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주근접 영광의 시대는 끝났다
경기도 버스는 브라질 삼바 춤을 춰야 세워준다는 괴담이 있었다. 마치 버스에 치일 각오로 "저를 보고 멈춰 주세요!" 라고 의사 표시를 해야 정거해 준다는 거였다. 강남을 가도 수원을 가도 부산을 가도 제주도를 가도, 심지어 같은 인천을 가도 1시간 30분이 걸린다는 마계 인천에서도 살아봤지만 말로만 듣던 경기도민이 된 건 생애 처음이었다. 직주근접을 온 몸으로 누렸던 영광의 시대는 잠정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친한 피디 작가들이 술 먹게 잠깐 나오라고 부르는 일도, 집에서 사무실까지 도어 투 도어가 15분이 걸리는 일도, 주말에 한가한 상암동을 여유롭게 걷는 일도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첫 외출의 두근거림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집 앞 정류장은 수많은 형형색색의 버스들이 정차하는 곳인데, 나는 그야말로 '뉴비'였다. 혼자서 알아서 생존해야만 하는 이 정글에서 신입은 그야말로 긴장했다. 정류장은 1, 2, 3, 4 이런 식으로 작게 칸이 나뉘어 있었다. 아무도 내게 경기도 버스 승차의 국룰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으니 질문들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고속버스터미널처럼 버스들이 반드시 저 숫자 앞에만 서는 걸까? 정말 손을 흔들어야 세워주는가? 기사님과 눈을 마주치며 방긋 웃을까?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버스를 탈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시무시한 빨간 버스는 나를 지나칠 것만 같은데 그보다 더 서러운 건 17분 후에 버스가 도착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버스가 17분 후에 도착할 수가 있는 거지? 가능한 배차간격이란 말인가. 정류장에 시간을 초단위로 버린다는 생각에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른다. 침대에 널부러져서 유튜브나 보는 시간은 안 아까우면서 이럴 때 만큼은 하루를 분단위로 쪼개 사는 CEO처럼 군다. 약속시간보다 늘 15분에서 20분 정도는 여유있게 도착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제 버스 배차간격까지 이러니 네이버 길찾기 소요시간보다 최소 30분은 먼저 집을 나서야 한다. 두 시간 전에 집에서 출발하는 나란 사람, 어떤데?
경기도 버스는 역시 서울의 파란 버스들보다는 바쁘고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시간의 결계에 갇혔는지 시차*도 있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삼바춤을 추지 않아도 정차해 주시고, 버스 소음을 제외하면 승객들도 조용했다. (모두들 갈 길이 멀어 체력을 안배하는 느낌도 든다.) 풍경도 다르다. 파란 버스는 하차를 위해 미리 미리 서서 기다리는데, 경기도 버스는 버스가 정류장에 서면 승객들이 그제야 일어난다. 작년 11월부터는 이태원 참사 이후로 시민 안전 우려가 높아지면서 경기 광역 버스의 입석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잔여좌석을 체크하고, 내가 타는 버스의 알림을 설정해 둔다. 하차벨이 어디 있는지 탈 때부터 미리 체크하는 습관도 생겼다. 그렇게 조금씩 적응해 간다.
출퇴근시간이 늘어나면 배고픔도 그만큼 늘어난다. 작가들은 보통 평균 오후 1~2시 출근인 경우가 많은데 집이 멀면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엔 밥때가 이르고 그렇다고 안 먹고 나가면 일하다 굶주림에 지치는 애매한 경우가 생긴다. 저녁을 안 먹고 퇴근하는 팀이면 낮에 간식을 미친듯이 먹어도 하루종일 배가 고프다. 헛배만 채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계양역에서 파는 어묵을 그렇게 열심히 사 먹었었다. 집까지 45분만 더 가면 되는데 죽어도 그걸 못 참아서. 가방에 있는 에너지 바는 상비약이었다. 나중에 마포로 이사했을 때에는 밥숟갈 놓자마자 출근하면 사무실이니 하루종일 뱃속이 여유로워 좋았다. 역시 서울 집값이 비싼 것도 결국 이런 삶의 질에 값을 매긴 게 아닐까 싶다. 치가 떨릴 정도로 거품이 심하긴 하지만.
운동에 드는 돈은 나중에 병원에 낼 진료비를 대체하는 예방접종 비용이라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돈으로 시간을 땡겨 사는 거라는 생각으로 택시비를 아낌없이 지불해 왔는데, 이제는 미터기가 억수로 무섭다. 이것도 경기도민이 극복해야 할 시련이다. 조금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이동시간을 더 잘 활용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굳이 굳이 대중교통을 고집한다. 한 해 평균 걸음수가 현저하게 낮아졌으니 일상생활 속에서 좀 더 많이 걷자는 생각으로 버틴다. 그러나 남들 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잠들 시간에 나는 아직 지하철인 그 기분을 또 느껴야 한다. 역에서 내리면 집까지 15분을 걷는다. "그 새끼는 서울 사냐?" <나의 해방일지> 염창희의 절규가 귓전에 들리는 것만 같다.
광역버스의 고단함에 대해 토로하는데 동생이 조용히 자신이 타고 다니는 버스의 도착 예정시간을 캡처해서 보여준다. '39분 후 도착'. 뭐라고? "나 오늘은 퇴근하는데 97분 떴어. 1601번은 미친 버스야." 동생은 버스 전광판을 보고 오류일 거라며 현실을 부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전광판의 숫자는 96분 95분으로 정직하게 떨어졌고 결국 다른 버스를 타고 무사히 퇴근에 성공했다. 동생은 내가 웃는 것 조차 거슬려했다. 그게 그렇게 웃겨? 97분이? 그래, 상암동까지 30분밖에 안 걸리는 내 삶은 축복받은 것이다. 뚜벅뚜벅 열심히 다녀야지. 나보다 더 오래, 더 묵묵하게, 더 질긴 인내심으로 광역 버스를 기다리는 모든 경기도 선배님들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조용히 입을 다물어 본다.
오늘은 퇴근길에 <쌈바의 여인>을 들어 주세요. 춤은 제가 출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