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쓰는 행위는 고통을 야기했다. 밥 벌이를 목적으로 문장을 조합했고, 그렇게 쓴 글들은 으레 가벼운 두통을 불러왔다. 그러나 삶을 옮기는 글쓰기는 사지가 절단되는 고통이었다. '나'를 쓰면 약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펜촉에 따라다녔다. 10년간 '나'에 대한 것은 정제된 일부만 노출했다. 그러다 며칠 전 '쓰기의 말'에서 이 문장을 만났다.
용기란 몰락할 수 있는 용기다.
어설픈 첫 줄을 쓰는 용기,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진실을 직면하는 용기,
다시 시작하는 용기...
도돌이표처럼 용기 구간을
왕복하는 일이 글쓰기 같다.
오죽하면 이성복 시인이 말했을까.
"글쓰기는 오만한 우리를
전복시키는 거예요."
안 쓰고 안 부끄러운 것보다
쓰고 부끄러운 편을 택했다.
부끄러움 총량의 법칙이 있는지,
왕창 부끄럽고 나면 한결 후련했다.
부끄러워야만 생각하므로
부끄럽기로 자처한 측면도 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자기 인식이야말로
쾌감 중 으뜸임을 알았다.
은유는 작가의 용기에 탄복하고 작가의 용기에 전염된다고 말했다. 그녀의 용기에 전염된 것은 나였다. '나는 별안간 삶을 게워냈다'라는 제목으로 내 삶을 거름망 없이 쏟아냈다. 쓰다가 울고, 울다가 썼다. 데니스 존슨은 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벌거벗은 자신을 쓰라. 추방된 상태의, 피투성이인.' 스스로 방관했던 벌거벗은 자신을 쓰고 나니, 어느새 쓰기의 말이 치유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