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차 싱가포르 일상
중국정원과 일본정원에 가보고 싶었다.
싱가포르 한달살이 올 때 세 군데, 유니버셜 스튜디오, 레고랜드, 리버사파리외에는 뭘 할 건지, 어딜 갈 건지 정하지 않았다.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갈 곳도 할 것도 정하지 않았다. 상황에 맞게 끌리는 대로 살아보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싱가포르에 왔다. 그리고 외출한 첫날, 보기 좋게 길 잃어버렸다. 난감하고 막막함에 두리번거리다 여행 안내소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받을 수 있는 안내 책자를 다 받아왔다. 틈틈이 책자들을 반복해서 정독했다. 책자를 통해 알게 된 곳들 중, 꼭 가야겠다고 정한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된다면 가보고 싶은 곳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이 중국정원과 일본정원이다.
책자에는 중국정원과 일본정원이 따로따로 소개되어 있었지만 중국정원을 지도에서 찾아보니, 바로 옆에 일본정원이 위치해 있다. 다만 둘 다 섬이라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지도만으로는 잘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둘 다 가보고 싶지만, 둘 다 가겠다고 정해놓고 출발하면 마음이 조급해질 것 같아서, 역에서 가까운 중국정원을 가보고 갈 수 있으면 일본정원도 가는 것으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이사한 이스트 코스트 집 근처에는 MRT역이 없다. 무조건 버스 타고 나가야 한다. 늘 집에서 나와 왼쪽으로만 가보고, 오른쪽으로는 가본 적이 없다. 책자에 나온 페라나칸 전통가옥이 오른쪽 위로 가면 있는 것 같은데, 그 풍경을 보자고 해변과 반대 방향으로 아이들을 끌고 가기가 미안해 못 갔었다. 오늘은 해변으로 가는 게 아니니, 버스 타기 전에 오른쪽 위로 가보자고 아이들을 끌고 갔다.
아이들은 보고 싶어 하지 않으니 왜 가야 하는지 목적의식이 없다. 집에서 2킬로미터인 해변에 갈 때와 다르게, 고작 500미터인 페라나칸 하우스를 보러 가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무겁다. 아이들의 무거운 발걸음에 내 마음도 무거워지니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시간 동안 조급해졌다. 마트가 보인다. 아이들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뭔가를 사면 들고 다니기 불편하지만 아무것도 안 사고 나오기는 아쉬워, 아이들 동기부여를 위해 아이들이 고른 이색 사탕 한 봉지를 샀다. 아이들은 사탕을 본인들이 챙기겠다며 봉지를 손목에 걸고 마트를 나왔다. 마트에서 나와 조금 더 올라가니, 형형색색의 집들이 보인다.
여긴가 보다. 책자에서 보고 기대한 모습보다는 구간이 짧다. 그래도 아름다운 색깔의 페라나칸 전통 가옥을 천천히 감상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 반응이 시큰둥하다. 눈부신 햇살에 더욱 사진 찍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설득해 얼른 사진만 찍고 버스 타러 갔다.
아이들에게 앤드류 성당을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로 돌아 MRT를 갈아타는 곳으로 갔다. 함께 돌아보고 싶은 곳들은 많지만, 아이들이 지레 지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앤드류 성당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봤지만 엄마가 보고 싶은 만큼 충분히 보지 못한 아쉬움에 오늘도 잠깐 둘러봤다.
거리가 조금은 익숙해지니, 버스타고 내려야 할 곳을 대략 알것 같다. 버스를 타는 것도 덜 두렵다. MRT 타는 것은 너무나 익숙하다. MRT만 타면 목적지역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중국정원 역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걸어간다. 안내문을 찾지 못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가는 방향 말고는 갈 곳이 없는 것 같아 우리도 사람들을 따라갔다.
역에서부터 쭉 평지를 가다 보면, 화장실이 나오고 조형물들이 나온다. 중국정원에 자연스럽게 들어온 것 같다.
뮬란과 공자, 관우 등 조형물들을 구경하며, 규모가 얼마인지 모르는 중국정원을 탐색했다. 탑이 보인다. 올라가도 되나? 입구에 아무런 표시가 없어 확신이 들지 않지만, 호기심에 조심스럽게 탑 안으로 들어갔다.
탑 위에는 싸온 음식을 펼쳐 먹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행이다. 우리가 무리해서 들어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좀 더 마음이 편안해져 주변이 더 잘 보인다.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편하게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인 것 같다.
제법 도마뱀과도 익숙해진 것 같다. 보태닉가든에서 보고 놀랐던 커다란 도마뱀을 아이들은 좇았다.
