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룸살롱 밀레니엄 (하인즈의 딜레마)
진주 시내에서 가장 깊고 은밀하다는 최고급 룸살롱 [밀레니엄]의 지하 VIP실. 두꺼운 방음문이 닫히자, 쿵쾅거리던 바깥의 음악 소리가 거짓말처럼 끊겼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무거운 적막이 룸 안을 채웠다. 위층에서는 150억이라는 돈벼락에 취한 최태국이 권력자들과 어울려 기고만장한 축배를 들고 있었지만, 이 지하 밀실의 온도는 사뭇 달랐다.
테이블 위에는 최고급 양주가 놓여 있었으나, 술자리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영숙은 들어오자마자 아가씨들을 신경질적으로 내쫓고는, 제 손으로 빈 잔에 술을 콸콸 쏟아부었다. 최근 최태국의 시선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직감한 그녀의 눈빛은, 구석에 몰린 독사처럼 번들거렸다. 그녀는 이제 살길을—아니, 최태국의 금고를 통째로 털어버릴 ‘칼잡이’를 찾고 있었다.
얼음이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영숙이 잔을 탁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수만아. 술도 얼큰하게 올랐는데,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질문이 아니라 통보에 가까운 서늘한 어조였다. 과일 안주를 씹던 수만이 흠칫 놀라며 눈치를 살폈다. 누구나 다 아는 최태국의 서자(庶子), 궂은일을 도맡는 수만에게 이영숙은 아비의 첩이자 제 밥줄을 쥔 ‘실장님’이었다. 반면, 소파 반대편에 앉은 기백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말없이 그녀의 붉은 입술만 응시하고 있었다. 법적인 장남인 기백에게 영숙은 어머니를 쫓아낸 원수이자, 동시에 서로의 지독한 상처를 핥아주다 선을 넘어버린 은밀한 통정(通情)의 대상이었다.
영숙이 테이블 위로 상체를 바짝 당기며 두 사내와 시선을 맞췄다.
“어떤 남자 마누라가 오늘내일해. 근데 동네 약사가 기가 막힌 약을 만든 거야. 원가는 푼돈인데, 약사가 이걸 수백 배 뻥튀기해서 안 팔아주는 거지. 남자가 전 재산을 털어도 반도 안 되니까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는데, 약사는 ‘내 약이니 내 맘대로 판다’며 쫓아냈어.”
영숙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톡, 톡,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마치 폭탄의 초침 소리 같았다.
“자, 밤이 됐네? 수만 닌 우짤래. 약국 문 부수고 들어가서, 약 훔칠 끼가?”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수만이 애써 분위기를 띄우려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아따, 실장님도 참. 마누라가 죽게 생겼는데 당연히 훔쳐야지예! 까짓거 한 번 훔치는 김에 약국 금고까지 싹 다 털어버리면 그게 남는 장사 아입니꺼? 안 들키면 장땡이지. 형님, 안 그렇십니꺼?”
영숙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강수만, 이 단순한 놈. 돈 냄새만 풍겨주면 언제든 고기 방패로 쓸 수 있는 얄팍한 부류. 그녀의 뱀 같은 시선이 느릿하게 기백을 향했다. 룸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짓눌렸다.
“우리 기백 도련님은? 도련님도 문 부수고 들어갈 랍니까?”
비아냥거림과 묘한 색기가 섞인 ‘도련님’이라는 호칭이 기백의 귓바퀴를 핥았다. 기백은 턱을 괸 채 묵묵히 양주잔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얼음 너머로 과거의 끔찍한 기억들이 들러붙었다. 약을 쥐고 흔드는 탐욕스러운 약사. 제 어머니를 벼랑 끝으로 내몬 앞의 이 여자. 그리고 산 24번지를 헐값에 씹어 삼키고 150억의 왕좌에 앉은 늙은 괴물 최태국.
기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짐승의 그것처럼 시커멓게 가라앉아 있었다.
“약을 와 훔칩니꺼.”
“어머. 그럼 마누라가 죽게 둬? 법 지키자고?”
“아뇨.”
기백의 굵은 손가락이 유리잔을 까득, 소리 나게 긁었다. 유리가 깨질 듯한 마찰음에 영숙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사람 목숨줄 쥐고 장사질하는 그 약사 새끼 숨통을 끊어놔야지. 약을 훔치는 게 아이라, 그딴 놈은 애초에 세상에 살아있게 내비두면 안 되는 깁니더.”
