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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네 Sep 26. 2019

여기가 어디야? 길 잃어버렸어!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버스 타고 나간 날

   

싱가포르 한달살기를 시작한 지 3일 차인 오늘은 1월 1일, 새해 첫날이자 일요일이다.

관광지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별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다. 이사한 다음 날이기도 해 빡빡한 일정을 정해놓고 바쁘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세상 구경하며,
우리만의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여유를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목적지를 딱히 정해 놓지 않고 대충 '오차드로드 근처 가서 구경하자'고만 정하고, 집을 나섰다. 우리집에서 오차드로드를 가려면 중간에 한 번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미리 몇 번째에서 내려야 하는지 알아봤지만, 버스 내에서는 정류장 안내가 나오지 않는다.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을 놓칠까 봐 버스에 오르자마자 긴장하며 버스 정류장을 하나하나 세었다. 그런데 중간에 서지 않고 지나가는 정류장도 있다. 여기가 몇 번째인지 헛갈린다. 버스가 정류장에 잠시 멈췄을 때 버스 밖 정류장 표지판에 적힌 정류장 이름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너무 작은 글씨 때문에 읽기가 어렵다. 가까스로 버스 밖 정류장에 작게 적혀있는 정류소 이름을 확인하고 내렸다.

 

그리고 내린 곳에서 갈아탈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어... 그런데, 우리가 타야 하는 버스가 저 쪽으로 간다. 아이들과 버스가 지나간 곳으로 찻 길을 건너갔다.

어... 그런데, 이번엔 버스가 저쪽으로 간다.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뛰어!”

 두세 번 찻길을 건너며 왔다 갔다 했다. 도대체 어디서 타는 건지 모르겠다. 이리 가면 버스가 저쪽에서 지나가고, 저쪽으로 가면, 버스가 이쪽으로 지나간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했지만 모르겠다.

  

아이들은 엄마가 당황해하며 잘 몰라 계속 왔다 갔다 건너 다니게 하는 것도 재미있는지, 즐겁게 웃는다. 왔다 갔다 몇 번을 반복한 끝에 가까스로 버스를 탔다. 그런데 여기가 몇 번째 정류장인지 숫자를 세다가 또 놓쳤다. 예전에 왔던 기억을 더듬어서 버스 밖에 보이는 건물들 이름과 도로 표지만 이름을 살폈다.

  

아... 모르겠다.


내가 들어봤던 이름의 호텔이 보인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시내랑 그렇게 멀 것 같지 않아 급하게 내렸다.

어... 그런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켰는데, 방향이 빙글빙글 돈다. 화살표를 따라 나도 빙글빙글 도는 동안 아이들은 제각각 놀고 있다. 안 되겠다. 아이들을 살피면서, 위치를 파악하려고 하니, 오늘이 다가도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내가 지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두 아이에게 당부했다.


  “너희 둘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 너희가 걱정돼서 엄마가 길을 찾는데 집중하기가 어려워. 그러니까 앞으로 엄마가 지도를 보면, 너희 둘은 꼭 손 잡고, 엄마 바로 뒤를 잘 따라와야 해. 혹시라도 엄마가 멀어지면, 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엄마가 찾아 갈게."


우리 셋은 길을 찾을 때 서로 도와야 하는 한 팀이다. ”


당부한 대로 잘 따라와 줄 거라 아이 둘을 믿고 나는 현재 위치를 파악해 지도만 보며, 1시간 정도 걸어 오차드로드를 드디어 만났다. 이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안심이다.


이제, 어디로 갈까? 많은 건물들 중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

대형 쇼핑몰들 중에서 한 군데를 골라 무작정 들어갔다. 들어가면 분명하게 가야 할 길이 보이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쇼핑몰 안도 길이 여러 갈래고 너무나 복잡하다. 딱히 목적을 정하지 않았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1시간 넘게 걸었더니 배도 고프고, 복잡한 길 안에 있으니 빙글빙글 어지러워 정신을 못 차리겠다.

쇼핑몰 1층에 카페, 식당들이 많다. 오픈 테라스처럼 꾸며져 있는데, 너무 많으니 메뉴가 뭔지 살피기도 싫고 그저 현기증이 난다. 그때, 내 눈에 내가 아는 “츄러스” 그림이 들어왔다. 글자를 읽기도 싫어 그림에 보이는, 초콜릿에 찍어 먹는 츄러스를 시켰다. 아이들이 먹는 동안 숨 좀 고르니, 정신이 좀 든다. 이제야 쇼핑몰 안 상점들도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 눈을 사로잡은 알록달록 화려한 색깔의 캐릭터 샵 구경도 하고, 층층이 천천히 둘러보았다. 쇼핑이 목적이 아닌 우리 셋에게는 딱히 할 것이 없는 곳인 것 같아 쇼핑몰 밖으로 나왔다.


이제 또 어디로 가지?


