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맠크나 Dec 12. 2020

어쩐지 X된 것 같습니다만 (2부)

자소서에 쓸 수 없는  진짜 퇴사 사유

저도 생각 없이 퇴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출처 - 영화 '돈'>

운 좋게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지만, 그 과정이 치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신입사원이 되기 위한 경력을 쌓아야 해서, 일 년 넘도록 내 회사인 듯 내 회사 아닌 인턴만 세 번을 했다. 최종 합격을 받아 든 전 회사는 65번째 지원한 회사였고, 10번째 면접을 본 회사였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의 소원이었던 그냥 서울 회사도 아니고, 서울 사대문 안 회사를 갔다. 목에 달랑거리는 정규직 사원증에 참으로 벅찬 마음으로 시작한 첫 직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을 일하다 보니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찐 한숨이 나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상사가 A4용지에 쓱쓱 그린 그림을 피피티 슬라이드로 만들어 내는 요술 지팡이가 된 기분일 때. 행사가 훌륭하게 마무리되어서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다과 음료 배치로 핀잔을 들을 때. 상사의 결재가 급한 데, 도대체 하하 호호 임원 티타임은 끝날 기미가 없을 때. 


많은 이들이 퇴사자 사유 설문조사에서 ‘조직/직무적응 실패’를 사유로 꼽는다. 나 역시 입사 3년 차에 퇴사 후 유학을 가겠다고 공표하자 ‘3년 차 신드롬’이나, ‘직장인 사춘기’가 아닌지 잘 생각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단순히 상사 혹은 조직문화가 안 맞는다고 생각 없이 밥벌이를 차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음… 매우 적다. 


직장인 사춘기라는 용어에 담긴 그 함의는 퇴사를 미성숙한 충동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나아가자면 조직 생활 고충이 저 연차 직원들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인데 절박함과 끈기 없이 퇴사하는 요즘 것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조소에 가깝다.


그러나 퇴사는 필연적으로 매우 복합적이며 계산적이다. 저마다의 공식으로 현직과 퇴사 사이에서 치열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 주변 퇴사 경험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퇴사의 궁극적인 이유는 현직 유지가 최선이 아니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니까 퇴사를 결심한 나에게도 다 계획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회사원의 근원적 불안, ‘대체 가능성’


<출처 - tvN>


처음 입사했을 때,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공부해서 토익 800~900점은 기본으로 하는 신입을 보면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씀하셨던 차장님이 계셨다. 아마 90년대생 직장인들도 10년 후에는 초등학교부터 코딩 교육을 받아 프로그래밍을 우습게 하는 신입사원을 보며 위기를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해외 영업직도 아닌데 영어가 유창한 신입을 보며 느꼈던 윗세대의 서늘함을, 개발직도 아닌데 프로그램을 척척 짜내는 신입을 보며 느끼게 될 것이다. 


청소년 시절을 함께한 전자사전, PMP, 디지털카메라가 스마트폰 하나로 전부 사장되는 것을 목도한 밀레니얼 세대는 이대로 멈춰서 시키는 일만 해서는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회사의 동력이자, 기둥이자, 미래가 되겠다고 입사했지만, 정작 내 일은 다른 사람 데려와서 한 달만 가르쳐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회계사, 변호사, 기자 전문직도 대체할 수 있다는데, 내 업무는 더욱 알파고 족속들에게 너무나 쉽게 함락될 것 같았다. 이처럼 일반 사무직 회사원들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불안감은 ‘대체 가능성’이다. 


나름 성실히 대학 생활을 보내고 신입사원으로 들어왔지만, 이렇게 작은 한 줌의 능력으로 이 자리에서 20년 일한다고 대체 불가능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한 직원이 고위 임원이 되면 ‘회사원 신화’라는 말이 붙는다. 그만큼 회사 일만 열심히 해서 높은 자리까지 성장하는 것이 어렵다는 방증이다.


<출처 - MBC>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톱 모델 한혜진 씨가 “배곯지 않기 위해선 굶어야 한다”라고 고충을 말하는 것을 보며 공감이 됐다. 다들 그렇게 산다. 외국계 재무팀 친구는 미국 회계사 공부를 하고, 제조업 인사팀 친구는 노무사 공부를 하고, IT 회사 기획팀 형은 데이터 분석 자격증을 공부한다. 도대체 미래를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나 많고, 새로운 자격증은 세상 끊임없이 만들어지는지.  




빤히 보인다, 50대 은퇴 후 집 담보대출받아 치킨집


배울 것이 없어서 퇴사한다는 부하직원에게 부장님은 ‘여기가 회사지, 대학교냐’라고 일갈을 날리셨다. 맞다, 회사에 고용되어 월급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 나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회사 직원으로 여기서 벌 돈이 빤하다.


