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조금씩 그리고 온전히 우리만의 시간 갖기
어제 버스 타고 나갔다 길 잃고 좀 헤맸더니, 막연했던 낯 선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오히려 수그러든 것 같다. 우리 셋이서 싱가포르에 있다는 것이 현실이 되었고, 어느 정도 마음으로 익숙해진 것 같다.
내일은 우리가 싱가포르에서 하기로 정한 세 가지 중 한 가지, ‘리버사파리 가기’를 하기로 해서,
결혼해 남편과 내 짐을 합쳤을 때, 우리 집에 가장 많은 것이 책이었다.
그동안 박사 논문이 끝나지 않아 20여 년간 정리하지 못하고 아까워 버리지 못한 전공책들, 소설책 등등 아이들 책이 아니라 정리하지 못한 엄마, 아빠 책이 많았었다. 이 무거운 책들 때문에 결혼하고 몇 번 이사할 때마다 엄청 힘들었었다. 그 이후 책을 살 때 많이 신중해졌다. 덕분에 아이들 책은 집에 별로 없다. 집에 아이들이 읽을 책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이들도 다양한 책이 많은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책들에 둘러싸여 특유의 책 냄새를 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며칠째 나를 힘들게 하던 만성 변비가 해소되기도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아이들도 나도 도서관을 좋아해서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도서관에 다닌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한달살이를 꿈꾸면서 당연히 도서관에서 책 읽는 모습을 항상 떠올렸다.
한 달 동안 뭘 할지 구체적 계획을 세우진 않았지만, 당연히 싱가포르 집을 계약하면서, 집 근처 도서관 위치를 제일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딱히 할 일들을 정하지 않았으니 도서관 무료 수업이 있으면 참여하려고, 싱가포르 도서관 소식받기도 신청했었다.
그제는 이사하느라, 어제는 휴관이라 실컷 보지 못한 도서관을 드디어 오늘 가기로 했다. 오늘 오전에 내린 비로 땅도 많이 젖어있고, 도서관 가기 애매한 시간이다. 지금 도서관에 가면 배가 고파 충분히 도서관에 있지 못하고 어설프게 있다 올 것 같아 점심 먹고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내가 점심을 준비하는 사이 아이들은 6층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우리나라 실내 수영장의 레인 하나보다 작은 수영장이지만, 우리 아이들 외에는 아무도 이용을 하지 않으니, 두 아이 이용하기에 충분하다. 집에서 수영복을 입고 올라가 두 아이 전용 수영장에서 노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조리도구를 찾아보았다.
첫날 호텔에서 조식으로 준비해 준 현지 도시락의 느끼한 충격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아 빵 외에 현지 음식을 사 먹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아직 한달살기 초반인데 탈 나면 안 되니, 웬만하면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맛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싱크대 문을 여는 것이 두려워 집안의 조리도구를 살피지 못했다. 이 집에 온 첫날, 아직 청소 전 이긴 했지만, 죽어있는 작은 벌레들 때문에 많이 놀랬었다. 메이드가 청소를 하고 간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에 바로 띄던 벌레들은 사라졌으나, 누가 쓰던 매트를 사용하기 찜찜해서 현관 입구에 깔려 있는 매트를 치우려고 들었는데 먼지와 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계속 헛구역질이 나와 숨을 쉬기 어려웠다. 겨우 겨우 매트를 한쪽으로 치웠었다. 물과 몇 가지 과일을 사 와 냉장고를 열었을 때도 한 참을 정리하고, 벌레들을 치워야 했다. 그래서 더욱 싱크대 문을 열어 보는 것이 두려웠고, 조리도구를 살피고 싶지 않았다. 어제까지는 비행기에서 받은 햇반과 고추장, 간편식 그리고 여기서 산 빵으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했는데, 따로 한국에서 뭘 챙겨 오지 않았으니 이제 더 이상 끼니를 때워줄 간편식이 없다. 앞으로 열흘 넘게 이 집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싱크대 안을 살펴야 한다.
심호흡을 하고, ‘벌레’나 ‘곰팡이’ 등에 놀라지 않을 각오도 하고 싱크대 문을 열었다.
냄비 하나 없다. 대신 압력솥 하나, 프라이팬 하나 나왔다. 그리고 밥그릇 두 개, 접시 두 개가 있다. 젓가락은 없고, 숟가락 두 개, 뒤집게 하나 나왔다.
