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밀레니엄의 광기 (1999 여름으로 가는 문 앞에서)
(1999 여름으로 가는 문 앞에서)
1999년의 여름, 해원읍을 감싼 매미 소리는 유난히 길고 찢어질 듯 기괴했다. IMF의 칼바람에 베인 핏물이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사람들의 피눈물을 빨아먹고 질척이던 읍내의 흙바닥 위로, 어느 날 갑자기 시뻘건 금빛 환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해원장 뒷산 24번지 일대, 밀레니엄 신도시 개발 구역 최종 확정.’
예상 보상가 및 개발 이익, 무려 150억. 이 천문학적인 숫자는 해원 사람들의 이성을 순식간에 마비시키는 지독한 환각제였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빚쟁이들을 피해 야반도주를 하고 농약을 마시며, 텅 빈 읍내 한복판에서 서로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던 무지렁이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퀭한 눈동자 속에는 ‘벼락부자’라는 천박하고도 달콤한 맹독이 돌기 시작했다.
다방과 국밥집에는 더 이상 한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떡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투기꾼들의 번들거리는 웃음소리와, 알량한 땅 한 뙈기라도 사보려는 사람들의 헛된 욕망이 끈적하게 엉겨 붙었다. “밀레니엄 아이가, 밀레니엄! 인자 우리 해원도 서울 놈들 맨치로 떵떵거리고 살 끼다!” 누군가는 약값이 없어 죽어 나갔는데, 누군가는 허공에 뜬 금광을 캐는 참혹한 비극과 기괴한 희극의 교차. 그것이 세기말 버블이 만들어낸 짐승들의 민낯이었다.
그리고 그 금빛 환각의 정점, 먹이사슬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는 ‘최태국’이라는 이름 석 자가 거대한 신전처럼 버티고 있었다.
해원을 통째로 집어삼킨 150억의 비린내는, 여름 바람을 타고 서울에 흩어져 있는 아들들에게도 가닿았다.
여의도 고층 빌딩 숲. 연구실의 이현은 경제지 한구석에 난 ‘해원 신도시 개발 확정’ 기사를 읽으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의 입가에 서늘하고 건조한 비웃음이 걸렸다. ‘150억. 아버지는 고작 그 돈으로 지역 유지 노릇이나 하며 으스대겠지.’ 이현에게 150억은 종착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훗날 자신이 태국 종합개발을 통째로 적대적 M&A(인수합병) 하여 아비를 길거리로 나앉게 만들 때 필요한, 아주 먹음직스러운 시드머니(종잣돈)에 불과했다. 이현은 감정의 동요 없이 더 차갑게 기업들의 부실 채권 서류를 파고들었다.
반면, 서울역 지하도의 서하는 그 기사를 보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머니를 쫓아내고 형의 심장에 대못을 박으며 빼앗은 땅이, 결국 악마의 가장 빛나는 왕관이 되었다. 150억이라는 돈이 읍내 사람들을 또 얼마나 타락시키고 짓밟을지 눈에 선했다. 서하는 그날 평소보다 더 많은 노숙자들의 언 손을 붙잡고, 고해성사를 하듯 뜨거운 국밥을 퍼 날랐다.
그리고 서울 강남의 최고급 프라이빗 갤러리, [아르테]. 은은한 핀 조명이 비추는 수억 원짜리 추상화 앞에는, 해원 철공소의 딸 김유라가 아닌 ‘수석 큐레이터 킴(Kim)’이 서 있었다.
상경한 지 불과 석 달. 시골 촌년 유라가 강남 최고급 갤러리의 실세로 벼락출세한 배경에는, 한 편의 삼류 치정극보다 더 지독하고 노골적인 거래가 숨어 있었다. 유라는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첼로’를 들고, 정·재계 VVIP들만 은밀히 출입한다는 최고급 텐프로 룸살롱의 연주자로 들어갔다. 천박하게 웃음을 파는 아가씨들 사이에서, 목선이 깊게 파인 검은 드레스를 입고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첼로의 굵은 현을 켜는 유라의 서늘함은 곧바로 한 늙은 수컷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재계 서열 10위권인 대성건설의 일흔 살 먹은 장 회장이었다. 장 회장은 유라의 첼로 활이 멈추던 날 밤, 그녀를 강남의 최고급 호텔 펜트하우스로 불렀다. 침대 위에 두툼한 수표 다발과 강남 아파트 열쇠를 던져주며 제 어린 첩이 되기를 요구하는 늙은 회장 앞에서, 유라는 옷을 벗는 대신 차가운 눈으로 그를 직시하며 거래를 제안했다.
