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나라가 망하던 날 (1997.11.21~1998.)
16장. 나라가 망하던 날 (1997.11.21~1998.)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예금은 보호된다—금융시장 안정에 만전을 기하겠다.』
『환율 급등, 단기외채 상환 부담 가중….』
『기업 부도 잇따라, 구조조정 불가피….』
활자는 늘 검었지만, 그날의 검정은 잉크가 아니었다. 검정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눌어붙는 그을음 같았다. 읽고 나면 손끝이 더러워지는 활자였다. 해원의 아침은 아직 밥 냄새가 남아 있었는데, 그 활자 냄새가 단숨에 밥 냄새를 밀어냈다. 말보다 먼저 냄새가 바뀌는 날이 있다.
딱.
라디오는 목을 가다듬는 소리부터 달랐다. 늘 듣던 뉴스의 톤이 아니었다. 말이 말대로 흘러가지 않고 말끝이 자꾸 걸렸다. 앵커는 숫자를 말하면서도 그 숫자를 믿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환율이 몇이 되었다, 외환이 모자라다, 나라가 국제기구에 손을 벌린다—그 말들이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서나 일어날 재난처럼 들리다가도, 어느 순간 해원 사람들의 밥상 위로 떨어졌다.
밥상 위에 떨어진 건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공기였고, 숨이었으며, 절망 어린 눈빛이었다.
딱. 딱.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은행 앞에 곧장 장사진이 선 것은 아니었다. 첫날, 해원의 은행 앞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줄이 길게 뻗지 않았다. 대신 두세 사람씩 뚝뚝 떨어져 서 있었다. 서로의 숨을 피해 서 있는 모양새였다. 담배를 피워도 연기가 목구멍에 걸렸고, “돈 찾으러 왔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말이 현실을 부른다는 걸 그날은 다들 알았다. 말이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사람은 입술부터 움켜쥐는 법이다.
창구는 열렸고 직원들의 손은 움직였다. 움직이기는 하는데, 그 움직임이 ‘업무’라기보다 ‘확인’ 같았다. 아직도 은행이 은행인지, 아직도 통장이 통장인지. 사람들은 돈을 찾으러 온 게 아니라 확인하러 왔다. 통장 잔액이 아니라 자기 발밑의 바닥이 아직 단단한지 묻고 있었다.
군청 벽보 앞도 마찬가지였다. 전날까지 구세주처럼 번들거리던 ‘택지 개발’, ‘상업지구’ 같은 활자들이 그날은 갑자기 낡아 보였다. 활자가 낡았다기보다 그 활자를 믿던 군상들의 얼굴이 낡아졌다. 사람들은 벽보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로 감당 안 되는 거대한 붕괴가 눈앞에 닥쳤기 때문이었다.
딱. 딱. 딱.
정 할머니 국밥집은 장터의 중심이었다. 그곳엔 늘 돈 이야기가 끓어 넘쳤으나, 그 돈은 쌀값이었고 소값이었고 땅값이었다. 사람들은 밤새 땅값으로 핏대를 세우다가도 다음 날이면 묵묵히 흙을 밟았다. 땅값은 욕망이고 흙은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땅 이야기가 하얀 국밥 김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아이엠에프라 카더라.” 누군가 말끝을 흐렸다.
“그기 뭔데?”
“몰라. 나라가 망한다 카대.”
“나라가 망하면 뭐가 망하노.”
“니 통장이 망하고, 내 장사가 망하고… 다 망한다 카더라.”
‘망한다’는 말이 국밥집 바닥을 한 번 긁고 지나갔다. 그 말은 사투리 속에서도 낯설었다. 망한다는 말은 본디 사람한테 쓰는 말이지 나라에 붙이는 말이 아니었다. 나라는 늘 굳건히 하늘처럼 있었고, 사람들은 늘 그 아래서 비를 피하며 살았다. 나라가 망한다는 말은 지붕이 통째로 내려앉는다는 말과 같았다.
정 할머니는 무거운 국자를 들고도 한참을 휘젓지 못했다. 솥에서 올라오는 김 속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는 자꾸만 얇아졌다. 얇아진 목소리에는 기름기가 없었다. 살려달라는 피비린내만 피어올랐다.
딱— 딱— 딱— 딱.
그 운명의 박자가 다른 곳에서도 울렸다. 태국금융 사무실의 전화벨이었다.
전에는 전화가 울리면 “빌려주이소”라는 뻔뻔하고도 넉살 좋은 욕망이 먼저 들어왔다. 소가 몇 마리요, 논이 몇 마리지—돈은 늘 알량한 체면과 함께였다. 그런데 그날의 전화에는 체면이 없었다.
