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차 싱가포르 일상
한달살기 시작할 때 가졌던 막연했던 목표가 조금 선명해진 것 같다. 우리의 한달살기 목표를 한 단어로 표현해 본다면
“빈 공간”, “빈틈”
인 것 같다. 정해놓은 행동이나 할 일 없이, 활동을 정지하고 그저 가만히 있는 순간, 주변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고요히 들여다보는 순간, 침묵하며 주변 현상을 관찰하는 순간인 빈 공간, 빈틈을 즐겨보는 것이 막연하게 꿈꿨던 우리의 한달살기 목적이었다.
오늘, 그 빈틈을 즐겼다.
눈을 떴다. 주변이 아직 어둑하다. ‘몇 시지? 아직 새벽인가?’, 시간을 확인해 봤다. 아침 7시, 이쯤이면 큰 유리창 가득 빛이 넘쳐나, 방을 환하게 밝혀야 하는데, 빛줄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창문이 세차게 흔들린다. 불투명한 속 창문을 열었다.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돗물을 거세게 틀어 놓은 것처럼 많은 빗물이 연이어 내려온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 같다. 벌써 일어나 움직였을 아이들도 빛이 전혀 없는 하늘 덕분에, 눈을 뜨고도 여기가 어딘지, 몇 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다. 아침밥을 챙겨 먹는 동안 비바람이 창문을 더 세차게 두드린다. 우리는 속 창문을 열고 투명한 겉 창문을 통해 어두컴컴한 세상을 바라봤다. 창문을 두드리는 우렁찬 비바람 소리를 들었다. 어두컴컴하고 시끄러운 유리창 밖의 풍경과 대비되는 평온함이 느껴진다.
오늘은 아늑함이 더욱 느껴지는 유리창 안에서 뒹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그 순간, 오히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흥분됐다. 한 동안 쏟아지는 창문 밖 빗줄기를 봤다. 그동안 우리는 말없이 본인만의 사색을 즐겼다.
오늘, 원래는 루지를 타러 갈까 했었다. 그칠 줄 모르는 거센 비바람 때문에 계획한 일에 차질이 생기게 됐다. 이럴 경우, 비가 언제 그칠지를 조급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허둥지둥 댔었다. 혹시라도 예정대로 못할까 봐 불안해하며, 뭔가 다른 일을 알아보기 위해 더 분주해진 마음에, 심리적 압박감이 커졌었다. 그런데 오늘, 하기로 한 일을 못하게 됐는데, 어쩐 일인지 마음이 평온하다. 따뜻한 이불 옆에서 쏟아지는 비를 말없이 바라보는 그 순간, 마음이 설레었다. 불확실해진 상태에서 오히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열리는 기분이다. 빈 공간, 빈틈에서 우리는 나만의 사색을 하며,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같다. 빈 틈에서 결코 불안해할 일이 아니라는 것, 빈틈이 무한한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느꼈다.
아이들도 그동안 엄마가 몰고 간 조급함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비가 조금 사그라들자, 아이들이 할 일이 생각났나 보다. 아이들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아이들은 우산도 받치지 않고 빗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수영장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아이들 몸으로 떨어진 빗방울은 흔적도 없다.
비가 그쳤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도서관에 갔다. 아이들은 영상물도 보고 책도 봤다. 이해하는 걸까? 아이들 표정을 보니, 즐기는 것 같다. 어설픈 지식으로 언어만을 이해하려는 나보다 오히려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
인생의 길이 늘 명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불확실한 상황이 더 많았다. 그동안 나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불안해하며 빨리 답을 얻으려 했다. 불확실한 상황을 가능한 피하려 했다. 아이들에게도 불확실한 상황을 주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틈을 주지 않고, 늘 할 일을 결정해 지시하고 종용했다.
오늘,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안하지 않았다. 무언가 떠오를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봐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불안 없이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며, 모든 가능성에 항상 문을 열어놓고 싶다. 자기만의 잣대 , 룰을 만드는 아이들처럼 살고 싶다.
오늘도 나는, 아이들에게 배웠다.
아이의 마음이 조금 더 보이는 오늘, 조금 더 엄마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