해야 할 일이 생각이 나지 않을 때마다 나는 휴대폰 캘린더와 메모장을 보고 확인한다. 깜빡 쟁이라 어딘가에 적어둬야 하는데, 메모지에 적으면 그 메모지 찾느라 허둥지둥 대고, 정작 메모지 찾기도 전에 지치고 곤혹을 치른 경험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다. 휴대폰을 찾느라 자주 애먹기도 하지만,  메모지에 적는 것보다는 그나마 외출 시 휴대하고 다니는 휴대폰 메모장을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내 휴대폰 "싱가포르"라고 적힌 메모장에는 가장 중요한 집주소, 집에서 도서관까지 가는 방법, 싱가포르에서 사용할 생활비 엑셀만 적혀 있다. 이번이 싱가포르 세 번째 방문이라 웬만한 관광지는 예전 방문에서 다 둘러보기도 했지만, 한 달 살러 온 만큼 관광지 돌며 쇼핑하는 3박 4일 여행 일정과 같아서는 안된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번잡한 여행이 아니라, 현지인의 삶 그대로를 조금이라도 엿보고 느껴보는 여행을 하겠다고 생각했기에 관광지를 검색하지도, 해야 할 것들을 정하지도 않았다.


익숙지 않은 풍경에 의지해 안내 방송이 없는 버스를 타고 나온 첫나들이이다. 길을 헤매고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 보니, 여유를 느끼기보다 당황스럽다. 무작정 시내로 나오긴 했는데, 이제 어디 가야 할지 벌써 막막해지니, 핸드폰 지도에 의지해 발길 닿는 곳에 간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갈 만한 곳이 있나 두리번거리는데, 길 건너편에 관광안내소가 보인다. 관광안내소에 들어가 영문, 한글로 작성된 모든 관광 안내자료를 다 받고, 몇 가지 추천도 받았다. 그중 아이들은 눈으로 덮인 이글루 사진에 매료됐다.

   “엄마, 우리 여기 이글루 꼭 가보자!”고 한다. 너무나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눈빛이 마음에 걸리 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금 폭설이라 돌아가면 만날 수 있는 눈을, 싱가포르까지 와서, 그것도 인공으로 조성해 놓은 눈을 보러 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따뜻한 나라에 와서 여기서 할 수 있는 경험들을 즐기고 가야지 않을 까란 생각에 일단 “나중에 천천히 고민해 보자”고 말하고 넘겼다.


안내 책자와 지도를 받아 나오니,
왠지 든든해진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전이라 아직까지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예쁘게 꾸며져 있는 건물 안팎을 구경했다. 상점들은 개학 기념으로 크게 세일 중이다. 뭔가에 홀린 듯 예상에 없던 아이들 옷 쇼핑을 했다. 몇 개 살만한 것을 골라 계산대로 가니, 직원이 구매 금액이 100달러 이상되면, 여행자에 대한 세금 환급이 가능하다고 한다. 결국 더 골라 100달러를 조금 넘겼다. 딱히 필요하지 않았지만, 세일하는 아이들 옷을 보니, 사고 싶은 마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일주일 미만의 단기 여행이거나, 끼니와 교통을 알아서 해결해 주는 패키지여행이라면야 잠깐의 쇼핑도 괜찮겠지만 우리는 앞으로 한 달의 생활을 해야 하는 데 생각 없이 쇼핑할 수는 없었다.

더 여기 머물면 안 될 것 같아 집에 가는 버스를 찾아 걸었다. 많은 쇼핑몰만큼 길 건너는 것도 복잡하다. 큰 찻길에 횡당보도가 있는 방향도 있지만 없는 방향도 있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쇼핑몰과 쇼핑몰 사이, 지하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니 자하로 내려가라고 한다. 지하 도로로 내려갔는데, 출구가 너무 많다. 여긴 지 저긴지 버스 정류소를 찾아 몇 번 다른 출구로 나갔다 들어왔다 반복했는데, 아직 버스 정류소를 찾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과 복잡한 거리에 정신도 없고 너무 힘들다.

다른 출구로 다시 올라왔는데, 버스정류소를 못 찾겠다. 다시 지하로 내려왔는데, 빵 냄새가 난다. 맛있는 빵 냄새에 이끌려 잠시 쉬기로 했다. 빵을 먹으니, 걷고 걸어 무거워진 다리도 조금은 가벼워지고, 세일과 복잡한 길에 홀렸던 정신도 조금 돌아온다.


정신이 돌아오니, 첫나들이부터 계획 없이 지출한 것에 자책감이 든다. 내 옆에서 통제해 줄 다른 어른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 한 달 생활이 걱정된다. 얼마 안 되는 돈일 수도 있겠지만, 우린 여기 한 달을 생활하러 온 거지 쇼핑하러 온 여행객이 아닌데, 더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도 다잡고자 하루 사용 가능한 생활비를 계산했다.


  “얘들아, 오늘처럼 우리 이렇게 쇼핑하고, 계획 없이 살면 남은 한 달을 못 살아.”


아이들도 경제관념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말을 했는데, 둘째는 “못 산다”는 말에 심각해진다.


  “그럼 우리 앞으로 굶어야 해?”

  “아니, 쌀은 한국에서 아빠가 사준 거 가져와서 굶진 않아도 되는 데, 물도 못 사 먹고, 과일도 못 사 먹어. 그러니 우리 이제 여기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사지 말자.”

