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이 에필로그
시작하지 않으면 끝을 알 수 없다.
계속 꿈만 꿨다면,
실수로 결제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아이들과 오롯이 보내는 시간을 아직도 갖지 못했을지 모른다. 어설픈 시작이었지만, 그 시작을 통해 나는 포기하고, 또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내 것을 챙기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무언가 하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니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였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하지 않으니, 아이들이 바라보는 곳,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보였다.
아이들이 선택해서 하고, 선택한 곳으로 가니,
가는 길이 쉽지 않아도 그 과정을 더 잘 버티고 참아냈다. 예상과 다른 상황이 발생해도 우리는 다시 선택할 수 있었다. 아이들 얼굴에서 더 편안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어른은 ‘혼자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내가 어른이니까, 내가 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지우는 무게에서 벗어나니 세상이 좀 더 보였다. 아이들과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인간이기에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는 진리를,
내일이 아닌 지금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얻게 되었다.
짐을 싸고, 내일의 계획을 세우고, 모든 상황을 통제하며 아이들을 케어하는 게 엄마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나서서 태연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꾹 참고 아이들에게 잘하는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힘들다고 생각되는 순간, 엄마로서 부끄럽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자괴감마저 들었다. 힘든 것 티 안 내려할수록, 혼자 다 짊어질 수 없는 현실과의 괴리감에 괴로웠다.
착각한 엄마의 모습 때문에 언어도 문화도 낯선 싱가포르에 도착하는 순간, 끝없는 극기훈련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한동안 매일 밤 울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현실을 며칠 만에 인정하고 말았다. 더 이상 ‘척’할 수 없어, ‘착각한 엄마’의 모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아이들이 보였다.
‘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내가 그어놓은 아이들과 나 사이의 경계가 보였다. 아이들에게 내가 그어 놓은 ‘경계’의 부담을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지친 마음으로,
아이들이 하는 대로,
아이들이 가는 대로 따라갔다.
내가 계획한 대로 유명한 장소에 가고, 내가 짜 놓은 일정대로 바쁘게 움직일 때보다, 아이들은 우연히 만난 분수에서 온 몸을 적실 때 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싱가포르 한달살이는, 현실을 보지 않고 목표만 세운, 어리석은 착각에 빠졌던 엄마의 모습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엄마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다.
아이들은 싱가포르 한달살이 하면서 많이 걷고, 많이 참아냈다. 그 경험을 통해 끝을 만난 시작의 설렘, 끝을 만나는 과정의 중요함을 나름대로 느꼈을 것이다. 나름의 느낌을 통해, 나의 아이들이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고, 노력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싱가포르에서의 31일은 지금, 여기, 나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주변의 모습에 흔들리고, ‘해야 한다’로 나를 속박한다. 그럴 때마다 싱가포르에서의 아이들의 웃음을 떠올리며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느끼고, 조금은 더 자유롭게 살아가려 할 것이다.
싱가포르 한달살기 경험 중,
아이들이 뽑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 Best 10
0. 루지 :
루지 louge 슬로건... “once is never enough!”에 따라 센토사 섬에 루지만 타러 몇 번을 갔다.
1. 바닷가 : 옷 입고 편하게 앉아 모래 놀이하다 물속에 들어가고, 몇 시간씩 놀다가 몰려오는 비에 속절없이 맞기도 했던 바닷가에서의 시간을 아이들은 행복했던 순간으로 꼽았다.
이스트 코스트에는 그네 놀이터도 있고 맥도널드 등 음식점이 있어 가족들이 주말 나들이로 많이 나온다.
센토사섬 탄중 비치는 다른 비치들보다 한적해 아이들과 여유롭게 놀 수 있었다. 팔라완 비치에는 아시아 대륙 최남단에 갈 수 있는 출렁다리가 있어 탐험하는 기분도 낼 수 있었다.
2. 분수 : 분수를 만나면 얼굴에 미소부터 지었다.
부의 분수, 가든스바이더베이 어린이 분수, 하버프런트에 있는 비보시티 쇼핑몰 위의 놀이터 분수대를 특히 좋아했지만, 어느 분수든 분수를 만나면 좋아했다. 우연히 만나는 그곳에서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나는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기 위해 매일 가방에 샌들, 여벌 옷, 수건을 챙겨 다녔다.
3. 사이언스 센터
아이들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사이언스 센터를 꼽았다. 여러 체험 중 두 자매가 함께 거센 바람을 맞았던 태풍체험을 특히 제일 좋아했다.
4. 놀이공원
유니버셜 스튜디오, 말레이시아의 레고랜드에서 아이들은 행복해했다.
5. 서던지리스
캐노피 워크, 헤드앤더스 브릿지 등 서던리지스를 아이들은 10시간 넘게 걸었다. 우리 셋 외에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대신 ‘원숭이 조심’ 푯말이 붙여진 울창한 숲을 지나가고, 그늘 한 점 없는 구릉지를 걷는 것은 두렵고 힘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잊지 못할 순간이라며 즐겁게 이야기한다. ‘행복의 종’을 칠 때의 성취감도 컸다.
6. 공공 도서관
편하게 뒹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어린이 공간이 있어서 좋았다. 스토리텔링 수업 참여하며, 아이들이 책 읽고 제목 써가서 스티커를 받은 것도 좋아했다.
7. 동물원
시간에 맞춰 트레일 따라다니면서 동물을 만져보고 설명을 들었다. 아이들은 리버사파리에서 배 탈 때 가장 행복해했다.
8. 차이나 타운
구경거리가 많은 차이나타운에서 아이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9. 아쿠아리움
센토사 섬의 아쿠아리움에 굉장히 많은 해파리가 있었다. 불빛 내는 다양한 해파리들을 아이들은 특히 좋아했다.
10. 중국식 정원, 일본식 정원
커다란 파충류가 돌아다니는 넓은 잔디밭, 다른 나라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빗방울을 만지며 놀았던 정자가 있는 중국식, 일본식 정원도 아이들을 행복하게 했다.
한달살이 후 원래 천성대로 나는 여전히 뭐든 열심히 하려 한다. 하지만 엄마도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 공허한 자기 다짐을 하지 않고, 슈퍼맘이 되려 하지 않았을 때 아이들이 더 행복해하는 것을 봤다.
천천히 걸어가고, 자주 멈춰 선 여행을 선택해, 뒤처지는 것 같아 때로는 초조함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가는 것보다 주체적인 판단을 하며, 독립 인격체로 살아가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내가 지치지 않아 나의 계획을 아이들에게 계속 들이밀고 종용했다면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스스로 ‘마쳤다’,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낄 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선택의 자유를 통해 더 큰 행복의 결과를 느끼게 됐다. 의견을 나누며 선택하는 과정에서 배려하는 과정을 경험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도 함께 나눴다.
참 감사한 시간이다. 그 시간을 간직하며, 지금 우리는 함께 한다. 앞으로도 우리는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을 느끼며,
우리만의 속도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