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15장. 흙이 돈이 되는 연금술 (1992~1996)

by 진동길

15장. 흙이 돈이 되는 연금술 (1992~1996)


1992년, 해원 읍내의 공기는 사계절을 잃어버린 것처럼 늘 같은 빛깔이었다. 매캐한 시멘트 가루와 붉은 흙먼지가 서로의 목을 조르며 떠다녔다. 봄비가 내려도 흙냄새가 먼저 올라오지 않았다. 젖은 아스팔트의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물웅덩이 위로는 기름막이 얇게 퍼져 무지개를 흉내 냈다. 가을이 와도 들녘이 황금빛으로 번져 사람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법이 없었다. 벼 이삭 대신 앙상한 철근들이 허연 뼈대를 드러낸 채 솟아올라 하늘을 뚫어버릴 듯 서 있었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고 비를 점치지 않았다. 이제는 군청 벽보를 올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국도 확장 공사.’
‘상업지구 용도 변경.’
‘택지 개발 예정지.’


낯선 활자들이 구세주처럼, 그러나 구세주답지 않게 차갑고 번들거리는 얼굴로 붙어 있었다.


땀 흘려 씨를 뿌리고 거두는 정직한 노동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평생 소똥을 치우며 허리가 굽은 노인의 통장에 하루아침에 수억 원의 보상금이 꽂히는 일이 기적처럼 벌어졌다. 아니, 기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돈은 땀으로 난 것이 아니라 선(線)으로 난 것이었다. 지도 위에 누군가가 그은 붉은 선 하나가 사람의 일생을 바꾸었다.


장터 다방은 아침부터 북적였다. 다방 커피에 계란 노른자를 띄워 마시며 가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벼락부자들이 있었고, 서울서 내려온 투기꾼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의 사투리를 흉내 내며 웃었지만, 웃음에는 바람기만 있었고 뿌리는 없었다. 해원(海原)이라는 이름 그대로 넉넉하고 푸르렀던 바다와 들판은 욕망이라는 거대한 포크레인 삽날 아래 무참히 파뒤집히고 있었다. 흙은 이제 흙이 아니었다. 숫자였다. 짐승처럼 큰 숫자, 사람을 삼키는 숫자.




그 미쳐 돌아가는 거품의 꼭대기에 최태국이 앉아 있었다.


‘태국금융’은 더 이상 시장 상인들에게 십만 원, 이십만 원을 꿔주고 일수를 찍어대는 좀스러운 고리대금업에 머물지 않았다. 최태국의 후각은 짐승 같았다. 피 냄새보다 돈 냄새를 먼저 맡았다. 그는 돈이 흐르는 길이 아니라 돈이 앞으로 흐를 ‘자리’를 맡아버렸다. 도시계획과장의 입술이 어디서 마르고, 지역 유지의 손바닥이 어디서 가려운지—그걸 태국은 귀신처럼 알았다.


태국금융 사무실에는 낯선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양복의 결이 곱고 손톱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민원’이라는 말 대신 ‘사업’이라 했고, ‘논’이라 하지 않고 ‘필지’라 했다. 말부터가 이미 땅을 뺏어 먹은 말이었다.


태국은 그들을 앉혀놓고 비싼 양주를 따랐다. 잔이 비워질 때쯤이면 봉투가 조용히 움직였다. 종이 봉투는 한 번쯤 책상 위에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누군가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그 사라짐이 계획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태국은 군청에서 빼돌린 지적도 위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지적도는 종이였지만 태국의 눈에는 살덩이처럼 보였다. 그는 붉은 인주가 묻은 도장을 쾅쾅 찍어대며 웃었다. 웃음은 크고 거칠었으나 그 속은 차가웠다.


“영숙아.”
최태국이 사투리를 세게 굴렸다.
“내사 마, 기가 차서 웃음만 나온다카이. 평생 남의 돈 떼어먹는 놈들 등짝이나 쳐서 이자 받아 묵었는데, 그건 푼돈 장사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붉은 선을 탁탁 두드렸다. 그 선은 마치 사람의 목에 감기는 실핏줄 같았다.


“니 이 붉은 선 보이나. 여가 내년에 뚫릴 4차선 도로다. 도로가 뚫리기 전에 길목에 있는 버려진 밭뙈기랑 야산들을 전부 우리 명의로 돌려놔라. 돈이 모자라면 은행장 놈 목구멍에 돈다발을 처넣어서라도 대출을 끌어와. 이제부터는 흙을 쥐고 흔드는 놈이 왕인 기다.”


