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2장 — 매화 아래의 목줄

by 진동길

12장 — 매화 아래의 목줄

2000년 3월 14일 밤–3월 15일 새벽 / 경남 해원
(동시에, 서울에서는 이현이 유라를 만나고 있었다.)



2000년 3월, 해원 땅에는 어김없이 매화가 피었다.
매화는 늘 먼저 피었다. 겨울이 아직 땅속에서 손을 놓지 않았는데도, 매화는 제 몸부터 내놓고 망울을 터뜨렸다. 해원 사람들은 그걸 두고 “성질 급한 꽃”이라 했지만, 급한 것은 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이었다. 겨울을 버텼다는 말은 봄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고, 받아야 한다는 말에는 늘 빚이 섞였다. 봄을 빚으로 받는 동네에서, 매화는 빚독촉장처럼 먼저 왔다.


해원의 매화는 예쁘게만 피지 않았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바다의 비릿함을 실어오면 꽃잎은 잠깐 빛나고 곧 젖었다. 젖은 꽃잎은 무게를 얻고, 무게를 얻은 꽃잎은 떨어질 때 더 깊이 박혔다. 떨어진 꽃잎이 흙에 박히면, 사람들은 그 자리에 봄이 아니라 피가 스민 줄 착각한다. 흙이 비릿한 날에는 착각이 쉬웠다. 착각이 쉬운 날에는, 사람의 마음도 쉽게 방향을 잃는다.


그날 밤, 매화는 바람에 찢기고 있었다.
그리고 해원의 어느 그림자도—찢긴 꽃잎처럼—제 삶을 찢어 쥐고 있었다.




강수만은 산길 아래 공중전화를 찾았다.
사흘 전, 수도원 담장 아래에서 이현을 마주친 뒤부터 그의 몸은 제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버릇을 얻었다. 읍내로 내려오는 내내 남의 발소리는 사라지고 자기 것만 남았다. 남의 발소리가 사라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대개 사람이 자기 속을 들키기 싫어 더 조용해지는 날이다. 조용해지면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사람은 늘 그 순진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속인다.


하지만 조용해진다고 속이 조용해지는 건 아니었다.
수만의 안주머니 속에는 도장과 봉투가 있었다. 손바닥만 한 것들이 제 몸을 부딪치지 않는데도, 수만의 귀에는 계속 부딪치고 있었다. 목줄을 쥔 자는 조용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목줄을 처음 쥔 자의 속은 오히려 시끄럽다. 쥔 것이 너무 커서, 심장이 먼저 떠들기 때문이다.


공중전화는 시장통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 낮에도 사람들이 잘 돌아보지 않는 곳에 있었다.
보지 않는 자리에서 말이 오간다. 보지 않는 자리에서 결심이 만들어진다. 결심은 대개 남의 눈을 피해 자란다.


수만은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눌렀다.
외운 번호가 아니었다. 손가락이 먼저 외우고 있었다. 어떤 번호는 머리보다 먼저 손끝에 박힌다. 손끝에 박힌 것은 대개 사람을 좋은 데로 데려가지 않는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숨소리가 먼저 왔다. 말보다 먼저 오는 숨은 정직했다.
그리고 여자가 말했다.


“나야.”


목소리는 낮았고, 낮으면서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목소리는 사람을 밀어붙인다. 빈 만큼 상대가 채우게 되니까.

수만은 목을 한 번 삼켰다.


“예.”


“길게 말하지 마.”

여자는 숨 쉬듯 말했다.

“피면 져. 짧게.”


짧게.
그 단어가 수만의 목덜미를 눌렀다. 이현의 말도 짧았고, 강 형사의 ‘딸깍’도 짧았다. 짧은 것들은 사람을 오래 끌고 간다. 끝을 내지 않고, 끝을 미루기 때문에.


수만이 낮게 말했다.


“도장… 챙겼심더.”


“유언장도.”

여자는 묻지 않으면서 확인했다.


“예.”


잠깐 침묵이 왔다.

수만은 그 침묵이 질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질문이 아니었다. 여자는 묻는 대신, 던지고 싶어 했다. 묻는 순간 관계가 생기고, 관계가 생기면 책임이 따라오니까. 여자는 책임을 싫어했다. 책임을 싫어하는 사람은 늘 명령을 사랑한다.


“종이는.”

여자가 말했다.