“사장님….” 말이 먼저 부서졌다.
“사장님, 이번 달만… 제발 딱 한 달만….”
“사장님, 은행이 문을 닫아삣심더… 진짜로 죽겠심더….”
살려달라는 애원이 돈보다 먼저 들어왔다. 돈이 아니라 숨을 빌려달라는 곡소리였다. 전화는 길지 않았다. 길게 말할수록 자기가 더 비참해진다는 걸 그들도 알았다. 짧게, 급하게, 목이 먼저 조여 오는 말들이었다.
최태국은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저 아래 은행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줄은 끝이 있어도 서성임에는 끝이 없다. 서성임은 마음이 갈 곳을 못 찾는 패배자의 발걸음이다. 태국은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보다 먼저 시퍼런 짐승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가 깍지 낀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톡, 두드렸다.
딱.
“영숙아.”
태국이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지금부터는 천지가 개벽하는 기다.”
이영숙은 대답 대신 장부를 펼쳤다. 종이가 바스락거릴 때마다 수화기 너머에서 사람 하나씩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손은 침착했고, 손톱 끝은 정교했다. 계산기는 쉬지 않았고 눈빛은 더 건조해졌다. 숫자들은 한 줄로 묶여 ‘연체’가 되었고 연체는 다시 ‘압류’로 진화했다. 종이 위의 단어가 점점 단단해졌다. 단단해진 활자는 뼈를 부수고 사람을 잡아먹는다.
태국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서서 말했다. 벼랑 끝에서 서서 내뱉는 말은 율법이자 명령이 된다.
“니들, 잘 들어라. 나라가 망한다 카는 소리, 다들 들었제?”
수금원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가 망하믄 니들 오금이 저리나?”
태국이 짧고 탁하게 웃었다.
“근데 내는 겁 안 난다. 이런 난리통이… 진짜배기 기회다.”
그는 손가락으로 다시 책상을 두드렸다.
딱. 딱. 딱. 딱.
“낭리지기는 기회다.”
그가 사형선고를 내리듯 또박또박 말했다.
“전에는 돈이 왕이었다 아이가. 근데 지금부터는 현금이 신(神)이고 염라대왕이다. 현금 들고 있는 놈이—남의 목숨 줄까지 쥐고 흔드는 기다.”
방 안이 묘지처럼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은 사람들의 숨을 한 번씩 가늠하고 있었다. 누구 숨이 먼저 얕아지는지. 누구 목이 먼저 꺾이는지.
“수만아.”
강수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 고개만 살짝 숙였다. 혀가 아닌 몸으로 하는 대답. 태국의 세계에서는 그게 가장 확실한 복종이었다.
“지금부터 장부대로 간다. 말미 없다. 눈물도 피도 없다."
"담보 잡힌 거, 땅, 집, 가게… 싹 다 끄집어내라.”
그리고 태국은 마지막에 아주 낮고 치명적인 독을 발랐다.
“김춘식 철공소도… 이제는 사냥할 때다.”
딱.
파도가 한 번 거칠게 뒤집혔다. 해원은 겉으로 조용해 보였지만 속에서는 이미 시커먼 흙탕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김춘식 철공소는 읍내 끝자락에 있었다. 시뻘건 화덕과 철공소의 불은 동네의 살아 숨 쉬는 맥박이었다. 망치 소리와 쇳소리가 나야 사람들은 동네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철공소는 요행과 투기가 아닌, 정직한 ‘일’로 버티고 선 최후의 성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망치 소리가 죽어가는 노인의 기침처럼 가늘어졌다. 소리가 줄었다기보다 소리의 배가 꺼졌다. 납품이 끊기고 주문이 취소되고, 어음 만기가 턱밑까지 들이닥쳤다. 그래도 김춘식은 망치를 놓지 않았다. 멈추면 자기가 끝나는 사람이었다. 시뻘건 쇳덩이를 집어넣고 꺼내며 그는 제 입술을 짓깨물었다. 피가 흘러도 닦지 않았다. 그 피조차 신성한 노동의 대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피보다 먼저 들이닥친 것은 자본의 사신이었다.
낡은 오토바이 소리가 철공소 마당 흙을 가르며 들어왔다. 수만이었다. 공장 안 일꾼들이 일제히 망치를 내려놓았다. 허공을 때리던 망치를 내려놓는 순간, 그들의 빈손엔 오롯이 ‘빚’이라는 수갑이 채워졌다.