굉장히 넓다. MRT역에서 내린 많은 사람들은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 중간중간 화살표 표시가 되어 있지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그냥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갔다. 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갑자기 쏟아진다. 우리는 지붕이 있는 곳으로 달려 들어갔다. 거센 바람을 막아줄 벽은 없었지만, 굵은 빗방울을 피할 수 있는 그곳에는 이미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그치지 않는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은 빗속으로 떠났다. 호수 위에 우리 셋, 고립된 기분이다. 우리도 작은 우산을 펴고 빗속으로 들어왔다.
비는 잠시 멈췄다 내렸다 반복한다. 비가 오면 지붕이 있는 곳을 둘러보다가, 비가 그치면 빠르게 이동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구경하다 보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큼직한 느낌에서, 아기자기하고 단조로운 느낌이다. 일본정원으로 넘어왔나 보다. 길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게 되는 곳을, 오기 전에 괜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어두운 하늘에서 다시 굵은 빗방울이 톡톡 떨어진다. 우산을 들기가 귀찮아 가방에서 꺼내지 않고 대신 다급해진 마음으로 빠르게 둘러보고 나왔다. 들판을 지나오니, 봤던 조형물은 하나도 안 보이고 숲이다. 들어왔던 길이 아니다. 또 길 잃어버렸나? 지도앱을 켜고 우리가 있는 위치를 확인해 봤다. 전에 우버 기사가 추천한 ‘사이언스 센터’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지도를 보며 지도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걸었다. 하수장인 듯한 옆길을 지나 숲을 빠져나오니 차도가 나온다. 인도가 없다. 분명 걸어가는 길로 설정했는데, 차 중심으로 안내를 해 주는 것 같다. 아이들은 집에 가는 MRT를 타러 가는 길이 왜 이렇게 험한지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다.
“얼마나 더 가야해?”라고 묻는 아이들과 찻길 옆 비포장 진흙 길을 계속 걸었다. 40여분 쯤 걸으니, 찻길 옆으로 건물 하나가 보인다.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그저 회색이라 무슨 건물인지 모르겠다. 가까이 다가가 건물 주변을 돌아보니, 눈사람이 보인다.
아이들이 관광 안내센터에서 받아온 자료를 보고 가고 싶어 했던 곳, 인공눈으로 꾸며놓은 ‘스노우 시티’다. 문이 닫혀있어 실내를 확인해 볼 수 없었지만, 실외에 설치되어 있는 눈사람만으로도 아이들은 반가운가 보다.
눈사람과 사진을 찍고 조금 더 걸으니 사이언스 센터가 보인다. 여러 건물들 중 어느 건물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 이곳저곳 가보았는데 문이 닫혀 있다. 사람들이 나오는 건물이 보여 그곳으로 달려가 들어갔다. 매표소 앞에 가 영업시간을 확인해 보니 곧 문 닫을 시간이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밖에도 도르래, 지렛대, 위치에너지 등 과학을 이용한 체험용 시설물들이 꽤 있다.
실외 체험으로 아쉬운 마음 달래다 보니, 실내가 더 기대된다. 다음에 일찍 오기로 하고, 역을 찾아갔다.
역 앞이 굉장히 복잡하다. 시장이 꽤 크게 열려 있다. 부기스 스트리트에서 반했던 1달러짜리 과일 음료가 보여 망설임 없이 과일가게 앞으로 갔다. 아이들은 망고와 오렌지를 골라 주문했다.
“원 망고, 원 오렌지”
그런데 가게 주인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다시 한번 말했다.
“원 망고, 원 오렌지”
이번에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뭐가 잘 못 됐는지 모르겠지만, 의사전달이 안 되는 것 같아 과일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그러자 가게 주인, 갑자기 박장대소한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마를 자기 손으로 때리기까지 하길래 물어봤다.
“이게 뭔데요? 망고랑 오렌지 아니에요?”
주인은 아니란다. 그리고 알려준다.
“맹고, 오링”
이번엔 우리가 빵 터졌다. 우리는 다시 한번 “망고, 오렌지”라고 말하자, 주인은 고개를 더 세차게 흔들며 “아니, 맹고, 오링”이란다.
가게 주인은 확연히 다르다며, 어떻게 우리에게 그렇게 발음하냐며 웃는다. 오렌지를 오링이라고 말하며 우리 보고 틀렸다고까지 말한 그 주인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같은 것을 갖고 의사소통이 안 된 상황이 재미있었다.
비슷하게 들리는 발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일 가게 주인에겐 전혀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해 서로를 보며 한참 웃었다.
비슷한 듯하나 다른, 중국정원과 일본정원, 그리고 오링과 오렌지를 몸으로 느끼며, 우리는 다음에는 더 빠른 주문을 위해 싱가포르 발음에 따라 “맹고, 오링”이라고 주문하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