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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네 Nov 16. 2019

두려움을 극복하고, 마음의 거리가 좁아진 날

20일 차, 싱가포르 생활기

제법 두려움이 사라졌다.

다 알지는 못하지만, 길 잃어버려도 막막하지 않다.


MRT를 타고 다니며, 우리집에서 시내까지 걸어가 보고 싶었다. 지도를 보니 7킬로 정도 된다. 7킬로면 걸어가 볼만 한 것 같지만, 아이들에게 걷자고 하기엔 무리한 요구인 것 같아 망설이다 말했다.


“엄마는 차이나타운까지 걸어갔다 올 생각이야. 지난번에 친구들 준다고 함께 봤던 열쇠고리만 사서 돌아올 건데, 같이 갈래?”

“같이 안 가면 우리는 뭐해?”

“너희는 수영해도 되고, 아님 슬러시 사 먹고 집에서 기다려도 되고. 점심시간 전에는 돌아올 거야. 어떻게 할래?”

“우리, 슬러시 사 먹고 집에 있을게.”

“정말? 그래, 그럼. 슬러시가 0.9달러니까 2달러 주고 갈게. 슬러시 사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한테 꼭 확인 문자 주렴.”


아이들도 제법 익숙해졌나 보다. 엄마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둘이 슬러시를 사 먹겠다고 한다. 아이들은 “슬러시 주세요”, “얼마예요?”, “포도맛 주세요” 등 필요할 것 같은 말들을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물어본다. 아이들이 물어본 말들을 적어줬다. 내가 나가기 전까지 아이들은 계속 나에게 발음을 물어보며 반복해 연습한다.


“얘들아, 엄마 3시간 안에 돌아오니까 그때 사 먹어도 돼.”라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MRT 타고 갈 때 빠르게 지나가던 풍경인데, 한 참을 걸어도 바뀌지 않는다. 집을 나선 지 30분이 넘었는데 아직 반도 못 왔다. 그런데 공사 중인 곳들이 많아 걸어가는 길이 없다. 찻 길 뿐이다.


‘엄한 짓 했나?’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대로 돌아가긴 아쉽다.

다시금 막막해졌지만,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인도가 없으니 찻 길 한편으로 계속 걸었다.

나 혼자다. 넓은 찻 길 위, 혼자 걸었다.

공사 중인 상황이 지도에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지도가 아닌 감각에 의지해 걸었다.

길이 보인다.

강 옆으로 산책로가 있다.

돌아가지 않길 잘한 것 같다.

칼랑 강 옆을 걷다 보니 막막함에 밀려왔던 두려움이 시원하게 사그라든다.

힌두교 사원, 의회 건물, 앤드류 성당, 대법원 건물 등 아는 건물들이 나오니 자신감이 생긴다. 더 활기찬 발걸음으로 빠르게 걷고 있는데, 사진 한 장이 메시지로 왔다.

아이들이 보내온 사진이다. 슬러시 통과 지갑, 집의 소파가 보인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자,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이 성공한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 반복해서 영어를 외우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걱정됐을 텐데, 용기 내 나갔을 모습을 생각하니 대견하다. ‘얼마나 뿌듯할까?’ 싶다.

“우와, 성공했구나. 축하해.”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더 빨리  걸어갔다. 친구들 줄 기념품, 그리고 아이들의 성공을 기념해 작은 선물을 사서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돌아오는 길은 아예 지도를 켜지 않고, 주변 풍경과 감각에 의지해 걸었다. 왔던 길과 다른 길이지만, 못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어서인지, 훨씬 짧게 느껴진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길, 아직 점심시간 전인데 어둑해지더니 급기야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물이 더 굵어지지 않길 바라며 우산을 펴지 않고 달렸다. 집에 도착하니, 천둥번개와 함께 폭풍우가 몰아친다.

집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빈 슬러시 통을 내게 내민다. 나도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내밀었다.


저녁엔 도서관 스토리텔링 수업이 있다. 다행히 몰아치던 폭풍우가 그쳤다. 조금 일찍 집을 나와 동네 구경했다.

폭풍우 후의 차분한 동네 분위기와 달리, 우리 마음은 다소 들떴다. 7킬로미터 거리를 걸어서 돌아온 동네이기에, 엄마 없이 나왔던 동네이기에 더 친근감이 느껴진다.

스토리텔링 시간에는 “news paper hat”이라는 책을

읽고, 신문지로 모자를 만드는 시간을 가졌다. 어려서부터 자주 접어보던 것이기에 아이들은 선생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금세 접어 머리에 썼다. 싱가포르 아이들을 도와주던 선생님이 아이들을 보더니 깜짝 놀란다.


걸어갔다 와 보니 막연했던 길들이 대략 그려진다.

아이들에게 슬러시 가게가 가까워졌다.

싱가포르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두려웠던 내일이 설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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