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는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익숙함을 쌓는 사람만이 낯섦을 설계할 수 있다

by 마케터 L

익숙한 출근길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매주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형식의 회의를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기획’을 말하고 있는 걸까? 마케터(기획자)는 본질적으로 반복의 전문가 같다. 신입 시절엔 그것을 루틴이라 부르며 지루해했고, 팀장 초년기에는 그것을 업무 체계라며 정당화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나는 반복을 사랑하려고 한다. 반복은 기획의 가장 낮은 발판이자, 동시에 가장 높은 도약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케팅에서 기획의 포지션에 있을때는 낯설고 새롭고 유니크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는 오해가 종종 있다. 실제로 많은 마케터들이 브레인스토밍과 트렌드 리서치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하지만 기획자는 무엇보다 반복을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새로운 것을 붙들기 위해선, 익숙한 것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획을 익숙함 위에 쌓은 낯섦이라 정의하고 싶다. 기획자가 설계하는 서비스, 캠페인, 콘텐츠는 대부분 결국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들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일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의 루틴에 발을 디디지 않은 채 단지 신선함 하나만으로 기획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기획이 아니라 이벤트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같은 회의에 들어가고, 같은 탬플릿으로 정리하고, 같은 슬라이드 제목을 붙이며 그 익숙함의 틈을 찾는다. 이전 주의 보고서와 이번 주의 결과치를 비교하고, 지난 시즌의 고객 후기와 이번 시즌의 반응을 포개본다. 그 익숙함 속에서 조금씩 생겨나는 어긋남... 그게 바로 다음 기획의 실마리다. 마케터/기획자는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복은 정체가 아니라 리듬이고, 지루함이 아니라 구조이고, 어제의 실패를 감당하고 오늘의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작은 안전망이다.


나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회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제와는 조금 다른 흐름을 만들기 위해 작은 질문 하나를 보탠다. 지난번 그 결과, 혹시 그 이후 변화가 있었을까요? 그렇게 기획은, 다시 시작된다.


익숙함 속에서 아주 낯선 문장을 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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