옆에서 이영숙이 지폐 계수기에 돈다발을 밀어 넣으며 웃었다. 웃음은 요염하게 흘렀으나 눈빛은 계산기처럼 건조했다. 방 안에 사람들—군청 사람, 지역 유지—이 앉아 있는 동안엔 그녀의 목소리도 웃음도 늘 ‘공식’이었다. 그녀는 최태국을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입술은 달콤했지만 호칭은 딱딱했다.


“영감님도 참. 제 영숙이 아입니꺼. 벌써 서울서 온 브로커구멍 다 뚫어놨지예.”
그녀는 일부러 ‘영감님’을 또렷이 굴렸다. 남들 귀에 들리는 자리에서, 여자는 늘 남자에게 ‘주인’의 이름표를 달아 주는 법이었다.


“근데 도로 날 자리에 있는 김 영감네 땅이랑 박 씨네 과수원은 어쩔 낍니꺼? 그 양반들 대대로 내려온 땅이라 카면서 절대 안 판다 카던데예.”


최태국은 잔을 내려놓고 지적도 위 붉은 선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뱀 같은 눈빛이 번뜩이며 사무실의 온도를 한순간에 낮췄다.


“안 파는 게 어딨노.”
태국은 느리게 말했다. 느린 말은 사람을 더 겁주었다.
“그 새끼들 작년에 농기계 산다고 우리한테 돈 빌려 갔다 아이가. 벌써 이자가 원금을 훌쩍 넘겼을 낀데. 수만이 불러라. 장부 들고 가서 당장 숨통 조여야제.”




사람들이 물러나고 사무실 문이 닫히자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양주 냄새는 그대로인데 호칭이 달라질 순간이 왔다. 이영숙은 계수기 옆에 손을 얹고 태국 옆으로 조금 다가앉았다. 목소리를 반 톤 낮추며 방금 전까지 쓰던 ‘영감님’을 벗겨냈다.


“여보.”
그 한마디는 아내의 말투처럼 들리기보다는 아내가 되고 싶은 여자의 말투였다. 혀끝이 달라붙는 방식까지 계산된 듯했다.


최태국은 대꾸 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잠깐 튀는 사이, 그의 눈은 영숙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그 눈길엔 인정도 애정도 없었다. 다만 ‘쓸모’가 있었다.


이영숙은 웃으며도 한 번 더 슬쩍 줄을 떠보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가계부 얘기하듯.


“당신, 이번에 도로 길목 땅 다 잡으면… 우리도 이제는 집안 갖춰야 안 되겠습니꺼. 서류도 좀… 깔끔하게.”

그 말 속 ‘서류’가 무엇을 뜻하는지 태국은 모를 리 없었다. 영숙의 욕망은 늘 그 문장 끝에 있었다. 그녀는 태국 곁에서 돈을 세면서도 동시에 태국의 ‘이름’까지 세고 있었다. 끝내는 그 이름 위에 자기 이름을 얹고 싶어 했다.


최태국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연기가 사무실 공기를 한 바퀴 돌고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침묵 자체가 대답이었다. 그는 지적도를 다시 펼치며 영숙의 말을 종이처럼 접어버리듯 잘랐다.


“영숙아.”
그는 다시 ‘공식’의 호칭으로 돌아갔다. 사적인 순간에도 태국은 끝내 선을 지웠다. 선을 그은 사람답게, 선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내 돈은 내 이름으로 끝난다. 피 한 방울 섞인 적 없는 사람한테 도장 찍어 줄 만큼 내가 물러터졌나.”


이영숙의 웃음이 아주 잠깐 굳었다가 다시 풀렸다. 그녀는 그 굳는 시간을 들키지 않았다. 들키면 지는 싸움이었다. 대신 더 부드럽게 웃었다. 더 다정하게, 더 ‘여보’ 같은 얼굴로.


“아이고, 당신도 참. 제가 뭐 달라는 기 있나예. 그냥… 사람들 눈도 있고, 모양새도 있고….”


“모양새?” 태국이 코웃음을 쳤다.

“모양새는 돈이 만들지, 종이가 만드는 게 아니다.”


그는 지적도 위 붉은 선을 다시 두드렸다. 그 손끝이 마치 영숙의 욕망까지 눌러버리는 것 같았다.


“니는 니 할 일 해라. 돈 새고, 구멍 뚫고, 사람들 입 막고. 그거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국은 아주 낮게 덧붙였다. 말이 낮을수록 더 확실했다.


“내 재산은—눈에 흙 들어가도—남한테 안 넘어간다.”


“예, 여보.”


이영숙은 특유의 만들어진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여보” 뒤에 숨은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건조했다. 계산기처럼.


