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근래 '팔자'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린다. 사주팔자의 줄임말로 정해진 운명이라는 뜻이라던데,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그 의미를 선택의 경향성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경향성,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늘 찌푸둥하고 흐린 눈을 하고 다니는 친구가 있다.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의 근황을 물으면 언제나 바쁘다. 학업과 취업 준비와, 그러면서도 제가 속한 단체에 있는 행사들에 빠짐 없이 참석하는 그는 대체로 잠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수면 대신 그런 활동들을 하기로 선택한다.
그래, 너는 그런 선택을 하는 거겠지. 그게 네 앞으로의 팔자일까.
그의 수면 부족 일상을 친구로서 조금은 염려하되 단지 지켜보기로 한다.
나의 팔자는 어떻던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상황을 짚어본다.
대학 시험기간에 굳이 전주로 와서 애인의 자취방에서 공부를 (하려고) 하고 있다. 안정적인 수입도 없이 10만원 이하의 재정난을 겪고 있으면서도 고속 버스표를 예매하고, 이왕 온 김에 그 인근의 또다른 친구도 만난다. 누군가 내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왜 그러니?" 혹은 "돈이 남아도는 거니?"라고 한다면 별달리 할 말이 없다.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이 후회되지는 않아서 앞으로도 이럴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게 내 팔자려니.
누군가에게는 아주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그 누군가에는 그의 이유가 있다.
학자금 대출을 신청해서라도 용돈을 받지 않고자 했던 나와, 내 자식만큼은 절대 대출을 받게 하지 않겠노라 결심한 모부.
스스로가 잠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무리하게 일과를 잡는 나와, 이런 나를 이해가 안 되는듯 쳐다보면서도 돌봐주는 가은.
너무나도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나와, 그 지점을 알고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그.
몇 번의 포옹, 쓰담아줌, 생생한 라이브 목소리에 연연하며 때마다 애인을 찾는 나와, 몇 달의 단절을 감내하고 버티면서도 연애를 이어가는 친구.
산책하고 글 쓰는 여유, 심리적 평안이 너무나도 중요한 나와, 급할 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했던 옛 동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