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방탈출

BC 330일

by 이휘


한동안은 예쁘고 생기 있는 여자들을 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의식적으로 젊고 섹시한 여자를 피해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옥외 광고판에도 있고, 릴스, 쇼츠, 커머셜, 예능, 다큐, 드라마, 음원차트, 심지어 현실세계에도 어디에나 있었다. 아무리 피해도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카톡방의 대화내용들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끔찍했다.


안되겠다 싶어 인터넷에 ‘트라우마’를 검색하다 ‘트라우마 셀프 치료법’을 발견했다. 방법은 너무도 간단했다. 눈동자 운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눈동자를 굴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감소된다고 했다.


어이가 없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눈동자를 와이퍼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상처가 극복된다는 게 이상했다. 그래도 눈을 감아 봤다. 다 이유가 있으니까 하라고 하는 거겠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본다. 이 바보 같은 행동을 따라하는 내가 너무 안쓰러웠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됐다. 하고 있는 동안은 호흡도 가라앉고, 이 행위 자체에 집중을 하다 보니 마음도 조금 안정될 수 있었다.


심리학자 샤피로 박사님. 그 분이 나를 구했다. 치료법의 정식 명칭은 EMDR(안구운동 민감소실 재처리 요법)인데,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발행한 <트라우마 진료 지침> 중 가장 효과적인 심리치료 중 하나라고 한다. 박사님이 기분이 안 좋을 때 공원에서 산책을 하던 중 주변을 둘러보다가 순간적으로 안도감을 느끼게 된 후 이 치료법을 개발했다고 한다. 눈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동작으로 뇌의 좌우를 교대로 자극해 주면, 뇌가 정보처리 기능을 활성화시켜서 기억들을 재처리해준다. 나는 다행히 걷는 걸 좋아해서, 가만히 앉아서 안구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한강까지 산책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오는 방법이 큰 도움이 됐다. 나무, 풀, 강, 오리 같은 걸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KakaoTalk_Photo_2023-04-26-17-07-11.jpeg 걸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던 산책로. 길을 쭉 따라가면 한강이 나온다.



“만약 어떤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면, 그냥 내가 이 생각을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몇 년 전 요가를 다닐 때 한 선생님이 해 준 말이었다. 명상을 할 때 모든 잡념들을 다 내려놓고 아무 생각 하지 말라는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랐다. 비워내려고 노력해도 비워지지가 않으면 그냥 그렇구나, 그러려니, 하며 그대로 두라고 했다. 그 후로 가끔씩 나를 지배하는 수많은 잡생각들을 물리치기 어려울 때면 억지로 떨쳐버리려고 애쓰기보단 오롯이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나 자신을 저 높고 먼 곳으로 끌어올려 전지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거다. 그럼 나도 모르게 내가 몰두하고 있던 생각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캄캄하고 어두운 이 절망의 방에서 겁을 먹거나 조급해할수록 탈출은 어려워질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방을 바라보면 나가는 길이 분명히 보일 거라고 믿는다.


힘이 들 때 도망가는 것보다 스스로를 마주하길 택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런 모습으로 이런 시기를 겪고 있는 나 자신을 집중해서 들여다보기로 한다. 내비게이션처럼 나의 현 위치를 보고, 내가 가야할 곳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가늠한다. 멀 수도 있고, 구불구불할 수도 있고, 가다가 길이 막힐 수도 뚫릴 수도 있다. 하지만 목적지는 분명하다. 나의 평안과 행복. 오늘도 그 방향을 향해서 조금씩 걸어간다. 계속해서 꾸준히 걸으면 다다를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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