그 계산기는 태국의 재산을 세는 동시에 태국의 약점도 세고 있었다. 언제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서류’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그것이 그녀의 목적이었다.


태국 한 사람의 이름 아래에서만 돈이 보이는 여자는 아니었다. 태국의 돈은 결국 핏줄로 흘러갈 터였다. 태국이 아무리 도장을 아끼고 문을 잠가도—죽음 앞에서 서류는 열린다. 그러니 문을 열 사람이 바뀌면 된다. 문지기가 아니라 다음 주인을.


이영숙은 담배 연기를 피하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발자국이 바닥을 찍었다. 집안의 피가 가진 버릇이었다. 거만과 오만한 고집이 엉겨붙은 팔자걸음.


첫걸음은 기백이었다. 문턱을 걷어차듯 들어오는 발자국. 아버지와는 말끝마다 날이 서는 놈. 웃음이 많으나 그 웃음이 늘 누군가를 베는 놈. 태국과 부딪칠수록 더 크게 부풀어 오르는, 불꽃같은 아들.


이영숙은 그 소리를 들으며 아주 잠깐 입꼬리를 올렸다. 태국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기 머릿속 선이 맞물릴 때 나오는, 얇은 미소였다.


‘저놈은 아비를 미워한다.’


미움은 때로 사랑보다 쉽게 붙잡힌다. 특히 돈이 섞이면 더 그렇다. 이영숙은 기백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눈, 벗어나기 위해 더 큰 돈을 꿈꾸는 눈. 그 눈은 함정에 들어오기 좋은 눈이었다. 미끼만 제대로 던지면 스스로 목줄을 목에 걸 놈.


그리고 이어지는 발걸음은 수만이었다.
강수만. 태국의 그림자. 장부를 들고 다니는 손. 바깥일을 실질적으로 굴리는 힘. 눈빛은 감정을 숨기고 몸은 늘 먼저 움직이는 사내. 서류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실은 이 집안의 돈줄과 목줄을 한꺼번에 쥐고 있는 놈.


그에게도 욕망이 있었다. 다만 욕망이 입으로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욕망은 눌러 두면 더 깊어지고, 누가 바늘만 꽂아도 피처럼 솟는다. 이영숙은 그 바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이미 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태국은 영숙의 눈빛 변화를 못 본 척했다. 아니, 보아도 상관없다는 듯 굳게 말했다.


“내 문은 안 열린다.”


말은 단단했고 태국의 자만은 더 단단했다. 그는 여전히 ‘문’만 생각했다. 종이 한 장으로도 사람을 꺾어놓고, 종이 한 장으로는 자기 목을 절대 내주지 않는 사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법적 자리만큼은 내어줄 기색이 없는 사내.


하지만 이영숙은 이미 다른 걸 보고 있었다. 문이 아니라 열쇠. 태국에게서 못 얻으면 태국의 집안에서 얻으면 된다. 피는 법을 만들고, 법은 돈을 옮긴다. 그녀는 그 흐름을 믿었다. 더 정확히는 그 흐름을 ‘만들’ 줄 안다고 믿었다.


이영숙은 인기척을 의식하며 아주 다정한 얼굴로 태국을 보며 속삭였다. 태국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예, 여보.”


그러나 그 “여보”라는 말은 이제 태국에게만 향한 말이 아니었다. 언젠가—기백에게도, 혹은 수만에게도—같은 말이 필요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가장 먼저 알고 있었다.


그 순간 기백의 비수 같은 비웃음이 사무실 공기를 한 번 가르고 지나갔고, 수만의 무거운 침묵이 그 자리에 앉았다. 봉투와 지도와 도장—그것들이 한데 섞여 사무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듯했다. 흙이 돈이 되는 연금술은 이렇게, 깊숙이 숨겨둔 각자의 욕망과 술기운, 종이와 도장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금술의 불을 지피는 손, 태국의 수족이 곧 움직였다.




강수만은 낡은 오토바이를 몰고 해원의 흙먼지 속을 유령처럼 쏘다녔다. 머플러 소리가 먼지를 가르고, 먼지가 다시 그를 삼켰다. 사람들은 오토바이 소리만 들어도 몸부터 움츠러들었다. 수만의 어깨에 메인 낡은 가죽 가방은 칼을 담은 것도 아닌데 칼보다 더 무서웠다. 그 안에는 차용증과 근저당 설정 서류가 빼곡했다. 종이들이 사람 목을 죄는 올가미였다.