한국에서도 써본 적 없는 압력솥으로 밥을 하는 수밖에 없다.
설명서를 찾아도 없고, 뚜껑에 일본어로만 적혀있어 난감하지만, 아이들을 굶길 수 없으니 도전해 볼 수밖에.
수영장에 가기 전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했기에 쌀을 불리지도 않고, 압력솥에 씻은 쌀을 담아 불을 켰다. 냄새와 소리로 적당히 불을 조절하다, 약간 탄 냄새도 나고, 물기가 없는 것 같아 불을 껐다. 아무리 압력솥이지만, 불에 올린 지 15분 정도밖에 안돼서 설 익었을 것 같다. 뚜껑을 열어 확인해 보고 싶지만, 괜히 뚜껑을 열다가 폭발하는 건 아닌 지 걱정도 되고 두렵다. 불을 껐지만 쉽게 열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다 심호흡하고, 조심스레 김을 빼며 열었다.
그런데 밥이!!
윤기가 흐르고 맛있어 보인다. 숟가락으로 조금 떼서 먹어 보니, 맛있다!
적당히 누룽지도 생겨서 밥 먹고 누룽지까지 끓여 먹었다. 덕분에 첫날의 도시락 때문에 느글느글 했던 속도 싹 씻겨져 개운해졌다. 아이들도 오랜만에 먹는 따뜻한 밥에 신났다. 속이 든든해지니, 긴장했던 마음도 풀리는 것 같다.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는 압력솥으로 맛있는 밥을 했다. 또 하나의 시험을 통과한 것 같다. 해보지 않은 낯선 것에 대한 막연했던 두려움이 사그라들고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진다. 먹고 나니 괜히 마음도 든든해진다. 막상 해보면 걱정했던 것보다 별거 아닌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늘 시작하기 전, 걱정과 두려움으로 시작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또 새로운 도전을 하고 나니 괜히 뿌듯해지고 남은 한달살이에 대한 기대감도 커진다.
우리 아파트 옆에 사당도 있고, 두리안 전문 과일 집도 있는데 그동안은 긴장한 탓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니 두려움 때문에 의도적으로 보기를 피했던 것 같다. 오늘에서야 사당도 좀 기웃기웃해보고, 두리안도 유심히 살펴봤다.
천천히 동네를 살피며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에 다다라 아이들은 입구가 아니라, 도서관 뒷마당의 잔디 밭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다.
"거기에 뭐가 있니?"
"엄마, 여기 개미집이 있어."
두 아이는 멈춰 서서 개미집을 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이제는 쭈그려 앉아서 구경했다. 개미가 움직이는 모습, 숭숭 뚫린 개미집의 구멍, 봉긋하게 쏟아 있는 모습 등 한참을 살펴보았다.
아이들 눈에 들어온 개미집과 도도 자매는 어떤 마음을 나눴을까? 궁금하다. 한참을 바라보며 느낀 아이들만의 그 마음 오래도록 남겠지? 개미집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에 감사했다.
남들이 보지 못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길에서 개미집을 바라보는 우리 도도 자매가 많이 느릴지 모른다. 한 달의 시간이 끝나고 한국으로 가면, 우리나라 우리 동네 다른 아이들의 모습에 다시 조급함이 생기고 불안해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지금처럼 자신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발견해 갔으면 좋겠다.
한참을 바라보다 도서관에 들어갔다.
한 글로 된 책은 하나도 없었지만, 아이들이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책 찾아보고, 읽어 본다. 당연히 글자를 제대로 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을 봐서 다행이다. 한글도 따로 학습지를 시키거나 가르치지 않아 둘째는 우리나라 나이로 7살이지만 아직 한글을 다 읽지 못하는데, 영어는 오죽할까. 초등학교 1학년, 만 7살인 언니도 따로 학습지를 하거나, 학원을 다닌 적이 없지만, 그래도 책에 대한 흥미는 정말 높아 열심히 본다.
책들을 이것저것 꺼내 읽어보고, 본인들 기준으로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 위치를 발견해 나에게 알려준다. 한참을 도서관에서 보내다가 나왔다. 도서관을 나와 마트에서 아이스크림, 물, 과일 등등 큰 봉지로 세 개 가득 샀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낯설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나씩 시도하고, 느낄 수 있는 이 시간이 감사하다. 손에 든 봉지의 무게보다 아이들과의 앞으로의 새로운 날들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