 검은 흙의 아들들
(1980~1985 / 해원 읍내·해원장·중학교 교정)
1980년대의 공기는, 나라 전체가 군홧발에 눌린 채 숨을 줄이는 공기였다. 사람들은 말끝을 낮추고, 눈을 먼저 내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억눌린 틈새를 타고 돈은 더 독하게 흘러다녔다. 말이 막히면 돈이 길을 낸다. 길이 나면 깃발이 꽂힌다. 해원의 흙 위에도 낯선 깃발들이 하나둘 박히기 시작했다.
도로가 뚫리고, 외지인들의 검은 세단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읍내를 들락거렸다. 군청 마당과 경찰서 계단엔 늘 구두가 반짝였고, 그 구두는 해원장 대청의 마루와 이상하게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최태국에게 그 혼란은 두 팔 벌려 환영할 파도였다. 파도는 흔들어 부수지만, 동시에 떠밀어 올린다. 최태국은 떠밀림 쪽을 택했다. 군청과 경찰서의 요직들을 제 안방 드나들듯 오가며, 해원의 땅을 게걸스럽게 삼켰다. 해원장의 담장은 이삼 년이 멀다 하고 한 뼘씩 더 높아졌다. 담장이 높아진다는 것은, 집이 커진다는 말이 아니라 안쪽이 더 안쪽으로 숨어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담장이 높아질수록, 그 안의 공기는 더 무겁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비의 독기와 어미들의 한(恨), 그리고 버려진 자식의 그림자가 엉켜붙은 검은흙 위에서, 최태국의 세 아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며 자라나고 있었다.
흙은 늘 한곳에 있는데, 사람은 흩어진다. 흩어지는 방식이 곧 '운명'이 된다.
기백은 그 운명을 제 몸으로 먼저 배웠다.
기백은 “참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아니, 참아본 적이 없다기보다 참으면 더 처참하게 짓밟힌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이 집에서 참는 건 미덕이 아니었다.
1984년 무렵, 기백은 읍내 장터에서 ‘해원장 미친개’로 불렸다. 교복 단추를 풀어헤치고 패거리들 앞에 서서 눈만 한번 흉흉하게 흘겨도 상대는 뒷걸음질을 쳤다. 기백의 주먹이 빠른 게 아니었다. 더 무서운 건 주먹이 나가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버린 눈빛이었다.
싸움은 대개 말에서 시작됐다. "느그 엄마 윤 씨는 돈에 팔려 와가꼬…"라며 씹어 돌리는 장터의 가벼운 혀. 그날도 술김에 튀어나온 누군가의 말 한 조각에 기백의 귀가 먼저 반응했다. 기백은 자비 없이 손을 썼다. 우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말이 나오는 입을 밟아야 말이 멎는다고 믿는 방식이었다.
결국 파출소를 다녀온 기백이 사랑채 마루에 무릎을 꿇었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최태국은 소파에 기대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 얼굴엔 자식에 대한 걱정도, 타인을 다치게 한 것에 대한 분노도 없었다. 오직 '내 소유물이 흠집을 냈다'는 불쾌감뿐이었다.
“야, 이 등신 같은 새끼야. 사내자식이 주먹을 쓸라카면 상대 뼛골을 아예 빼놔야제. 어설프게 패놓고 파출소나 들락거리나?”
최태국이 굵은 가죽 허리띠를 풀어 기백의 등을 내리쳤다. 짜악—! 살가죽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열네 살 기백은 비명을 삼켰다. 대신 피 맛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짓씹었다.
'사내자식? 사내자식이면 사람을 돈 주고 사 와가꼬 제 욕심 채우는 도구로 쓰나. 마음 한자락 안 주고 무관심으로 숨통을 조여놓고, 지 에미가 제 발로 도망가도록 빈껍데기를 만들어 놓은 주제에 사내? 내는 아부지 피가 한 방울도 안 남을 때까지 다 뽑아버릴 낀데.'
가족을 향한 무관심, 그것이야말로 뼈를 부러뜨리는 몽둥이보다 더 날카로운 최태국의 진짜 칼이었다.
“때리소! 뼈가 부서지도록 때려 보라카이!” 기백이 핏발 선 눈으로 아비를 치켜뜨며 악을 썼다. “내 뼈는 우리 엄마, 윤 씨 집안 뼈라예! 아부지가 백날 때려도 그 더러운 피는 내 안 받습니더!”
아비를 증오하면서도, 기백은 짐승처럼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아비의 문법을 가장 지독하게 닮아가고 있었다.
형의 등이 찢어지는 소리가 방문을 때릴 때도, 일곱 살 이현은 방바닥에 엎드려 백과사전을 넘기고 있었다. 어른들이 “저놈은 커서 판검사 되겠다”라고 추켜세울 때마다, 이현은 그 말속에 숨은 비릿한 셈법을 읽어냈다.
이현은 일찍이 깨우쳤다. 형처럼 분노를 날것으로 드러내며 부딪히는 것은 하수(下手) 중의 하수다. 진짜 힘은 주먹에서 나오지 않는다. 규칙을 만들고 판 자체를 엎어버리는 자에게서 나온다.
