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옆에 있는 여자는 온도 변화에 민감한 일종의 '변온 동물'이었다. 날이 추울 때면 장갑을 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얼음물에서 이제 막 손을 뺀 것처럼 손과 발이 차가워지는 여자였다. 그래서 바람이 불고 날이 추워질 때면 남자는 알아서 자신의 호주머니를 빌려주고, 두 손으로는 차가워진 손과 발을 감싸주었다. 가끔 자신의 옷소매 속으로 여자의 손이 쓱-하고 들어올 때면 따뜻한 팔뚝이 여자의 차가운 손과 만나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금세 익숙해져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또 남자는 여자를 배고픔에 빠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두 번째 데이트 때 여자는 회사에서 늦게 나왔다. 그 바람에 저녁 8시나 돼서야 여자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무척이나 배가 고픈 상태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던 남자는 살짝 날카로워진 여자의 분위기를 느끼며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한 여자의 태도에 못내 서운했다.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고르고 음식이 언제 나오는지 0.1초에 한 번씩 주방을 확인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남자는 '아, 배가 많이 고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자가 벌레, 특히 벌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어느 여름날이었다. 데이트를 위해 방문한 한강에서 귀뚜라미를 만나자 여자는 '으악!!' 소리와 함께 높게 펄쩍 날아올랐다. 사람 몸집에 1/100000 쯤 되려나? 벌은 더 했다. 벌을 만날 때면 혼자 살겠다고 줄행랑을 치거나 소리를 빽 질러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하기 일수였다. 자연을 좋아하면서 벌레를 싫어하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생각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남자가 여자를 알아감과 동시에 여자도 남자의 보이지 않는 모습들을 발견해갔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우쭈쭈'하며 귀여워해 주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아니, 즐겼다. 여자가 자신을 '강아지'나 '너구리'에 비유할 때면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고 마치 자신의 친구인 양 생각했다. 여자가 '너구리!'라고 부르면 '앙!' 하고 대답하는 남자. 여자는 남자가 강아지나 너구리에 스스로를 동일시할 때면 그 모습이 재밌으면서도 또 귀여웠다. 비록 때때로 남자 친구가 아닌 반려동물이 된 것 같긴 했지만 애교 넘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남자는 다 큰 어른이었지만 여자 옆에서 만큼은 언제나 소년이었고 아이였다.
남자는 여자와 데이트가 없는 보통의 날들이면 게임을 즐기는 게임돌이었다. 부모님께서 10년 넘은 지금까지도 남자를 두고 "수능 전날에도 게임한 아이"라며 혀를 끌끌 차시곤 하는데 그 정도로 남자는 게임을 좋아했고 게임을 하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덕분에 여자도 '플레이스 스테이션', '라오어', 'RPG 게임' 등 생전 처음 듣는 게임 용어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자의 20대의 마지막 12월, 남자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여자는 남자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에게 순수함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와 함께 여자는 차 뒷자리에 몰래 숨겨둔 '플레이스 스테이션 4'를 가져와 건넸다.
4년 가까이 연애를 하며 우린 '완벽한 타인'에서 '둘도 없는 반쪽'이 되기까지 서서히 서로를 알게 되었다. 1년의 연애면 10년 지기 친구도 잘 모르는 습관과 모습들을 알기에 충분하고, 3년의 연애면 30년 동안 키운 부모님도 잘 모르는 서로의 성향과 취향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4년의 연애, 계절이 무려 15번 바뀌는 동안 우리는 10년 지기 친구보다도, 30년을 애써 키워주신 부모님보다도 어쩌면 서로를 깊게 알고 있었고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결심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 옆의 그 남자(그 여자)는 이 세상 누구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