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5장 — 첫 고백

by 진동길

5장 — 첫 고백


비는 밤새 그칠 줄을 몰랐다.

수그러드나 싶으면 이내 산짐승처럼 억세게 밀려와 창을 때렸다. 바다에서 치받고 올라온 바람이 산등성이를 거칠게 핥더니, 기어코 이현의 앙상한 목덜미까지 파고들었다. 이런 날씨에는 사람의 마음도 자꾸만 비탈길을 구르듯 도망치려 든다. 돌아서면 당장은 덜 아플 것 같아서. 그러나 돌아서서 유예된 고통은 늘 이자를 쳐서 되돌아오는 법이다.


탁자 위에는 출석요구서가 백기(白旗)처럼 펼쳐져 있었다.


[참고인 출석요구서]

출석 일시: 2000년 3월 10일 10:00

출석 장소: 해원경찰서 수사과(형사팀)


종이는 형편없이 얇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지독하게 옭아매는 것은 늘 저 얇은 종잇장이다. 활자 몇 개로 사람의 발목을 분지르고, 시간 하나로 사람의 숨통을 쥐고 흔든다.


이현은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가 다시 거칠게 폈다.

접는 동작은 필사적인 결심 같았고, 펴는 동작은 참담한 후회 같았다. 그 진자운동 사이에서 그의 손끝은 자꾸만 주머니 속 휴대폰으로 미끄러지려 했다.


전원을 켜고, 인맥을 동원하고, 말을 짜 맞추고. 그렇게 상황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쪽으로. 그는 평생 그런 얄팍한 기교로 세상의 포식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먼저 치면 덜 맞고, 주춤하면 뜯어 먹힌다. 그것이 이현의 유일한 생존교리였다.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망설임 없이 곧게 내리 꽂히는, 무겁고 또렷한 걸음.

서하가 들어왔다.

젖은 우의 자락에서 검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서하는 탁자 위의 종이를 한 번 굽어보더니, 낮게 읊조렸다.


“출석요구서….”


그 무심한 한마디에 응접실의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이현은 습관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려 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웃음은 가장 쉬운 변장술이었지만, 오늘 그의 안면 근육은 제멋대로 굳어버렸다.


“삼월 십 일이면… 내일 열 시네.”


서하가 종이의 무게를 달아보듯 낮고 분명하게 말하고는 이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형.”

서하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형이 더 잘 알겠지만… 형이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


그것은 위로나 권유가 아니었다. 쐐기를 박는 확인이었다. 철거촌의 아수라장에서 용역들의 칼부림을 맨몸으로 받아내던 그 단단한 음성이, 지금은 이현의 비루한 도망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짧게 대답했다.


“가야지.”


대답은 허망할 만큼 쉬웠으나, 목구멍은 찢어질 듯 따가웠다. 말이 목구멍에 걸려 피를 토할 것 같은 순간은, 단순히 단어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 전체가 걸려 넘어질 때 찾아온다.


서하는 잠시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젖은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고 투박한 나무 묵주였다. 반짝이는 광택 따위는 다 닳아버린, 짐승의 뼈처럼 투박한 물건.


오래된 것은 함부로 사람을 꾸짖지 않는다. 그저 말없이 곁에 머물며 붙잡아줄 뿐.


서하는 묵주를 이현의 앞, 출석요구서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억지로 손에 쥐여주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두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듯이.


“이걸… 쥐고 가요.”

“기도가 안 될 때가 기도가 필요한 때라는 걸 잘 아실 거예요.”

“거짓말이 먼저 튀어나오려 할 때, 삶이 나를 외면한다고 느껴질 때,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때니까…. 손에 움켜쥐는 것부터 시작해 봐요.”


이현은 떨리는 손을 뻗어 묵주를 거머쥐었다.

거친 나무 알갱이가 손금 사이를 파고들었다. 손끝이 휴대폰의 ‘확인’ 버튼을 누르려 발작할 때마다, 이 단단한 나무알이 먼저 신경을 긁으며 제동을 걸어줄 것이다. 그건 아주 작고 초라한 물리적 저항에 불과했지만, 때로는 그 작은 통증 하나가 벼랑 끝의 인간을 살려내기도 한다.


서하는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구구절절한 위로는 오히려 인간을 변명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서하는 바닥의 삶에서 체득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유리를 사납게 때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곪아 터진 채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이 진흙처럼 쌓여 있었으나, 오늘은 그 오물을 들춰낼 자리가 아니었다. 해원의 심판대는 당장 내일이었다.


서하는 문턱을 넘다 말고 한 번 뒤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형광등 불빛 아래서 시퍼렇게 빛났다.


“형.”

“힘내.”


서하는 이현을 안아주었다. 같은 어미에게서 연유된 피가 서로의 닮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문이 닫혔다.

육중한 침묵이 이현의 숨통을 조였다.

