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 문턱을 넘어서는 세상
4장 — 문턱을 넘어서는 세상
아침은 어김없이 당도했다. 밤새 미쳐 날뛰던 비바람이 산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사람의 왕래를 끊어놓았건만, 빛은 기어이 무심한 얼굴로 창틀을 넘어왔다. 간밤의 처절한 무너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는 거칠게 제 몸을 뒤척였으며, 종소리는 허공을 갈랐다. 세상은 그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속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지은 자를 억압하고 추동한다. 꾸역꾸역 살아내라고.
이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캄캄한 고해소에서 끝내 토해내지 못하고 삼켜버린 문장이 입속에 핏덩이처럼, 깔깔하게 남아 있었다.
저는 아직, 못 하겠습니다.
그것은 고백인 동시에 비겁한 방어막이었다. 완전히 무너지지도, 온전히 버티지도 못한 채 유예된 시간. 속세의 수라장에서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태로운 상태였다. 결재는 보류되고 책임은 허공을 떠돌며, 매듭짓지 못한 말은 기어코 독을 품기 마련이니까.
세면대 앞에 서서 찬물에 두 손을 처박았다.
물이 살갗을 때릴 때마다 씻겨나가는 것은 없었고, 오히려 겹겹이 감춰둔 치부가 낱낱이 발가벗겨지는 듯한 환촉(幻觸)이 일었다. 그때, 축축한 손끝이 저도 모르게 안으로 굽어들었다.
생과 사를 무심하게 갈라치던 단어.
‘확인.’
마치 도박판의 패를 쥐듯 버튼을 누르던 맹목적인 관성. 머리는 필사적으로 망각을 연기해도, 뼛속까지 스며든 죄의 습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손끝에서 발작했다. 이현은 수건을 쥔 채 꼼짝하지 못했다.
그 찰나의 정적을 깨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신부님께서 잠깐 오시랍니다.”
수도자의 짧은 전갈에 이현은 연유를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필요가 없었다. 문틈으로 이미 바깥세상의 비린내가 스며들고 있었으므로. 쇠붙이의 냉기, 빳빳한 서류철, 사람의 목줄을 옭아매는 수사의 냄새가 수도원의 고요를 무참히 찢고 들어왔다.
응접실 문을 열자, 탁자를 사이에 두고 늙은 신부가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봉투조차 씌우지 않은 벌거벗은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숨길 여유조차 없었다는 다급함, 혹은 굳이 숨길 가치도 없다는 권력의 오만이 배어 있는 증거였다.
“해원에서 왔습니다.”
신부의 낮고 건조한 음성에, 이현의 시선이 종이 위로 곤두박질쳤다.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고 숨이 밭아졌다.
종이를 펼치자, 제목부터 단정했다.
[참고인 출석요구서]
사건: 최태국 변사 사건
출석 대상: 최이현
출석 일시: 2000년 3월 10일 10:00
출석 장소: 해원경찰서 수사과(형사팀)
담당: 000형사 / 연락처 000-0000-0000
종이에 박힌 활자와 숫자를 망막에 새기는 순간, 이현의 육신은 즉각 ‘통제’와 ‘기만’의 짐승으로 돌변하려 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의 차가운 금속성이 독사처럼 손끝을 유혹했다. 전원을 켜고, 번호를 누르고, 먼저 그럴싸한 말의 골격을 세우자. 먼저 사정과 맥락을 쥐고 흔들자. 선수를 치는 것만이 생존의 방식이었다. 늦으면 먹히고, 잡히면 파멸이다. 그는 늘 그렇게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교묘하게 살아남아 왔다.
그가 의자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신부의 깊은 시선이 이현의 미세한 떨림을 옭아맸다.
“아우구스티노 형제님. 지금, 가장 먼저 움직이려는 것이 뭡니까.”
질타가 아니었다. 정수리를 쪼개고 들어오는 서늘한 벼락이었다.
이현은 입을 뗄 수 없었다. 대답 대신, 주머니를 향해 꿈틀거리던 제 손가락의 비루한 관성만이 낱낱이 까발려졌을 뿐. 생각보다 늘 한 박자 먼저 움직여 죄를 덮고 말을 만들던 그 끔찍한 습관.
신부는 종이를 손끝으로 지그시 누르며 말을 이었다.
“참고인이라도, 지정된 시간엔 응하는 게 원칙입니다. 다만—말을 빚어내기 전에, 먼저 사실을 마주하십시오. 연락은 오늘 안으로 하세요. 정 피하고 싶다면, 그 두려움부터 정직하게 털어놓으시면 됩니다.”
사실.
그 묵직한 두 글자가 이현의 명치를 찔렀다. 그는 거친 사실보다 매끄러운 ‘서술’에 능한 자였다. 조작된 서술은 환상처럼 안락하니까. 그러나 수도원의 흙과 물은 그 알량한 포장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때마침 창밖 마당에서 굵은 자갈을 짓이기며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
단정하고 위압적인 검은 세단. 도시의 오만과 법의 냄새를 싣고 온 기계음이 경당의 종소리를 덮어버렸다. 신부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에 홀로 남겨진 이현은 종이를 내려다보며 짐승처럼 헐떡였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끊임없이 그를 유혹했다. 꺼내어 누르면 그만이다. 익숙한 서술의 세계로 도망쳐 책임을 흩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손을 뻗지 않았다. 손을 뻗지 않는 것—그 필사적인 마비(痲痺)야말로 오늘 그가 올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참담한 기도였다.
얼마 뒤, 마당을 울리던 엔진 소리가 멀어지고 신부가 홀로 돌아왔다.
“형사들이 직접 들이닥치진 않았습니다. 서류만 맡기고 갔어요.”
“아마 연락이 안 닿았던 모양입니다. 내일 오전 열 시로 박아 두었으니, 가시든 조정을 하시든—오늘 안에 전화를 하셔야 합니다.”
“내면의 음성이 가리키는 길이 맞습니다.”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기 시작했다.
이현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하루, 끝내 고해소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죄경도, 성사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현은 알 수 있었다.
세상의 소란이 턱밑까지 칼을 들이민 절체절명의 순간, 얄팍한 기교와 도망으로 점철되었던 제 비루한 발걸음이 비로소 멈추어 섰다는 것을.
은총이란 찬란한 빛으로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맹렬히 도망치고 싶은 찰나에 제 발목을 꺾어버리고 그 자리에 버텨내는 처절한 정지 상태에서 움튼다는 사실을.
그날 밤도 이현의 눈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타올랐다.
전날의 불면이 죄를 숨기기 위한 신경증적인 고통이었다면, 오늘의 불면은 마침내 그 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자의 서늘한 각성이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칠흑 같은 바다가 제 몸을 찢으며 부서지고 있었다.
부서져야만 비로소 본래의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이.
부서지는 파도 소리 사이로 이현은 입술을 짓씹으며 되뇌었다.
재는 흩어져도, 살인을 종용하던 내 손끝의 문장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밀어 넣은 그날의 문장들을, 언젠가 제 입을 열어 낱낱이 세상과 신 앞에 꺼내놓아야만 할 것이다. 혀가 굳어 고백조차 하지 못한 참담한 밤이었으나, 형벌의 틈새로 구원의 싹은 이미 지독하게, 핏빛으로 움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