수만의 손이 수화기 아래에서 움찔했다.
수화기를 쥔 억센 손등 위로, 오래전 해원장 집의 깊은 어둠 속에서 그의 목덜미를 감아쥐던 그 여자의 손이—차갑고 매끈했던 그 손가락의 감촉이—느닷없이 되살아났다. 뱀처럼이라기보다, 젖은 끈처럼. 한 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예. 종이요.”


종이.
얇아서 더 쉽게 사람을 대신하는 것.
사람을 대신한다는 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다는 뜻이고, 그 구멍이 생기는 순간 죄는 숨을 쉰다. 죄는 늘, 숨 쉴 구멍이 있는 쪽에서 오래 산다.


“지금 받으러 갑니더.”

수만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빨리 말했다. 빨리 말하는 건 복종의 습관이었다. 습관은 사람의 뼈에 붙어 산다.

여자는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그 여자의 방식이었다. 묻지 않으면 상대가 스스로 움직인다. 스스로 움직인다는 착각이 가장 안전한 목줄이다.


그리고 여자는 마지막에, 아무렇지 않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매화… 많이 지더라.”


그 말이 뜬금없어 보이는데도 수만은 알았다.
날씨 이야기가 아니었다. 떨어질 것들이 떨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떨어져야 끝나는 것, 떨어져야 시작되는 것. 떨어지지 않으면 더 크게 썩는 것.


수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뚝.


수만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참을 서 있었다.
공중전화 유리에 자기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 얼굴이라기보다 어두운 형체였다. 해원장 집안의 그림자로 살아온 스물여섯의 형체. 그는 도장과 봉투를 손에 넣는 순간, 자기가 주인이 된 줄 알았다. 그런데 방금 전 목소리는 그 믿음에 찬물을 부었다.
주인이 되었다고 믿는 순간, 사람은 더 쉽게 누군가의 말에 묶인다. 주인은 외롭고, 외로움은 다시 줄을 찾는다.


수만은 안주머니를 눌렀다.
도장과 봉투가 거기 있었다. 그러나 더 확실하게 거기 있는 것은 방금 전 목소리였다. 사람은 물건보다 목소리에 먼저 길든다.




해원 읍내는 밤이 되면 낮보다 더 단정해졌다.
낮에는 말이 길어서 거리가 지저분해지고, 밤에는 말이 짧아져서 거리가 깨끗해 보인다. 깨끗해 보이는 건 죄를 숨기기 좋다. 죄는 늘 깨끗한 얼굴을 빌려 산다. 단정한 얼굴은 의심을 덜 받으니까.


‘남도법무사’ 간판 불이 반쯤 꺼져 있었다.
반쯤 꺼진 불은 닫혔다는 뜻이 아니었다. 밤의 불은 늘 그렇게 켜졌다. 다 켜면 눈에 띄고, 다 끄면 돈이 안 움직인다. 돈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되, 완전한 어둠은 싫어했다. 서로 얼굴을 못 읽으면 서로를 못 믿는다. 믿지 못하면 계약이 안 된다.


수만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종이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
잉크 냄새, 풀 냄새, 사람 손때의 비릿함. 법무사 사무실은 늘 종이로 숨 쉬었다. 종이가 숨 쉬면, 사람은 숨이 막혔다. 종이는 사람을 대신하려고 태어난 물건이니까.


사내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사람 얼굴이라기보다 항목처럼 납작한 얼굴. 이름, 도장, 날짜, 자리—그런 것으로 먹고사는 얼굴이었다.


“늦었네.”
사내가 말했다.


수만은 ‘늦다’는 말을 삼켰다.
늦다에는 누군가의 시간표가 들어 있다. 시간표는 늘 다른 사람이 만든다. 다른 사람이 만든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순간, 독립은 끝난다. 그런데도 수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것이 가장 편했기 때문이다. 편한 것은 늘 값이 비싸다. 값은 나중에 목으로 치른다.


사내가 서랍을 열어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 위로 밀었다.
봉투도, 묶음도 아니었다. 한 장이었다.
깨끗한 종이 한 장.


수만은 깨끗한 것이 왜 무서운지 안다.
깨끗한 종이는 어디에든 찍힐 수 있다. 찍히는 순간, 사람을 대신한다. 대신한다는 것은—사람이 책임에서 한 발 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한 발 빠지는 자리가 가장 악한 자리라는 걸, 수만은 아직 모른다. 몰라도 된다 생각한다. 모르는 것이 수만의 특권이자 저주였다.


사내가 볼펜으로 종이 위를 툭툭 짚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는 비워 놨다.”


