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교련 시간이 있었다. 교련 선생님은 보수 꼰대, 재벌 시어머니, 심슨에 등장하는 에드나 선생님, 해리포터의 맥고나걸 교수, 사립 고등학교의 전형적인 양호실 선생님이 뒤죽박죽 섞여 프랑켄슈타인처럼 만들어진 분이었다. 물론 ‘에이즈’라든지 ‘미친 개’처럼 강력한 별명을 가지신 분도 아니었고 학생들을 마구 괴롭히는 분도 아니었다. 아주 가끔 살살, 견딜 듯 말 듯 하게 슬금슬금 우리를 긁어주시는 때가 있긴 했다.
일례로 생리통 때문에 찾아가면 약은 주지 않고 저 쪽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가라고 하는 게 다였다. 머리가 아파도 누워 있다가 들어가라고 하시고, 발목을 다쳐도 누워 있다가 가라고 하는 게 처방의 전부였다. 당시에는 그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멋진 분 같다. 나 역시 생리통 때문에 1학년 때 찾아갔었는데, 배는 아프고 약도 없으니 침대에 누워서 문자를 하다가 걸린 이후로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당시 교련 선생님은 한명숙 전 총리를 닮은 다른 여자 선생님과 찻잔을 기울이며 담화를 나누고 계셨는데, 들리지 않도록 휴대폰 자판을 조심스럽게 눌렀는데도 그 소리를 어떻게 들으셨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커튼이 촤라락 걷히고 매의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셨다. “여기 핸드폰 하러 왔어? 가.” 그 뒤에 혀를 차는 6마디 정도의 말들은 지금도 잘은 생각나지 않는다. 한명숙 전 총리를 닮으신 여자 선생님이 나를 약간 한심하게 쳐다보셨다.
아무튼 그 분은 마치 괴물의 미간 어디쯤에 솟아난 사마귀처럼 그 자리에 언제나 있는 분이었다. 성함은 졸업앨범을 봐야 알 것 같지만 우리에게 약간의 짜증의 아이콘으로 각인되어 있던 것만큼은 분명히 기억한다. 사실 선생님보다는 교련 시간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컸다. 2학년 때 우린 1년 동안 매주 한 시간씩 교련을 배웠다. 교련이 뭐였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우린 주로 응급처치법이나 붕대 감기 실습 같은 걸 했는데, 실기 시험 역시 붕대로 시간 내에 손 감기나 머리 압박 붕대로 감기 같은 게 있었다. 왠지 압박 붕대로 머리를 잘 압박하는 여자애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중에 살림도 저렇게 잘 하겠지’ 싶었고, 잘 못 하는 남자애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 네가 뭐는 잘 하겠니’ 하고 넘어가는 게 다였다. 나머지 시간은 자습으로 활용됐다.
순결에 대해서 말 하고자 하는 건 별 건 아니다. 한 번은 이 선생님께서 순결 캔디라는 아이템을 갖고 교실에 들어왔다. ‘순결 캔디를 먹인다’는 예고편은 이미 너무 강력해서, 먹기 전부터 소문이 무성했다. 순결 캔디란 도대체 무엇이었나. 루머는 엄청났다. ‘화학 약품이 들어있어서 순결하지 못한 사람이 먹으면 혀가 다른 색깔로 변한다‘ 부터 안에 ’애벌레‘가 들어있다, 먹으면 순결을 잃는다, 몸에 뭐가 나타난다, 등이었다. 지금도 유명한 정설은 순결캔디는 정액으로 만들어졌다는 거다. 굉장한 가설이다. 순결캔디는 이미 먹어보기도 전에 대단한 것이 되어있었다. 먼저 먹어 본 다른 반 아이들에 의하면 ’그냥 과일 맛이 난다‘ 정도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친구들도 있었고, 아직 안 먹어 본 애들을 겁주기에 급급해서 웬만하면 먹지 말라고 타이르는 녀석도 있었다. 여하튼 모두가 교련시간을 기다린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순결 캔디와 함께한 순결 서약식은 예상 외로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먼저 교련 선생님의 ‘순결 강조’ 시간이 있었다. 왜 우리는 순결해야 하며, 순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 사회에서의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법하셨다. 정작 말 하고 있는 교련 선생님은 섹스를 정말 좋아할 것 같이 생겼는데 듣고 있는 우리들은 순결해야 된다고 말 하는 게 참 우스웠다. (그 당시 우리는 콧구멍이 크면 섹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선생님은 남자를 좋아할 것 같은 얼굴상이긴 하다.) 그렇게 우리들의 멘탈은 한참을 순결 순결 열매로 가득 찼다. 교련 선생님은 여학생, 남학생 별로 한 명씩 차례로 나와 순결 캔디를 먹게 했다. 한 명씩 봉지에 든 사탕을 받아가는 게 아니었고, 직접 포장지를 까서 입에다 넣어주는 방식이었다. 나는 앞으로 순결하겠다는 의미로. 대신 서약할 사람만 나와서 먹으라고 자율을 주셨다. 굳이 강제로 먹게 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꽤나 많은 친구들이 앞에 나가서 사탕을 받아먹었다. 일어나지 않는 아이들끼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줄 서서 사탕 먹는 친구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당연히 줄 서지 않았다. 안 먹었다. 