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회고록 1
초등학교 시절 전교 부회장을 했었다. 부모님이 엄청나게 공부를 푸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공부했고 적당히 놀았던 것 같다. 다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는 공부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고1까지는 공부에 손을 놓고 있었다.
고2로 넘어가는 겨울방학부터 수능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당시 굉장히 친했던 소위 말하는 베프와 내가 만났던 여자친구가 몰래 사귀다가 친구들에게 걸렸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아 그냥 공부나 하자'는 생각을 했다. 내신이 좋지 않았기에 내신을 안 보는 학교에 수시를 지원했다. 경영학과가 수능 커트라인이 가장 높다길래 아무 생각 없이 경영학과에 지원했다. 1학기 수시를 써서 떨어졌다. 2학기 1차 전형에 또 한 번 수시를 썼고 논술과 면접을 거쳐 합격했다. 학교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간 것은 아니지만, 공부한 것 대비 가장 괜찮은 학교에 갔다는 평을 들었다.
대학에 합격하고 모든 세상이 내 것인 것 같았다. 매일이 행복했고 1년 360일 친구들과 술을 먹고 놀았다. 그렇게 3학기를 보냈고 세 번 연속 학사경고 맞아 제적위기에 처한 성적표를 숨기고 군대에 가게 되었다. 군대에서 2년을 무사히 보내고 전역했다. 친구들은 대부분 바로 복학을 했지만 나는 학교에 뜻이 있던 것은 아니라 평소 좋아하던 옷과 관련된 일을 시작했다.
군대에 가기 전에 친구가 하던 쇼핑몰 운영을 도와줬던 적이 있었다. 막연하게 쇼핑몰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동대문 도매 시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동대문에서 조금 일을 배우고 압구정 로드샵에서도 일했다. 그때 내 나이가 23이었는데 20대 후반 점장님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옷도 잘 입고 직장(매장)에서는 왕이고 매년 해외로 휴가도 가고. 1년 정도 일을 하고 나서 점장님들에 대한 선망이 사라졌다. 매장의 점장님들은 연봉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나이가 조금만 들면 일을 하기가 힘들다. 고1 때처럼 '아 그냥 졸업은 하자'라는 생각으로 다시 복학을 하게 되었다.
남자들은 보통 군대를 다녀오면 정신을 차린다. 군대에 다녀와서는 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3학기 까먹은 학점을 메꾸기 위해 재수강을 하고 등록금이 아까워 장학금을 타며 공부했다. 그러던 중 전공 수업인 마케팅 원론을 듣게 되었다. 당시 나는 잘 몰랐지만 수업을 해주시는 교수님이 업계에서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었다. 너무 재미있게 수업을 들었고 교수님이 운영하시는 학회도 가입했다.
학회나 수업에서 공모전을 많이 나갔었다. 매일 밤을 새우며 준비했지만 시장과 소비자를 분석해서 논리를 만들고 메시지를 짜는 일이 즐거웠다. 학부 시절 내가 생각하던 마케팅은 광고 기획이었다. 현업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있지만 소위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마케팅과 광고를 헷갈려한다. 학부 수준의 짧은 지식과 경험에서는 오해할만하다. 내가 가고 싶었던 회사는 제일기획이었고 내가 생각하는 나의 커리어는 드라마 '대행사'의 이보영이었다.
그 당시 내가 생각하는 마케팅은 남들에게 와우 포인트를 주는 일이었다. 멋진 옷을 빼입고 임원들 앞에서 날카로운 인사이트와 뾰족한 메시지로 스티브잡스처럼 피티를 진행한다. 내가 기획한 세상에 없는 새로운 전략과 아이디어를 듣고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한다. 그래서 나는 마케터를 꿈꾸게 되었다.
현업에서 10년 넘게 일해온 지금 내가 생각하는 마케팅은 멋진 일이 아니다. 마케팅은 전쟁이다. 누구보다 처절하고, 치열해야 살아남는 그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