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19장. 형제들의 불씨(잔인한 달)

by 진동길

19장. 형제들의 불씨(잔인한 달)


크로노스의 뱃속에서


자식들을 집어삼킨 그리스 신화의 괴물처럼, 1999년 봄의 최태국은 해원의 모든 것을 씹어 삼키며 군림했다. 타인의 피눈물은 물론, 제 핏줄들의 영혼마저 삼켜 권력의 양분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크로노스가 끝내 몰랐던 것이 하나 있었다.
캄캄한 뱃속으로 삼켜진 자식들은 소화되어 사라진 게 아니었다. 각자의 어둠 속에서, 각기 다른 온도의 반역을 품고 있었다. 그 반역은 아직 불꽃이 아니었다. 다만—꺼진 줄 알았던 재 속에서, 손도 눈도 모르게 살아 있는 불씨였다.




진주 시내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는, 완벽히 통제된 공간 한복판에 기백이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목을 조였고, 그 조임은 풀어도 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끝내 풀 수 없는 종류의 조임이었다.


맞은편에는 박세린.
해원읍의 인허가권을 쥔 박 군수의 무남독녀가 우아한 손놀림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칼끝이 접시를

스치며 내는 가느다란 소리가, 기백의 귀에는 서류를 넘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우리가 결혼해서 양가가 정식으로 사돈을 맺으면 말이에요.”
세린이 와인잔의 얇은 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해원장 뒷산 쪽으로 곧 큰 윤곽이 잡힐 거래요. 오빠 아버님의 자본이랑 우리 아버지의 도장이 합쳐지면, 그 일대는 완전히 새로운 지도로 바뀌는 거죠.”


그 말이 끝나자, 기백의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던 일식의 마지막 목소리—“쇠 냄새가 난다”—가 순간 딱, 하고 멈췄다.
대신 다른 이름 하나가 솟구쳤다.


해원장 뒷산. 산 24번지.


그 땅은, 어릴 적 어머니 윤 씨가 유일하게 자기 이름으로 남겨두었던 곳이었다. 기백에게는 손대면 피가 나는 자리, 아킬레스건 같은 자리. 그런데 아비 최태국은 정략결혼이라는 화려한 목줄을 기백의 목에 채운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목줄을 쥔 사돈의 권력으로 그 땅을 “사업”이라 부르며 파헤치려 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흔적마저—포크레인 삽날 아래로.


기백의 손등에 시퍼런 핏대가 툭 불거졌다. 그는 제 속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알아차렸다. 철공소 화덕 냄새도, 국밥집 김 냄새도 아닌—사람을 값으로 바꾸는 냄새였다.


"어디 안 좋으세요?"


불쑥 끼어든 세린의 목소리에 기백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가 말입니꺼."

"갑자기 표정이 무서워지셔서요. 얼굴도 좀 붉어지신 것 같고."


기백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아, 아입니더. 아무것도. 그냥…… 여기 피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아서예."


"피 냄새요? 스테이크 말하는 거예요?"


세린이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그 웃음은 예뻤으나, 기백에게는 유리처럼 차가웠다.

그 웃음 너머로, 기백은 제 심장을 덮고 있던 얼음이 무참히 깨져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비의 식욕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 괴물의 배를 가르지 않는 한, 자신은 영원히 이 핏빛 뱃속에서 살아도 산 게 아닐 터였다.
기백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억눌려 있던 불씨가 처음으로 매섭게 일렁였다.




장남이 화려한 감옥에서 끓고 있을 때, 둘째 이현은 스스로를 가장 차가운 얼음 속에 가두고 있었다.


서울 여의도의 마천루. 명문대 경제학과 대학원 연구실.
이현은 파란 모니터 불빛에 무표정한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는 M&A(인수합병)를 전공하며 자본의 흐름을 해부했다. 자본이 어떻게 사람의 삶을 “합법”이라는 말로 접어버리는지, 그 기술을 배웠다.


그에게 아비 최태국의 방식은 경멸스러울 만큼 천박했다. 피를 묻히고 원한을 사면서 동네 푼돈이나 긁어모으는, 너무 노골적인 포식.


하지만 이현의 냉기는 돈에서만 오지 않았다.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한 장면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멀쩡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부터 “불안정하다”는 이름을 얻던 날.
흰 가운을 입은 사내들이 서류를 들고 들어왔고, 누군가는 서명을 했다. 어머니는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말끝이 잘렸고, 말이 잘리자 울음이 먼저 터졌다. 끌려나가던 어머니의 발끝이 문턱에 걸릴 때, 이현은 이상하게도 ‘절차’의 소리를 들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 펜 끝이 긁히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그날 밤, 아비는 안방의 넓은 침대 위로 비서 이영숙을 보란 듯이 들였다.
돈과 권력 앞에서라면 조강지처의 정신마저 말살하는 폭력—그것이 이현이 목격한 크로노스의 민낯이었다.