그날 저녁, 이현은 마침내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불빛은 제단 앞의 성체등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 차갑고 경박한 빛은 끊임없이 인간을 속세의 아귀다툼 속으로 끌어내린다. 빨리 핑계를 대라, 빨리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라, 속삭이면서.


그는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건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해원경찰서 형사팀입니다.”


이현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아주 천천히 내뱉었다. 조급하게 혀를 굴리면, 예전의 그 뱀처럼 교활한 이현이 다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최이현입니다. 출석요구서, 확인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버석하게 들렸다.

“내일 오전 열 시, 수사과 강력팀으로 오시면 됩니다. 신분증 지참하시고요. 참고인 조사입니다.”


참고인.


참으로 가볍고 무책임한 단어였다. 그러나 법전에서는 가장 가벼운 단어가 현실에서는 인간의 숨통을 끊는 가장 예리한 칼이 되기도 한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이현의 손끝이 파블로프의 개처럼 다시 경련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더 걸어 알리바이를 맞추고 싶었다. 방어막을 겹겹이 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질끈 감고 휴대폰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꺼버리면, 적어도 제 더러운 습관이 먼저 달려 나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으리라.




밤새 해원의 바다는 미친 듯이 포효했다.

파도 소리가 창틀을 부술 듯 커질수록, 역설적으로 수도원의 고요는 사람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었다.

새벽, 첫 종이 울리기도 전에 이현은 눈을 떴다.


세면대에서 밤새 식은땀에 절은 얼굴을 씻어냈다. 찬물이 얼굴을 때렸지만, 어제처럼 치부가 발가벗겨지는 두려움의 차가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단두대 앞에 선 자의 서늘한 각성에 가까웠다.


어스름한 정문 앞에서 원장 신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는 이현의 행색을 훑어보더니 군더더기 없이 말했다.


“아우구스티노 형제. 여호수아 형제와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피를 확인시켜 주는 인사말에 목에 무엇이 걸린 듯 먹먹해졌다.


이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 한 번이, 오늘 그가 세상에 바치는 첫 번째 출석부 같았다. 수도원 문을 나서는 순간, 공기의 질감이 확연히 달라졌다.


산밑의 공기는 사람의 등을 떠민다. 빨리 걸어라, 빨리 대답해라, 빨리 네 몫의 변명을 챙겨라. 이현은 그 속도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고 낡은 묵주를 꽉 틀어쥐었다. 손끝이 조작을 위해 굽어들려는 찰나마다, 거친 나무 알갱이가 살갗을 찌르며 그의 죄를 상기시켰다.


버스는 젖은 뱀처럼 구불구불한 빗길을 느리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바다가 멀어지고, 산등성이가 사라지고, 천박한 네온사인과 낡은 읍내의 간판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해원천의 탁한 물줄기가 보였다. 해원은 늘 그 자리에 시궁창처럼 고여 있었다. 이현이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사람의 땅, 사람의 피비린내, 그리고 그가 저지른 죄의 구덩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해원경찰서는 우스울 만치 작고 초라한 슬래브 건물이었다. 비에 젖은 태극기가 국기 게양대 밧줄에 목을 맨 듯 축 늘어져 있었다. 건물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쏟아질 말들의 무게가 사람을 압사시킬 테니까. 조사실에서 내뱉은 혀끝의 말들은 차가운 조서에 잉크로 박제되고, 그 기록은 기어이 한 인간의 숨통을 끊어놓을 것이다.


자동문 앞에서 이현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도망치기 위한 주저함이 아니었다. 발밑이 꺼지는 벼랑 끝에서, 어떻게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 서기 위한 필사적인 호흡이었다.


그는 속으로 짐승처럼 앓으며 아주 작게 읊조렸다.


‘주님….’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한 그 한마디는, 백 마디의 화려한 기도문보다 뜨겁고 참담했다. 그 뜨거움만이 오늘 그가 유일하게 쥘 수 있는 정직함이었다.


이현은 기어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창백하고 폭력적인 형광등 불빛이 그의 동공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로비의 공기는 소독약의 매캐함과 종이 특유의 건조한 냄새로 절어 있었다. 해원장의 찌든 담배 냄새와는 결이 달랐지만, 결코 덜 폭력적이지 않았다. 서류의 냄새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인간의 뼈와 살을 발라내는 법사장의 냄새였으므로.


접수대 너머,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있던 형사가 고개를 들었다. 무감각하고 닳고 닳은 전형적인 사냥개의 눈빛.


“최이현 씨?”


이현은 숨을 멈추고, 입술을 뗐다.

“예.”


그 짧은 한 글자가, 오늘 그가 속세의 심판대 앞에서 토해낸 첫 고백이었다.

스스로 토해내지 않은 죄는, 기어코 세상에 멱살이 잡혀 강요받는 법이다. 그리고 이제, 영원히 묻고 싶었던 피 묻은 진실들이 저 형광등 불빛 아래로 속절없이 끌려 나올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