수만은 가죽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차용증, 근저당, 기한이익 상실 통보서. 얇은 종이 쪼가리들은 시뻘건 쇳덩이보다 천 배는 더 차갑고 무자비하게 빛났다.
“김 사장님.”
수만이 감정의 찌꺼기조차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이… 사무실로 오라 카십니더.”
수만의 얼굴엔 연민이 없었다. 감정이 거세된 얼굴은 가장 완벽하게 잔인하다. 김춘식은 굵은 턱관절을 으드득 씹으며 입을 열었다.
“최태국이가… 내를 부르나.”
그는 끝내 태국을 ‘사장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평생 제 손으로 쇠를 벼리며 살아온 장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예. 오늘 안 오시면… 내일 아침 공장 문짝엔 빨간 딱지 붙을 낍니더.”
그 말이 협박인지 충고인지 김춘식은 따지지 않았다. 모른 척 삼키는 것조차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그는 공장 안을 한 번 돌아봤다. 철 가루를 뒤집어쓴 일꾼들의 눈동자가 벼랑 끝에 선 양떼처럼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춘식은 그 무거운 시선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걸음을 옮겼다.
태국금융 사무실의 파리한 형광등은 사람의 피부를 송장처럼 창백하게 만들었다. 밖은 한낮인데 사무실 안은 늘 음습한 ‘밤’이었다. 종이와 봉투와 시퍼런 도장이 권력의 밤을 만든다.
최태국은 춘식을 탁자 맞은편 딱딱한 의자에 앉혔다. 앉히면서도 짓누르는 자리였다. 이영숙은 옆에서 매끄럽게 서류철을 펼쳤다. 종이는 전부 같은 질감인데, 어떤 종이는 살을 베고 어떤 종이는 숨통을 끊었다.
“김 사장.”
태국이 서늘하게 웃음기를 지운 채 말했다.
“니도 알제. 지금 세상이 엎어지고 있다. 어음 만기 내일모레다. 은행은 진작에 문 닫았고, 니가 발버둥 쳐봐야… 발버둥 치는 그 손가락만 분질러진다.”
김춘식의 턱 근육이 경련했다.
“그래서, 니가 살려줄라꼬?”
태국이 아주 잠깐 가증스러운 ‘구원자’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살려준다 아이가. 니 철공소, 내가 통으로 인수한다. 눈덩이 같은 빚은 내가 안고 간다. 마당의 저 일꾼들도… 안 쫓아내고 일하게 해주꾸마.”
태국은 뱀처럼 천천히, 가장 치명적인 독을 꺼냈다.
“대신, 도장 찍고 넘겨라.”
파도가 춘식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목구멍까지 시꺼먼 흙탕물이 차올랐다. 이 굴욕을 삼키지 않으면 일꾼들의 밥이 끊긴다. 밥이 끊기면 사람이 끊긴다.
그 숨 막히는 오후, 장터 모퉁이 정 할머니 국밥집에는 세 형제가 우연처럼 한자리에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장터는 이미 ‘IMF’라는 괴물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사람들은 흥정 대신 서로의 처참한 불행을 안주 삼아 씹었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기백의 얼굴에는 기괴한 흥분이 번들거렸다.
“할매, 국밥 하나.”
기백이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고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정 할머니가 국자를 든 손을 멈췄다.
“뭐가 시작이고.”
기백은 어깨를 으쓱했다.
“돈이 움직인다 아이가. 큰돈이.”
이현은 말이 없었다. 국밥을 한 숟가락 뜨고도 한참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의 눈은 바깥을 보았다. 창구 의자에 앉은 어깨들, 군청 벽보, 얼어붙은 손들. 그는 낮게 말했다.
“시스템이 무너지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건 약한 사람이다.”
기백이 비웃듯 웃었다.
“약한 사람은 원래 무너진다.”
이현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니가 말하는 ‘원래’는, 누가 만든 원래냐.”
그들의 대화를 듣던 서하는 막 들어선 노인에게 말없이 제 자리를 양보하고 구석으로 물러섰다. 그는 슬픈 눈으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하룻밤 새 너무 빨리 늙어버렸어예.”
정 할머니는 대답 대신 무거운 국자를 다시 들었다. 국밥은 퍼야 했고, 삶도 퍼야 했다. 이곳에선 슬픔이 익기도 전에 밥이 차갑게 식어버린다.
밤이 되자, 김춘식은 다시 태국금융 사무실 탁자 앞에 불려왔다.