순간, 영숙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룸 안의 공기가 얼어붙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듯했다. 만수는 다루기 쉬운 사냥개라면, 기백은 목줄을 쥐려는 순간 주인의 목덜미를 통째로 물어뜯을 늑대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침묵. 영숙의 머릿속 주판알이 미친 듯이 튕겨지기 시작했다. 이 미친 늑대라면, 능히 아비의 목에 칼을 꽂을 수 있을 터였다.
“수만 씨. 1층 카운터에 가서 오늘 결산 장부 좀 가져와.”
영숙이 차갑게 축객령을 내렸다. 눈치 빠른 수만은 서늘한 기류를 피해 황급히 룸을 빠져나갔다. 육중한 문이 다시 닫히고, 밀실에는 오직 최태국의 첩과 그의 장남만이 남았다.
영숙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백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급 향수 냄새와 알코올 향이 뒤섞여 기백의 코끝을 어지럽혔다. 영숙이 기백의 넓은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귓가에 뱀처럼 속삭였다.
“약사 새끼 숨통…… 도련님이 진짜 끊을 수 있겠습니꺼.”
“당신이 금고 문을 열어준다면.”
기백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어깨에 올려진 영숙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악력이 어찌나 강한지 영숙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탐닉이 아니었다. 괴물을 무너뜨리기 위해 악마가 되기로 한 아들과, 팽당하지 않기 위해 늙은 수컷을 배신하려는 첩의 지독한 맹약이었다.
기백이 영숙을 거칠게 소파 위로 끌어당겼다. 영숙의 실크 원피스가 속절없이 구겨지며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윤리도, 체면도, 아버지라는 존재의 거대한 그림자도 이 밀실 안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기백은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 속에서, 영숙의 붉은 입술을 삼키며 아비의 내장 가장 깊은 곳을 도려내는 파괴적인 쾌감을 느꼈다. 150억의 광기가 춤을 추는 밀레니엄의 지하에서, 파멸을 담보로 한 두 남녀의 끔찍하고도 뜨거운 통정(通情)이 어둠 속으로 질척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해원의 룸살롱에서 가장 타락한 금기가 깨지고 있을 무렵, 서울의 밤공기도 못지않게 비릿했다.
서울 강남의 최고급 프라이빗 VVIP 룸. 은은한 첼로 선율이 흐르는 방 안, 차기 검찰총장으로 꼽히는 서울지검 하 차장검사가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 김유라가 고가의 추상화 한 점을 펼쳐놓고 있었다.
“하 차장님. 이 작품은 단순한 그림이 아닙니다. 장 회장님께서 차장님의 ‘미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신, 추적 불가능한 30억짜리 무기명 보증수표나 다름없지요.”
유라는 붉은 와인을 차장검사의 잔에 따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목소리는 나른하고 우아했지만, 그 안에는 법의 심장을 찌르는 정확하고 대담한 칼날이 숨어 있었다.
“디렉터 킴은 참 겁이 없어.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뇌물 공여로 수갑을 채우면 어쩌려고?”
하 차장검사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이 젊은 여자는 권력자들의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은밀한 뇌물을 ‘예술품’이라는 고상한 장막으로 세탁해 주는 완벽한 파트너였다.
“수갑을 채우시기엔, 제가 차장님께 드릴 수 있는 즐거움과 정보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유라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하 차장검사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차장검사의 투박한 손이 유라의 무릎 위로 거침없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유라의 눈동자가 아주 찰나의 순간, 짐승의 내장을 파고드는 칼날처럼 번뜩였다. 그녀는 소름 끼치는 구역질을 억누르며 오히려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나를 마음껏 안고, 취해라. 당신의 그 더러운 법복(法服)과 수사권을 내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의 칼을 빼앗아, 내 고향의 그 늙은 괴물 숨통을 끊어놓을 때까지.’
하인즈가 훔친 것이 아내를 살릴 약병이었다면, 기백이 훔치고 있는 것은 아비의 내장이었고, 유라가 제 육신을 던져 훔치고 있는 것은 세상을 심판할 ‘사법의 칼’이었다. 1999년의 잔인한 여름밤. 해원에 남겨진 자식들은 그렇게 각자의 지옥 속에서 기꺼이 악마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