“회장님. 한 달에 몇천만 원씩 받고 숨어 지내는 멍청한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대신, 저를 회장님이 돈세탁하시고 정관계 인사들 뇌물 먹이실 때 쓰는 그 갤러리의 책임자로 앉혀 주십시오.”
“……뭐라? 기가 맥히네. 니 지금 뭐라 캤노?”
“밤에만 안는 여자는 금방 질리지만, 회장님의 가장 내밀한 금고를 완벽하게 관리하는 우아한 파트너는 평생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제 젊음과 영혼을 드릴 테니, 제게 그 권력자들의 정수리에 설 수 있는 입장권을 주십시오.”
일흔의 노회한 짐승은 시골에서 올라온 이 스물한 살짜리 독사의 당돌함에 미친 듯이 파안대소했다. 그리고 그날 밤의 끔찍한 통정(通情) 이후, 유라는 장 회장의 막강한 뒷배를 업고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룸살롱에서 웃음을 파는 여자는 쓰다 버려지지만, 권력자들의 거만하고 알량한 교양을 채워주며 은밀한 자금의 흐름을 쥐고 있는 예술 기획자는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비선(秘線)’으로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을 유라는 본능적으로 간파했던 것이다.
“큐레이터 킴. 이번에 들여온 샤갈 판화전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다음 달 브이아이피(VIP) 살롱에는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는 서울지검 하 차장검사도 참석할 겁니다.”
장 회장의 측근인 대형 로펌의 대표가 은밀하게 귓속말을 건네자, 유라는 우아하게 눈웃음을 쳤다.
“영광이네요. 하 차장검사님 취향에 맞는 작품을 따로 다이닝 룸에 세팅해 두겠습니다.”
그녀의 미소는 완벽하게 빚어진 조각품 같았다. 그러나 유라의 머릿속은 지금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듯 뜨겁게 들끓고 있었다. 오늘 아침, 고향 해원에서 산 24번지가 150억짜리 노다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최태국이 150억의 현금을 거머쥔다는 것은, 그가 해원읍의 늙은 괴물에서 중앙 정계까지 줄을 댈 수 있는 진짜 권력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없어.’ 유라는 샴페인 잔을 쥔 손끝에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었다. 평범한 로비로는 하 차장검사 같은 거물을 품에 안기까지 수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태국의 목줄을 단숨에 끊으려면 당장 저들의 법복(法服)과 수사권이 필요했다. 유라는 속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다음 달 살롱 모임에서 무슨 짓을 해서든, 장 회장에게 몸을 던졌던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파격적인 수를 써서 하 차장검사의 목줄을 쥐어야 했다. 겉은 누구보다 우아했지만, 속은 복수를 위해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한 마리 맹수의 그것이었다.
다시, 해원. 해원읍 외곽에 지어진 최태국의 호화로운 대저택.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빛나는 만찬장에서는 승리자들의 오만한 축배가 부딪히고 있었다. 박 군수를 비롯한 지역의 진짜 권력자들과 정치인들이 최고급 양주를 들이켰다.
“최 회장, 혜안이 대단하십니다. 그 척박했던 산 24번지를 미리 다 쥐고 계셨다니, 이거 뭐 해원읍의 왕이 따로 없으십니다 그려!”
“허허, 다 군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 덕분 아입니까. 이제 우리 해원도 서울 놈들 부러울 거 하나 없는 깁니다. 자, 듭시다!”
태국은 기름진 얼굴로 파안대소하며 잔을 높이 들었다. 산 24번지. 조강지처 윤 씨를 정신병원으로 내쫓으면서까지 기어이 집어삼켰던 그 피눈물 젖은 땅이, 마침내 태국의 머리 위에 씌워질 150억짜리 찬란한 황금 왕관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거만한 연회장 한구석, 이영숙이 화려한 실크 원피스를 입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녀는 당연히 안주인의 자격으로 박 군수에게 술을 따르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는 순간, 최태국의 두툼한 손이 허공을 가르며 그녀를 제지했다.