그가 박 씨네 과수원에 도착했을 때 과수원은 이미 늦은 봄처럼 지쳐 있었다. 나무들은 가지를 뻗었지만 가지 끝에는 바람이 먼저 앉아 있었다. 바람이 많을수록 사람 마음도 흔들렸다.


박 씨가 뛰어나왔다. 얼굴이 누렇게 떴고 손이 떨렸다. 그는 수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 손이 마치 땅을 붙드는 손처럼 절박했다.


“수만아… 며칠만, 딱 며칠만 말미를 도! 내 다음 달에 보상금 나오면 이자까지 쳐서 싹 다 갚을라꼬 안 카나!”


박 씨도 알고 있었다. 조금만 버티면 땅값이 뛸 것이고 보상금이 들어올 것이고, 그때는 빚도 갚고 사람답게 숨도 쉬리라는 걸. 그러나 최태국은 보상금이 나오기 직전, 가장 목이 타들어 갈 때 빚의 올가미를 당기는 법을 알았다. 물이 차오를 때 발목을 잡아 끌면 사람은 소리도 못 내고 빠져든다.


수만은 감정 없는 눈으로 박 씨를 내려다보았다. 눈동자가 차가웠다. 그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무심히 내밀었다.


“아재예. 보상금은 아재가 받을 기 아입니더.”
말이 칼날처럼 튀어나갔다.


“여그 도장 찍으이소. 어르신이 빚 탕감해 주는 조건으로 과수원 명의 넘기라 카십니더. 오늘 안 찍으시면 낼 아침에 포크레인 끌고 와서 나무 다 뽑아버릴 낍니더. 타협은 없심더.”


박 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갗 밑에서 피가 뒤집히는 게 보였다.


“이, 이 도둑놈의 새끼들! 사람 피를 빨아 묵어도 유분수지! 그 돈 쪼매 빌려준 거 가지고 이 귀한 땅을 날름 삼킬라 카나!”


그가 악을 쓰며 달려들었지만 수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만의 얼굴은 무쇠처럼 단단했다. 욕설과 저주가 그 얼굴에 부딪혀도 튕겨 나갔다. 그 단단함은 태국이 만들어 준 것이기도 했고, 수만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굳힌 것이기도 했다.


박 씨의 손이 허공을 헤맸다. 뺨을 치려다 멈칫했고, 멱살을 잡으려다 주저앉았다. 사람은 끝내 자기 손으로 자기 인생을 찢을 수는 없었다. 대신 도장을 찍는다. 도장 찍는 손이 떨릴수록 삶이 찢어진다.


“찍어라.”
수만이 낮게 말했다.
“살려면.”


그 한마디가 박 씨의 숨통을 끊었다. 박 씨는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찍었다. 도장이 찍히는 순간 과수원은 소유를 잃었다기보다 시간을 잃었다. 대대로 이어온 시간이 종이 한 장에 눌려 죽었다.


수만이 서류를 챙기고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을 때 박 씨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짐승처럼 통곡했다. 울음은 흙에 스며들었다. 흙은 늘 많은 울음을 먹어 왔다. 그러나 이번 울음은 달랐다. 흙이 사람을 먹는 울음이었다.

수만은 백미러 너머로 박 씨의 울음이 작아지는 걸 보며 붉게 파뒤집히는 산등성이를 응시했다. 그의 입술이 아주 잠깐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래, 울어라. 피눈물을 흘려라.’
수만의 속에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목소리는 그의 것이면서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태국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오래된 원망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너희가 욕심에 눈이 멀어 미끼를 물던 순간부터… 이 땅은 이미 너희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수만의 관자놀이가 찌릿하게 갈라졌다. 시야 가장자리가 하얗게 일그러졌다. 귀가 멀어지는 듯했고 땅이 멀어지는 듯했다.


‘또… 온다.’

수만은 핸들을 꽉 잡았다. 손아귀가 땀으로 미끄러웠다. 오토바이가 휘청이며 도로 가장자리로 쏠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쓰러지면 안 됐다. 쓰러지면 ‘약한 놈’이 된다. 약한 놈은 밟힌다. 태국이 가르친 세계는 그랬다.


수만은 가까스로 속도를 줄여 길옆 공터에 멈춰 섰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붉은 흙냄새가 폐 안으로 들어왔다. 피비린내와 섞였다. 수만은 그 냄새를 싫어하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해했다. 이 냄새 속에서 자랐고, 이 냄새 속에서 살았다.


그는 품속의 땅문서를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웃었다.


‘어르신, 실컷 땅을 삼키고 배를 불리소. 해원 바닥 절반을 어르신 이름으로 도배해 보이소. 몸집이 커질수록… 나중에 갈라낼 배때지도 커질 끼라.’