‘아버지의 방식은 조잡해.’


이현은 속으로 말했다.
‘피를 묻히고 원한을 사면서… 너무 시끄럽다.’


이현은 서하처럼 남을 위해 울지 않았고, 기백처럼 주먹을 쥐지도 않았다. 그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법과 제도의 틈새를 타고 수백억을 움직이는, 더 차갑고 완벽한 폭력을 배우고 있었다.


훗날 아버지의 낡고 천박한 성벽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무너뜨리고, 그 위에 자신이 군림하기 위해서.
타다 남은 재조차 얼려버릴 듯한 빙점의 불씨가, 이현의 눈빛 속에서 서늘하게 번뜩였다.




형들이 아비를 무너뜨릴 힘을 기르고 있을 때, 막내 서하는 세상의 가장 축축한 밑바닥에 서 있었다.


서울역 지하도 입구.
매캐한 냄새가 뒤엉킨 그곳에서 서하는 버너에 불을 붙여, 펄펄 끓는 국을 사람들에게 퍼주고 있었다.


“내 고향이 경남 해원인데…… 그놈의 악덕 고리대금업자 새끼한테 집이고 논이고 다 뺏기고 이리 쫓겨났다 아이가. 최태국인가 뭔가 하는 그 쳐죽일 놈…….”


국을 받아 든 중년 사내의 저주에, 서하는 국자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참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끓는 들통 속으로 떨어졌다. 국물은 눈물을 알아보지 못한 채 더 끓었다.


이 처절한 구호 활동은 서하만의 속죄 의식이었다. 그가 이토록 스스로를 십자가에 올리는 이유는, 어머니가 끌려가기 전 그의 어린 손을 붙잡고 남겼던 쉰 목소리 때문이었다.


“서하야. 이 악연의 고리를 끊어내는 건, 무서운 주먹도 똑똑한 머리도 아니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나를 내어주는 사랑과 희생……
오직 그 지독한 대가만이 칼춤을 멈출 수 있어.”


‘제가 받겠습니다.’


서하는 속으로 피를 토하듯 맹세했다.
형들은 주먹과 머리로 아비를 이기려 하지만, 서하는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이 집안의 악연을 끊어내려 했다. 한없이 작고 위태로웠으나—그래서 더 오래 갈 불씨였다.




형제들이 상경한 서울의 하늘 아래, 또 다른 욕망과 독기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해원에 남은 강수만은 철공소를 허물고 펜스를 치는 작업반장들에게 담배를 나눠주고 있었다.
사람들의 절규와 피비린내가 배어 있던 자리. 수만은 표정 없는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최태국의 충직한 수문장이자 궂은일을 도맡는 그림자였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거대한 성은 지어졌지만, 발밑의 지반이 피를 먹고 질척여졌다는 것을. 짐승의 본능처럼.


그리고 그 시각, 경부선 상행선 열차의 차창 밖을 내다보는 여자가 있었다. 유라였다.
무릎 위에는 낡은 첼로 케이스 대신, 단출한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빠 일식의 뼛가루를 뿌린 날, 유라는 깨달았다.
공장 바닥의 땀과 주먹질만으로는 최태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은 결국 서울의 권력, 법과 인허가를 쥔 손들이라는 것을.


유라는 그 손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려했다.
미술관, 후원회, 재단, 살롱—빛이 번들거리는 자리에서 은밀한 거래가 오가는 곳. 정직한 땀과 노동이 조롱받는 세상이라면, 기꺼이 그들이 숭배하는 ‘고급스러운 우상’이 되어 안쪽으로 들어가겠다고.


유라의 눈은 젖지 않았다.
대신 차갑게 맑았다.


기차의 기적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 소리는, 한 여자가 무엇이 되기로 결심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1999년의 '잔인한 달'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기백의 분노, 이현의 냉기, 서하의 희생, 유라의 독기. 그리고 수만의 그림자.


뿔뿔이 흩어진 이 불씨들이 훗날 해원의 산 24번지—거대한 화약고 위에서 한데 모이게 될 때, 불이 얼마나 잔혹하고도 장엄하게 번질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해원의 공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피눈물로 젖어 든 흙바닥 위로, 돈과 땅의 광기가 미친 듯이 춤을 출 잔인한 여름이 한 걸음씩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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