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은 블루스

쭈글쭈글한 잠옷을 입고 즐기는 허세

by 이휘

비오는 날 LP 플레이어를 켜고 좋아하는 블루스 음반을 꺼내 재생한다. 경건하고도 설레는 마음이다. 그리고 벌러덩 거실에 드러눕는다. 그럴듯한 실크 파자마와 코 끝을 간지럽히는 에스프레소 한 잔 같은 건 없다. 다 쭈그러진 잠옷을 입고 투명한 유리잔에 연유를 때려붓는다. 디카페인 원두를 투샷 내려 연유를 녹인 후 얼음과 우유를 와장창 들이부어 한 잔 들이킨다. 어우 대려. 이 정도는 돼야 이디야 연유라떼 맛이지. 몇 모금 들이키지도 않았는데 물이 마시고 싶다. 만들어둔 시원한 둥굴레 차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래. 이게 나야. 쭈글쭈글한 잠옷을 입고 둥굴레차 한 잔을 마시며 에릭 클랩튼 노래를 듣는 모습이.


집에 100여장의 바이닐이 있다.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산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예전 시아버님 집에서 많이 가져왔다. 퀘퀘한 냄새가 나고 먼지가 많이 묻어나와 물티슈로 여러 번 닦았다. 인터넷에서 보관 비닐을 사서 한 장 한 장 넣어 가수 이름 가나다 순으로 배열하면 마음이 놓인다. 언제나 A면보다는 B면에 마음이 가고, 마음에 드는 노래를 발견하면 작사 작곡가 이름을 한 번씩 눈으로 읽어준다. 방송 일을 하는 내가 언제나 크레딧에 신경을 쓰듯이.


집에 놀러오는 친구들의 노래 취향을 묻고, 특별히 듣고 싶은 노래가 없어서 추천해 달라고 하면 대부분 변진섭 독집 앨범을 튼다. 내가 좋아하는 곡들은 항상 B면에 있다. <너무 늦었잖아요>,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지근식 아저씨는 정말 대단한 작곡가라고 생각한다. 야 너무 좋지 않냐. 근식이 형이 짱이야. 그런 말을 하다가 술까지 몇 잔 곁들이면 그 날은 낭만에 온 몸을 가둔 것만 같다.


행복을 잘 느끼게 태어난 것 같다. 그런 날이면 부모님께 감사하다. 노래 한 곡만큼, 둥굴레차 한 모금만큼 행복을 삼킨다. 오늘은 비가 많이 온다. 거실 테이블에서 베란다를 바라보면 뒷동산이 보인다. 우거진 나무에 새 둥지가 하나 있는데 비가 많이 와도 거뜬해 보인다. 나도 저렇게 우뚝 서야지. 많은 이들이 날아와 콕콕 쪼아도 튼튼해야지. 더 많이 놀러오라고 해야지. 새로 산 에릭 클랩튼 라이브 앨범에 귀가 녹는다. 조금만 더 벌러덩 누워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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