의자에 앉는 순간, 태산 같았던 그의 넓은 등이 한없이 작아졌다. 사내는 무릎을 꿇고 앉을 때 패배한다. 싸울 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김춘식에게는 전장이 남아있지 않았다.
최태국이 서늘한 미소와 함께 만년필과 붉은 인주를 내밀었다.
“도장만 찍으이소.”
말이 너무 쉬워서 더 잔인했다. 쉬운 말은 사람을 더 빨리 벼랑 아래로 밀어뜨린다.
딱.
도장이 짓눌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무거운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도 아니었고, 불꽃 튀는 망치가 내려치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해원 읍내 사람들에게 그 소리는 그 어떤 천둥보다 거대하게 고막을 찢었다.
나라가 망하는 소리는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 1면에서 나지 않는다. 그것은 벼랑 끝에 몰린 가장의 거친 손바닥에서, 평생을 바친 정직한 땀방울이 종이 한 장에 강탈당하며 찍히는 인감도장 소리에서 울려 퍼지는 법이다.
수만은 사무실 한쪽에서 그 완벽한 몰락을 지켜보았다. 형광등 빛이 그의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 절반은 사람의 껍데기였고, 절반은 완전한 사신의 그림자였다. 그는 속으로 비릿하게 웃었지만 겉으로는 표정을 지웠다. 아직은 웃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순간, 수만의 관자놀이가 찌릿하게 갈라졌다. 시야 가장자리가 하얗게 일그러지며 바닥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또… 온다.’
그는 어둠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드는 통증이 있어야만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쓰러지면 ‘약한 놈’이 된다. 약한 놈은 가차 없이 밟힌다. 그것이 태국이 가르쳐준 유일한 세계였다.
이영숙은 매끄러운 손길로 서류의 모서리를 단정하게 맞췄다. 직각으로 맞아떨어지는 종이의 모서리가 사람의 굴곡진 미래를 무참히 잘라냈다. 그녀는 넋이 나간 김춘식을 오래 보지 않았다. 패배한 인간을 오래 들여다보면 알량한 동정심이 생기고 계산이 흐려진다.
김춘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굽은 어깨를 한 번 떨었다. 짓눌렸던 자존심을 애써 펴보려는 몸짓이었다.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한마디라도 뱉어내면 그 자리에서 통곡하며 짐승처럼 무너질 것 같았다. 사람이 무너질 땐 자존심도 함께 무너진다. 자존심이 썩어 문드러진 자리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곰팡내만이 남는다.
이듬해 1월, 해원의 바람결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은행 앞 줄”은 그제야 눈물겹게 길어졌다.
아이의 돌반지, 어머니의 금비녀, 낡은 장롱 속에 숨겨두었던 체온의 흔적들이 차가운 창구 위로 쏟아졌다. 사람들은 금붙이를 내어놓으며 “나라에 보태자”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제 가족의 얇은 지붕을 지키려 애썼다. 공동체의 결의와 가장 여린 두려움이 같은 줄 위에 서서 떨고 있었다. 그것이 무지렁이들이 파국을 견뎌내는 방식이었다.
그날 밤, 텅 빈 태국금융 사무실. 불을 끄기 전 수만은 금고 속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종이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 서늘함이 수만에게는 이상한 안도감을 주었다. 사람은 배신하고 미쳐가지만, 종이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종이는 늘 똑같이 건조한 방식으로 타인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그래서 믿을 만했다.
딸깍, 스위치를 내리자 형광등의 푸른 잔광이 천장에 잠깐 맺혔다 사라졌다.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 벽에 비친 수만의 거대한 그림자가 ‘태국금융’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 부풀어 올랐다. 커지는 건 그림자인데, 수만의 가슴은 조여 왔다. 욕망이 또아리를 틀수록 숨은 짧아지고 날카로워졌다.
창밖으로 1997년의 흉흉한 겨울바람이 불어 닥쳤다. 바람은 더 이상 해원의 푸른 바다 냄새를 품고 있지 않았다. 매캐한 쇳내와 핏빛 종이 냄새만이 섞여 있었다. 텅 빈 공사장에 박힌 붉은 래커 칠이 어둠 속에서 상처처럼 선명하게 번뜩였다. 몰락의 징조는 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선명한 법이다.
딱.
어디선가 또 한 번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그 소리가 누구의 파멸을 부르는 노크인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바람이 완벽하게 바뀌었고, 짐승의 아가리처럼 닥쳐온 이 광풍은 반드시 누군가를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칠 것이다.
그것이 피도 눈물도 없는 돈의 이치였고, 동시에 잔혹한 사람의 이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