비워 둔 자리는 사람을 끌어당긴다.
빈자리는 채워야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채워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은 이미 움직인다.


수만이 물었다.

“이거… 우짜는 겁니꺼.”


사내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게 만드는 종이지.”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수만은 잠깐 숨이 막혔다.
해원장 집안에서는 늘 그랬다. 하인이 주인을 대신하고, 자식이 아비를 대신하고, 종이가 사람을 대신한다. 대신하는 것들의 끝에는 늘 책임이 없는 얼굴이 남는다. 책임이 없는 얼굴은 오래 산다. 오래 살아남은 얼굴들이 이 동네를 만들었다.


사내가 덧붙였다.

“짧게 해. 길면 탈 난다.”


수만은 그 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버렸다.
공중전화 속 목소리의 결. ‘매화’라고 말하던 숨.
그 숨이 이제는 법무사 사내의 혀끝에도 붙어 있었다. 숨이 한 사람에게만 붙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수만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영숙의 목소리는 ‘관계’가 아니라 ‘구조’였다.


수만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가벼웠다. 가벼운데 손끝은 무거웠다. 가벼운 것이 손끝을 무겁게 만드는 순간부터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쥐었는지 안다.


그는 종이를 안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도장과 유언장 옆에 종이가 들어갔다. 목줄 옆에 다른 목줄이 들어간 셈이었다. 목줄은 하나면 불편하지만, 둘이면 더 안전해 보인다. 안전하다고 믿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문을 나서려는데 사내가 툭 던졌다.


“서울서 내려오는 버스, 오늘 늦을끼다.”


수만의 발이 잠깐 멎었다.
늦다.

늦으면 엇박자가 난다. 엇박자가 나면 틈이 생긴다.


틈은 기회처럼 보인다.
그러나 틈은 입을 벌린다.
입을 벌리기 전까진 늘 달콤하다.


수만은 골목으로 내려가며 매화꽃잎이 신발 끝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걸 보았다.
붙었다 떨어지는 것들. 남지 않는 것들. 남지 않는 것들이 사람을 더 오래 붙잡는다. 기억은 늘 남지 않은 것에서 시작되니까.




2000년 3월 15일 새벽 / 해원읍 버스터미널 앞


해원읍 버스터미널은 새벽에도 잠들지 않았다.
역이 없는 동네에서 터미널은 목구멍 같은 자리다. 숨이 드나들고 돈이 드나들고 소문이 드나든다. 무엇보다 사람이 드나든다. 사람을 기다리기 좋은 자리라는 뜻이다.


수만은 터미널 맞은편 포장마차 뒤쪽에 섰다.
정면으로 서지 않았다. 정면은 습관이다. 습관은 들키기 쉽다. 수만은 오늘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들키면 ‘주인’이 아니라 ‘전달자’가 되니까.


안주머니 속에서 종이 한 장이 살짝 구겨졌다.
구겨지는 소리는 작았는데 수만의 속에서는 크게 났다. 마음이 소리를 키웠다. 마음이 커지면 사람은 실수한다. 수만은 실수를 가장 싫어했다. 해원장 밑에서 살아남는 법은 실수를 싫어하는 법부터 배우는 일이었다.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은 늘 늦다. 늦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제때 오지 않는다. 제때 오면 구조가 흔들리니까. 구조는 언제나 한 박자 늦게 사람을 데려다 놓는다.


수만은 안주머니를 눌렀다.
도장. 유언장. 종이 한 장.
그 셋이 그의 가슴 위에서 서로를 눌렀다.


그 순간 수만은 아주 짧게 생각했다.


‘내가 진짜로 독립했나.’


생각은 길지 않았다.
길게 생각하면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면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를 찾는다. 수만은 이미 목소리를 들었다. 한 번 들은 목소리는 두 번 듣게 된다. 그게 목줄이다.


바람이 불었다.
매화꽃잎 하나가 공중에서 잠깐 맴돌다가 수만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젖은 꽃잎은 잠깐 붙어 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남지 않았다.


남지 않는 것들이 사람을 더 오래 붙잡는다.
기억은 늘 남지 않은 것에서 시작되니까.


수만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안주머니를 누른 채로, 버스가 올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누가 먼저 움직였는지, 누가 누구의 목줄을 당기고 있는지—그 답이 곧 내려올 것임을 알면서도, 알지 못한 척했다.


알지 못한 척하는 것이, 그가 가장 오래 살아온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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