버스 정류장을 못 찾고 계속 걸어, 지친 아이들은 우버를 타고 싶어 했지만, 오늘은 더 이상 돈을 쓰면 안 되겠다고 말하니 아이들도 수긍한다. 나와 아이들은 다시 버스 정류장을 찾아 나섰다. 드디어 찾아 버스를 탔다.


역시나 버스 안에는 정류장 안내가 없다. 어디서 내려야 할지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 지도로 현재의 위치를 계속 확인했다. 내려야 할 정류장이 몇 번째 정류장인지, 어느 정류장인지 버스 앱으로 확인을 해 두었는데, 버스가 서지 않고 지나치는 정류장도 있어서 지금 여기가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대충 집 근처인 것 같아 내렸다.


  어... 그런데, 여기가 어딘지 도통 감이 안 온다.


핸드폰 지도상 현재 위치가 집과 가까운 것 같아 보여서 내렸는데, 주변 건물을 봐도, 여기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다. 지도의 화살표 방향도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

그렇게 10여분 지났나... 충동구매로 무거운 쇼핑 봉지까지 들고 빙빙 제자리에서 돌고만 있으니 너무 막막하다. 아이들은 핸드폰 지도의 화살표를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장대 같은 비가 내린다. 맨 살을 아프게 때리는 정말 ‘장대’ 비다. 스콜에 대비해 우산을 가방에 챙기긴 했는데, 나 혼자 배낭을 메고 다니니 무겁기도 하고, 구름 별로 없는 밝은 날씨에 와봤자 금세 그치겠지 하는 마음에 하나만 챙겼다. 우산 하나로는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비를 셋이 피할 수 없어, 차양막이 쳐진 버스 정류장에서 비가 지나가길 기다리기로 했다.      


  30여분이 지났을 까... 비가 안 그친다.


지도상으로는 집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 것 같은데 주변 건물들은 공사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어 방향을 종잡기 더 어렵다. 괜히 섣부르게 걸어가면 집에서 더 멀어질 것 같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니 머리만 가린 차양막 옆으로 비가 다 튀어 팔, 다리뿐만 아니라, 옷까지 젖었다.


너무 춥다. 아직 오후 4시도 안되었는데, 햇빛은 사라지고 먹구름만 가득하다. 점점 더 어두워져 캄캄해졌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다.

지도 상으로 조금만 앞으로 가면 우리나라 지하철과 비슷한 MRT역이 있다. 방향도 모르고 비도 계속 오는 상황에서 집에 걸어가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두 아이 우산을 씌워 MRT역으로 갔다.


“엄마, 역 안으로 들어가?”

“아니, 아직.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 확인하고 타야 해.”

 

노선도가 낯설다. 노선도를 한 참을 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알파벳으로 쓰여있긴 하지만, 역 이름들이 말레이어로 된 것이 많아 몇 번을 읽어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집 근처 MRT역은 싱가포르 오기 전부터 10번 넘게 읽고 읽어 어렴풋이 외웠는데, 낯선 지명들을 보니 당황스럽다.


비에 젖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안쓰럽다.


이제부터 절약하기로 했지만, 결국 우버를 불렀다. 처음 이용하는 우버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비 속에서 내가 부른 우버 차량이 오는지 계속 주시했다. 계속 쏟아지는 비로 도로도 잠겼다. 이미 차량은 도착했다는데, 안 보인다. 우버 기사분과 통화를 시도해 가까스로 탔다.


오래 걷고, 길 잃어 헤매다 비까지 맞아 마음도 몸도 휴식이 필요하다. 바로 따뜻한 집에 가서 쉬고 싶다. 하지만 마실물이 없어 마트로 갔다.

힘들게 우버를 타고 보니... 이런... 내가 헤맨 곳에서 마트까지 3분도 안 되는 곳이다. 여기서 거의 1시간을 당황하며 헤맸는데, 약간은 허망한 기분이 든다. 마트에서 장보고 나오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해가 쨍쨍하다. 세상은 다시 밝아지고, 후덥지근해졌다. 길 잃고 비 맞아 축축해진 우리 몸과 마음도 조금 마른 것 같다.


햇볕을 받으며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아이들은 싱글벙글 웃는다.


지도 보면서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돈 것도, 억수 같은 비를 맞은 것도, 그리고 엄마가 결국 우버를 불러준 것도 아이들은 경험해보지 않았던 즐거움인지 신났다. 엄마는 당황하고 울고 싶은 서러운 하루였지만, 웃으며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보니 뜻하지 않은 추억을 만든 것 같아 위로가 된다.

아이들의 웃는 표정을 보니, 그동안 좁고 어둡고 답답한 좁은 길로 느꼈던 '엄마'의 길이 밝고 푸르른 넓은 길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익숙지 않은 낯선 도시에 처음으로 버스 타고 나온 오늘, 처음 엄마가 된 나의 마음을 생각해 보게 한다.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엄마가 돼 본 적 없기에, 처음 경험하는 일들로 당황스러웠다. 나만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고민하고 걱정하며 밤을 여러날 새웠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애초가 잃어버릴 길도 없는데, 그저 방황했던 엄마의 길이 이제 조금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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