그걸 나가서 먹는 친구들도 이상했고 안 먹는 우리들도 이상했고 그냥 이상했다. 그 분위기 자체는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당시 나는 교련선생님이 말 하는 ‘순결’을 갖춘 소녀라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내 자신의 순결을 누군가에게 서약하고 싶지도, 강요받고 싶지도 않은 고등학생이었다. 그깟 캔디 하나에 순결을 걸면 보증도 캔디로 서고 결혼 서약도 캔디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쯤 나이를 먹고 나니 서약을 한 친구들의 반 이상은 기똥찬 섹스를 해 봤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 그깟 사탕 한 알에 순결 서약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이 이벤트에 조금이라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치 너희들은 나로 인해 순결을 약속하게 된 거야, 라며 소녀들의 입에 하나씩 딸기맛 사탕을 넣어주며 온화한 인상을 보이는 저 교련 선생님의 손가락 지문이 묻은 사탕을 빨고 싶지가 않았다. 빨아도 될 것과 빨면 안 되는 것은 그 때부터 가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매우 결정적으로, 딸기에 심한 알레르기가 있어서 절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순결 서약은 불편하게 지나갔다.
찾아보니 순결캔디의 봉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이 캔디는 우리 사회에 깊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각종 퇴폐요소와 유해 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고 순결한 학생상을 정립하여 미래의 이상가정 및 사회와 국가를 이루기 위해 만든 순결다짐용 캔디입니다.>
아예 교탁 대신 침대를 놓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 처녀막이 있는지 한 사람씩 확인한 뒤 처녀막이 있는 아이들은 딸기맛 사탕을 먹이고 자리에 앉히고 처녀막이 없는 아이들은 앞에 세워서 ‘자, 봐라. 얘네들이 순결하지 못하고 더렵혀진 아이들이란다’ 라고 쇼라도 했으면 덜 지루했을 텐데 겨우 이런 방식으로 끝내버린 교련 선생님의 기획력이 안타깝다. 아름다운 가정과 이상적인 국가는 순결이 책임진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딸기 알레르기를 무릅쓰고라도 순결 캔디를 덥썩 받아물었을 텐데. 우리나라 물가가 오르는 것도 모두가 순결하지 못해서 같고, 나랏님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기 배만 채우는 이유도 내가 그 때 순결캔디를 먹지 않아서 같다.
사실 대학교에 오고 나서, 여자 아이들의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내다보니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나는 남자와 섹스를 해 봤다.”고 말 하는 지지배는 아무도 없었다. 행여나 무척 친해지고, 몇 년간 울고 웃어 온 사이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을 때, ‘어떻게 결혼하지도 않았는데 그럴 수 있어’라고 말 하는 지지배가 하나 있었는데, 그 때마다 ‘네가 생각하는 순결의 정의가 뭐냐’고 묻고 싶었다. 말에 따르면 그 여자 아이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목사의 아들과 데이트를 하는데, 키스를 할 때 남자친구의 손이 가슴에 올라오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 그럼 혼전 키스는 순결한가. 결혼도 안 했는데 껴안고 뽀뽀하는 건 되고, 섹스는 안 되나. 패팅은 되고, 섹스는 안 되나. 들어보면 첫 경험을 할 때 출혈이 없는 친구들도 많던데, 모두의 처녀막은 지금쯤 안전한 건가.
내가 생각하는 순결은 조금 다르다. 몇 달 전 학교에서 후배들, 동기들과 연애 심리 치료를 하다가 나온 얘기였는데, 나는 그저 순결을 <이전에 만나던 사람과의 감정을 모두 정리한 상태에서 새로운 사람과 시작하는 것> 정도로 정의했던 것 같다. 어떤 후배들은 그건 ‘순정’이라고 말 했고,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잠잠했다. 다른 사람과 저울질 하지 않고, 온전히 깨끗한 상태. 나는 신체적 순결보다 심적 순결이 훨씬 멋지고 힘든 일 같다. 몸이 동한다거나 할 땐 참으면 그만이지만, 마음은 참아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순결, 하면 마음이 깨끗해야 된다는 생각부터 든다. 사실 그냥 그건 순결이라기보다 서로에 대한 일종의 예의겠지만. 최대한 과거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진실된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봐주는 것, 그게 순결이고 순정 같다. 순결이 별 거겠나, 순수하고 깨끗한 것? 그보단 그저 결이 순하면 순결이겠지.
모르겠다. 내 마음의 처녀막은 언제쯤 파열된 걸까. 교련 선생님이 보고 싶다.
2012.02.03.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