'저 최태국이라는 인간의 주먹이나 호통이 무서운 게 아니다. 저 인간이 깔고 앉은, 돈과 힘이 쏠리는 이 집구석의 폭력적인 구조가 무서운 거다. 그라모, 내가 그 구조의 꼭대기에 서서 저 인간을 내 발밑에 두면 끝날 일이다.'
방문 너머로 기백을 내리치는 가죽띠 소리와 짐승 같은 고함이 해원장의 공기를 찢어발기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엎드려 있던 이현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제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피가 튀는 대청을 향해 또렷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끄러워!”
그 한마디는 쩌렁쩌렁하게 울려 해원장 전체의 공기를 일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주먹을 내세우며 악을 쓰던 기백도, 채찍을 치켜들었던 최태국도, 숨죽이며 부엌에 웅크리던 막돌이 어멈도 그 순간 멈칫했다. 그것은 일곱 살 아이의 투정이 아니었다. 폭력과 재력보다 더 서늘하고 압도적인 차가운 지성(知性)이, 이 집안의 새로운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리는 섬뜩한 선언이었다.
이현은 굳게 닫힌 문 뒤에서 울지 않았다. 그는 제 영혼을 얼려 높고 매끈한 냉소의 성벽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형들이 분노와 냉소로 무장할 때, 막내 서하는 두 형과 달랐다. 죽은 참새만 보아도 한참을 눈물짓는 아이였다. 서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머리로 계산하기 전에 온몸으로 먼저 들이마셨다.
1984년 무렵, 소피아의 몸과 마음 역시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녀는 장독대 밑이나 이불장 깊은 곳에 집안의 더러운 비밀들을 낱낱이 기록해 두었지만, 입 밖으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열이 불덩이 같은 밤, 소피아는 다섯 살 서하의 작은 손에 은빛 십자가를 쥐여주었다.
“서하야… 억울한 눈물이 흙에 고이면, 세상은 반드시 그 무서운 댓가를 요구한단다. 이 집 흙에는 누군가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아.”
“댓가… 그기 뭔데예?”
소피아는 아이의 젖은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 악연의 고리를 끊어내는 건, 무서운 주먹도 똑똑한 머리도 아니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나를 내어주는 사랑과 희생… 그 지독한 댓가만이 칼춤을 멈출 수 있어.”
서하의 큰 눈망울이 흔들렸다. “니가 크면… 이 집 사람들을 너무 미워만 하지는 마라. 누군가는 기꺼이 미움을 받고 십자가를 져야 한단다.”
그것은 성경의 구절이 아니라, 피를 토하는 어미의 생존술이었다. 서하의 맑은 눈동자 깊은 곳에 ‘사랑과 희생’이라는 무거운 씨앗이 떨어졌다. 서하는 캄캄한 흙 속에서 버티는 법을 어미의 떨리는 손끝에서 배우고 있었다.
1985년 봄, 소피아는 끝내 "말할 자리"를 빼앗겼다. 정신병자라는 낙인은 집안의 더러운 비밀을 함구시키기에 가장 완벽하고 손쉬운 구실이었다.
“집구석에 미친년이 있으니 재수가 옴 붙제. 어디 요양원에라도 처박아라!”
최태국의 선고가 떨어지던 날, 마당에는 세 형제가 나란히 섰다. 기백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시선을 먼 산으로 돌렸다. 이현은 차가운 안경 너머로 굴러가는 차바퀴만 계산적으로 응시했다. 어린 서하만이 막돌이 어멈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죽여 오열했다.
소피아는 차 문이 닫히기 전, 속으로만 절규했다. '사랑은 댓가를 치르는 거다. 엄마는 지금 그 댓가를 치르러 간다. 너희는… 제발 사람으로 살아남아라.'
차가 대문을 막 나서려 할 때였다. 대청마루 끝, 안방 문턱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선 낯선 그림자 하나가 소피아의 흐린 시야에 꽂혔다. 짙은 화장에 셈이 빠른 눈빛. 시장바닥에서 굴러먹다 최태국 사무실의 장부를 꿰차고 들어온 여비서, 이영숙이었다. 이영숙은 팔짱을 낀 채, 실성한 여자로 내몰려 쫓겨나는 소피아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비죽이 올려 웃고 있었다. 안방을 내어준 것은 소피아의 병 때문만이 아니었다. 해원장의 흙냄새를 덮어버릴 만큼 지독한 영숙의 분 향기가 이미 최태국의 안방을 은밀하게 장악한 뒤였다.
그리고 그 모든 더러운 교체를, 뒤채 감나무 밑의 짙은 그늘 속에서 열두 살 강수만이 박제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다 쫓겨난다. 저 시장통 여우가 새어미를 밀어냈네. 그라모 이 집에 남는 건 진짜 독사들뿐이라. 기다릴 기다. 지들끼리 물어뜯고 자멸할 때까지.'
소피아의 퇴장으로 어른이 부재해진 텅 빈 집에서, 서로 다른 맹독과 상처를 품은 세 형제는 통제 불능의 궤도를 돌기 시작했다. 기백은 주먹으로, 이현은 논리로, 서하는 사랑의 대가로 각자의 성을 쌓았다. 그리고 수만은—그들 사이에서 조용히 틈을 재고 있었다.
바야흐로 해원장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