“아... 이 실장. 당신은 인자 그만 내려가 봐라. 주방에 가서 안주나 더 챙기라.”
“……회장님. 저도 군수님께 인사 한잔…….” “여긴 사내들끼리 큰일 이야기하는 자리 아이가. 눈치 없이 굴지 말고 내려가라 카이.”
태국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박 군수와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당한 모욕에 영숙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150억. 그 거대한 액수 앞에서 태국은 철저히 변해 있었다. 과거 읍내 구멍가게 수준의 돈놀이를 할 때만 해도, 영숙은 장부를 관리하며 그의 더러운 피를 함께 묻히는 완벽한 동업자였다. 하지만 무대가 150억 단위로 커지고 도지사와 군수들이 들락거리는 진짜 ‘상류 권력’의 판이 되자, 영숙은 그저 과거의 천박한 꼬리표를 단 ‘술집 마담 출신 첩년’이자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흠집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주방으로 쫓겨나듯 밀려난 영숙은 차가운 대리석 식탁을 짚고 서서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붉게 칠해진 그녀의 손톱이 파르르 떨렸다. 이대로 가면 팽(烹)당한다. 단 한 푼의 떡고물도 쥐지 못한 채, 조강지처를 몰아냈던 그 방식 그대로 저 늙은 괴물에게 버림받을 것이라는 짐승 같은 공포가 영숙의 척추를 타고 올랐다. 그리고 그 공포의 끝에는, 어떻게든 저 150억이라는 거대한 금탑에서 자신의 몫을 물어뜯어 내고야 말겠다는 지독하고도 처절한 탐욕이 독사처럼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그 시각, 저택 2층의 어두운 복도 끝. 기백은 굳게 닫힌 난간에 기댄 채, 1층 만찬장에서 벌어지는 짐승들의 연회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윤 씨의 땅. 산 24번지. 어릴 적 어머니가 해원천을 내려다보며 유일하게 숨을 고르던 그 작고 슬픈 땅이, 이제는 어머니를 미치게 만든 아비의 가장 빛나는 권력이 되었다. 사람을 벌레처럼 짓밟고 피를 빨아먹은 악인은 150억의 성대한 축배를 드는데, 정직하게 쇠를 두드리던 춘식과 일식은 진흙탕 속에 으깨어졌다.
기백은 이 지독한 세상의 이치 앞에서 소리 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자신이 품었던 분노가 얼마나 순진하고 얄팍한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아비 몰래 춘식에게 돈 봉투를 건네던 그 알량한 선의나, 박 군수의 딸 세린과 정략결혼을 맺어 훗날을 도모하려 했던 그 얌전한 계획 따위로는 결코 저 150억짜리 거대한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괴물을 죽이려면 괴물의 방식보다 더 잔혹해져야 했다. 성벽의 바깥에서 점잖게 칼을 휘두를 것이 아니라, 성벽의 가장 깊은 내장(內臟) 속으로 기어 들어가 가장 썩고 문드러진 틈새부터 도려내야만 했다.
그때, 기백의 서늘한 시선이 주방 쪽을 향했다. 수치심과 분노로 어깨를 떨며, 독기 어린 눈으로 만찬장을 쏘아보고 있는 여자. 이영숙이었다. 아비의 권력에서 밀려나 팽당할 위기에 처한 여자. 150억에 대한 욕망으로 미쳐가면서도 불안에 떠는 늙은 수컷의 연약한 아킬레스건.
기백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이미 인간의 온기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아비의 여자를 이용한다는 것. 아비의 침소를 더럽히고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등을 찌른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영혼마저 지옥 불에 던져 넣는 끔찍한 파멸의 독배(毒杯)였다. 그러나 기백은 망설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피눈물과 일식의 무덤 위에 세워진 저 150억의 성벽을 완전히 박살 낼 수만 있다면, 악마와 통정(通情)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그 잔을 들이켤 참이었다.
밀레니엄의 덥고 끈적한 바람이 저택의 창문을 불길하게 때리고 있었다. 기백의 차가운 구두 굽 소리가, 탐욕과 공포로 젖어 있는 영숙을 향해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