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제3편: 균열 (1986~1997)

by 진동길

제3편: 균열 (1986~1997)


서(序) — 무너지는 땅, 자라나는 그림자


균열은 단번에 오지 않는다.


거대한 바위가 두 동강 나는 것은 벼락을 맞아서가 아니다. 아주 미세하고 보이지 않는 돌의 틈새로 원한 맺힌 빗물이 스며들고, 그것이 한겨울의 냉혹한 바람에 얼어붙어 팽창할 때, 천 년을 버티던 반석도 기어이 비명을 지르며 쪼개지고 마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는 해원의 들녘이 꼭 그랬다.


대대로 씨를 뿌리고 거두며 뭇 생명을 먹여 살리던 검고 비옥한 흙은, 이제 정직한 어미가 아니었다. 흙은 투기꾼들의 구둣발에 파헤쳐지며 '개발'과 '신도시'라는 붉은 깃발을 잉태하는 음탕한 투전판으로 변해갔다. 산자락이 무너져 내리고 굽이치던 해원천 물길 곁으로 직선의 아스팔트가 깔리는 동안, 사람들은 미친 듯이 치솟는 땅값에 취해 제 이웃의 목에 서슴없이 칼을 겨누었다. 풍요의 가면을 쓴 탐욕이 흙의 근본부터 집어삼키고 있었다.


해원 읍내 가장 높은 곳에 똬리를 튼 성채, 해원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담장은 철옹성처럼 드높아졌고 최태국의 금고는 피를 빨아먹은 거머리마냥 터질 듯 부풀어 올랐으나, 정작 그 붉은 벽돌집을 떠받치는 기둥의 밑동은 형편없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이영숙이라는 새로운 독사가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 집안의 공기를 비릿하게 뒤집어놓는 사이, 각기 다른 상처를 품은 세 아들—짐승이 된 기백, 얼음이 된 이현, 십자가를 진 서하—은 한 지붕 아래서 서로 다른 지옥을 향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숨을 쉬기 위해 집 밖으로 겉돌았다.


핏물 마를 날 없는 주먹을 식히기 위해, 차가운 논리로 무장한 머리를 누이기 위해, 그리고 집안의 썩은 내를 피해 가쁜 숨을 고르기 위해, 세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읍내 장터의 '정 할머니 국밥집'으로 기어들었다. 그곳은 해원 사람들의 눈물과 한탄이 펄펄 끓는 솥단지였으며, 최 씨 집안의 아들들이 유일하게 사람의 온기가 밴 '밥'을 넘길 수 있는 마지막 성소(聖所)였다.


그러나 끓는 국밥의 온기조차 가닿지 않는 해원장의 가장 캄캄한 밑바닥에서, 소리 없이 몸집을 키우는 그림자가 있었다.


강수만. 아무도 제 성씨를 온전히 불러주지 않는 버려진 서자.


해원장 안의 모든 허드렛일은 수만의 굽은 등 위로 쏟아졌다. 집 안에서는 소리 없는 하인이었으나, 대문을 나서면 그는 최태국의 그림자라는 또 다른 허울을 뒤집어썼다. 누군가의 고혈을 짜내는 더러운 수금원이자, 피 묻은 장부와 서류를 나르는 심부름꾼. 그러나 수만은 그 멸시 속에서도 결코 제 속내를 까뒤집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폭력이 핏대 선 주먹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님을 일찍이 깨쳤다. 진짜 숨통을 끊는 폭력은 잉크로 적힌 ‘기한’과 ‘서명’, 그리고 대문짝에 붙는 서늘한 ‘빨간딱지’의 형상으로 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했다. 수만에게는 글을 배울 학교가 따로 필요 없었다. 탐욕이 들끓는 해원장 자체가 잔혹한 배움터였고, 사람을 도구로 쓰는 아비 최태국이 완벽한 스승이었다.


잊을 만하면 덮쳐오는 간질 발작이 짐승처럼 그의 사지를 흉측하게 꺾어놓을 때마다, 아비라는 작자는 염려 한마디 없이 벌레를 보듯 혀를 찼다. 마당 흙바닥에 나뒹굴며 거품 문 입술을 짓씹을 때, 수만은 치욕을 삼키는 대신 얼음 같은 맹세를 갈았다. 이 몸뚱이가 이토록 무참히 꺾이는 것은 몹쓸 병 때문이 아니다. 훗날 저 오만한 최태국과 해원장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기 위해, 하늘이 내게 씌워준 완벽한 위장술일 뿐이다.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수만의 텅 빈 눈동자, 그 시꺼먼 심연 속에는 눅진한 증오가 검은 연기처럼 겹겹이 다져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의 맵찬 겨울이 닥쳐왔다.




환상처럼 부풀었던 거품이 터지고, 온 나라가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해일 앞에 피눈물을 쏟으며 쓰러지던 해.


평생 쇳가루를 마시며 쇠를 깎던 김춘식의 철공소에 서늘한 압류 딱지가 붙고, 해원 사람들이 길바닥에 나앉아 곡성을 토하던 짐승의 시간. 최태국은 파멸의 벼랑 끝에 선 이웃들의 등짝을 짓밟으며 굶주린 승냥이처럼 웃었다.


"나라가 망하는 기 아이다. 낭리지기는 내한테 가장 큰 기회라카이!"


타인의 피눈물을 거름 삼아 최후의 만찬을 벌이려는 아비.

그리고 그 아비의 목통을 노리며 서서히 독니를 드러내는 아들들.

땅이 꺼지고 사람의 도리가 산산조각 난 폐허의 밑바닥에서,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씨앗이 기어이 시퍼런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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