<출처 - SBS 스페셜>


선배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연봉 테이블이 대충 견적이 나온다. 사실 임원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20년 정도 다니면서 받게 될 임금 테이블이 빤하다. 계산기를 두드려 생애 소득을 계산해보자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사기당하지 않고, 가족들이 크게 아프지 않으며, 자식이 유학을 떠나지 않고 무난하게 살아간다면 수도권 어딘가 집 한 채 할 수 있을 정도. 음, 요새 집값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불가능할 것 같다. 망할. 아무튼 은퇴 후에도 아마 자식이 다 크지 않았을 테니, 계속 돈을 벌어야겠지? 20년 퇴사 후에 뭘 하겠어. 하나뿐인 집 담보대출받아 치킨집을 차리는 수밖에.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앞으로 돈 벌고 살 길이 구 만리인 요즘 것들은 머리를 굴리느라 바빠진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한정된 20~30년 동안 최대한 돈을 벌 것인가.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회사는 나 혼자 특히 일 잘한다고 성과급이 드라마틱하게 나오지 않는 구조다. 


내 돈 들여 대학원을 졸업해도, 외부 교육을 들어 전문성을 향상해도 내 월급을 인상해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담당 직무 외 포토샵, 동영상 편집 등 추가적인 역량이 있어도, 앞으로 나한테만 관련 일 다 시킬까 봐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공짜로 신문기사 키워드 검색하는 프로그램을 짜 볼까 아이디어가 떠올랐지만, 회사는 소프트웨어 월 사용료 아껴서 날 주지 않을 것임에 분명했다.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될 일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지켜보고만 있었다.




결국 현직에 계산이 안 서니 퇴사를 한다.


그렇게 위를 올라보며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를 고민해본다. 내 업무는 특성상 운전기사 딸린 고급 차를 몰고, 강력한 영향력으로 조금 일하고 많이 버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과 일하다 보면 조금은 억울한 날들도 있다. 강연 대상과 행사 주제를 사전에 실컷 설명해줘도, 그냥 평소 강연하던 이야기로 한두 시간 실컷 떠들고 몇백만 원씩 받아 가는 명사들. 몇 주간 직원들이 철야 근무하며 준비한 자료 쓱쓱 넘겨보며 끄덕끄덕하고, 잘 차려진 한식당에서 식사 대접받고 가시는 높은 분들. 


물론 임원, 고문, 사외이사, 특강 연사 등 대단하신 전문가들을 모시고 일하다 보면, 이분들이 한 마디 툭 던진 말씀에 값 비싼 인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분들이 좋은 대우받는 것에 문제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저렇게 되냐는 점이다.


비록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판단이지만, 이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해외유학이었다. 대부분 그 옛날 다들 어렵던 시절에 외국에서 공부를 해오신 분이었다. 보통 미국 다녀오신 분들이 많아 다들 자신이 얼마나 김치를 해 먹으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했는지, 영어 배우느라 얼마나 애달팠는지 에피소드 하나씩 꺼내시곤 했다. 


지난 연재 글에 이제 유학이 가성비 안 나오는 시대라는 댓글이 달렸었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모든 유학생이 사회지도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회지도층이 유학을 다녀온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 예로 국내 30대 기업 임원 24%, 30대 그룹 총수 63%, 후계자 90%가 유학파이다. 21대 국회의원 중 대학원 석사 이상 학력자가 60%가 넘고, 17%가 해외 유학을 다녀왔다.


결국 나에게 퇴사와 늦은 유학은 어떻게 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는가 현실적인 고민의 결과였다. 비록 조금은 무모해 보일지라도, 내가 처한 고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나의 가치를 다시 한번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물론 퇴사의 셈법에 오랫동안 가져온 유학에 대한 로망이라던가, 30대를 맞이하는 조급함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 마이크 타이슨


거창한 이야기였지만, 퇴사하고 유학을 떠날 때에는 나도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냉혹해진 현실에게 처맞기 전까지는. 물론 재취업 과정에 어려움이 있을 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왠 듣도 보도 못한 바이러스가 등장해 난이도를 이렇게 지옥불로 만들어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외고-대학-취업’으로 이어진 90년생의 표준 트랙을 달리던 나는 응당 결혼이라는 다음 목적지로 달려가던 중 경로를 틀었다. 새로운 30대의 감상은 마치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갑자기 내비게이션에서 길이 사라지더니, 차 아이콘이 길 없는 흰 바탕에 붕 떠 있는 기분이다. 경로 변경이라고 생각했는데, 경로 이탈이었던 것일까?



<계속>
  


이 글은 딴지일보에 게되었습니다.

https://www.ddanzi.com/ddanziNews/654955241





참고문헌


[단독] 30대 그룹 총수 63%, 후계자 90%가 미국 유학파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5700 


대기업 임원, 해외 유학파 비중은?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7/2020040700417.html?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news 


"그냥 뭐..." 사표낼 때 차마 말못한 진짜 퇴사 이유는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12/2020041201694.html?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news 



매거진의 이전글 어쩐지 X된 것 같습니다만 (1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