웃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수만은 웃지 않았다. 웃음은 아직 이르다. 웃음은 터지는 순간을 위해 남겨둬야 했다.




1996년, 해원 읍내는 광란의 잔치판 같았다. 밤마다 네온사인이 번쩍였고, 룸살롱과 단란주점 앞에는 검은색 그랜저들이 즐비했다. 어제의 거지가 오늘의 졸부가 되어 양주를 병나발로 불었다. “일해서 번 돈”은 촌스러운 말이 되었다. “어느 땅 샀다”가 사람의 품격을 말해 주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빚을 내어 땅을 사고 그 땅을 담보로 다시 빚을 내어 상가를 올렸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말이 신앙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그 신앙은 발밑에 흙 대신 유리판을 깔아놓은 신앙이었다. 반짝였지만 미끄러웠다.


최태국은 해원에서 감히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조차 없는 제왕이 되어 있었다. 해원 읍내의 노른자위 땅치고 최태국의 명의이거나 태국금융의 근저당이 설정되지 않은 곳이 드물었다. 태국은 지역구 국회의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호탕하게 웃었고, 이영숙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빛내며 사교계의 안방마님 행세를 했다. 사람들은 그 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빛이 진실을 대신해 주는 시대였다.


모든 것이 완벽한 듯 보였다. 해원의 흙은 최태국의 발밑에서 황금으로 변하고 있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은 가마솥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수만은 알고 있었다.


태국의 부동산 제국이 사실은 텅 빈 모래성이라는 것을. 태국은 땅을 사들이기 위해 은행에서 수십억 원의 돈을 무리하게 끌어다 썼고, 그 땅을 담보로 또 빚을 내어 건물을 올렸다. 빚이 빚을 받치고 빚이 다시 빚을 받쳤다. 그리고 이영숙은 장부를 두 개, 세 개로 쪼개어 비자금을 차명 계좌로 빼돌리고 있었다. 돈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구멍이 많아지는 일이었다. 구멍이 많으면 언젠가 물이 빠진다.




거품이었다. 무지개 빛깔로 영롱하게 부풀어 오른, 찌르면 단숨에 터져버릴 거품.


그해 겨울의 어느 늦은 밤, 해원장 뒤채의 어두운 방 안. 희미한 백열등 아래 수만이 웅크리고 앉아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장부는 검었다. 종이가 검은 게 아니라 내용이 검었다. 이자율, 만기일, 부도어음—숫자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숫자 사이사이에 사람의 숨이 끼어 있었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빚을 냈고, 누군가는 그 빚으로 제국을 쌓았다. 삶은 누군가의 담보였다.


수만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이 아주 작았으나 방 안의 어둠이 그 웃음을 받아 크게 부풀렸다. 마치 발작이 오기 직전처럼 온몸의 솜털이 서늘하게 곤두섰다.


‘바람이… 서늘해진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이상하게도 바다 냄새를 데려오지 않았다. 대신 쇳내—어딘가 무너질 때 나는, 건물의 내부가 드러날 때 나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냄새였다. 축제에 취한 사람들은 이 냄새를 맡지 못했다. 최태국은 더욱 못 맡았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취해 있었다.


수만은 장부를 덮고 천천히 일어섰다. 백열등 빛을 받은 그의 그림자가 벽면을 가득 채웠다. 그림자가 커질수록 방 안은 좁아졌다. 마치 다가올 날들이 수만의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수만은 속으로 말했다.

‘부풀어라. 더 부풀어라. 끝까지 부풀어라.’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거품이 터지고 세상이 무너질 때… 가장 무거운 욕심을 진 놈이, 가장 깊은 진흙탕 속으로 처박히는 법이라.’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원장 마당의 흙이 어둠 속에서 검게 젖어 있었다. 흙은 늘 그 자리에 있었으나 이제는 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인생과 누군가의 죄와 누군가의 탐욕이 눌어붙은 검은 바닥이었다.


멀리서 바람이 더 거세게 불었다. 바람은 말뚝에 묻은 빨간 페인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한 겹씩 벗겨냈다. 벗겨진 자리에 남는 것은 늘 같다. 두려움과 욕심과 그리고 빚.


수만은 그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아직은 아무것도 터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터질 것은 반드시 터진다. 그게 흙의 이치이기도 하고, 돈의 이치이기도 하며, 사람의 이치이기도 했다.


백열등 아래, 수만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크게 일렁거렸다. 그것은 다가올 1997년—나라 전체가 휘청이며 무너져 내릴 그날을 기다리는, 조용하고도 집요한 사신의 몸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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