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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론도 Nov 01. 2023

잊혀진 시간들

나의 보물 가방




집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둔 짐들. 그중에서도 맨 꼭대기 자리에서 늘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묵직한 가방 하나가 있다.  

    

결혼 후, 친정에 두기엔 자꾸 눈에 밟혀 사는 집으로 챙겨 왔는데 몇 년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이유였는지 늘 그 자리에 있던 가방 안이 궁금해 열어보게 된 날이 있었다. 책도 책장 안에 늘 꽂혀있던 것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날이 있듯이 그날은 그냥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무언가에 이끌려 조심스레 가방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과 주고받은 작은 쪽지와 편지, 비밀스럽게 주고받았던 교환일기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편지지가 아닌 영문 모를 종이들이 편지지인 척하며 한껏 뒤엉켜 있었다. 편지지를 살 곳이 마땅치 않았던 초등학교 때는 노트나 종이를 편지지로 꾸미거나, 잡지 책을 찢어 여백에 하고 싶은 말들을 적어 주기도 했었는데 그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가방 안에서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생소해진 우표도 그때는 한곳에 모아서 붙여놓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가지런히 붙은 우표를 가끔 열어보며 흐뭇해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잃어버려서 이젠 못 보게 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가방 안 가득 모인 편지들 사이에서 빨간색 무언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친구가 빨간 색종이를 찢어 강타와 내 이름 사이에 하트를 넣어 코팅해준 정성스러운 선물이었다.      


한창 ‘H.O.T’라는 남성 5인조 그룹이 인기를 끌던 초등학교 시절. 나는 강타를 좋아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한창 연예인에 관심이 생길 나이에 친구들 따라 나도 그냥 한 명 골랐던 것 같다.   

  

편지들을 읽다 보니 평소에 기억하지 못했던 지난 추억들이 다시 하나하나 살아나는 느낌이라 반가웠다.     

그렇게 한참을 추억을 쫓아, 읽다 보니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학창시절 늘 내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나의 단짝 친구였다.     


지금은 서로 연락도 뜸하고 자주 못 보며 지내지만, 학창 시절 동안 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준 고마운 친구이다.      


그 친구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 가서 처음으로 친해진 친구였다. 시골 학교라 같은 학년이 총 8명이었는데 그중 나를 제외한 유일한 여자친구이기도 했었다.   

   

늘 당당하고 솔직하면서도 예쁘고, 유쾌한 친구였다. 여자아이였지만 그 누구도 만만하게 보지 못할 만큼 용감하고 씩씩해서 감히 건드리지 못하던 친구이기도 했다. 그렇지 못한 나에게는 그 모습이 참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여자애가 둘 뿐이라 친해지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서로 편지도 주고받고 속 얘기도 하는 사이가 되자 학교 근처에 살았던 친구는 나를 자주 자기 집에 데려가 주곤 했다.     

 

학교 바로 앞에 있던 친구의 집은 나에겐 꿈같은 집이었다. 이사한 집에서 새로 전학 간 학교까지는 몸집이 작은 내 발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꽤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이라 학교에서 집으로 갈 수 있는 차편은 하루에 버스 3대가 전부였는데, 그중 하교 후 내가 탈 수 있었던 건 저녁 늦게 있었던 7시 10분 막차 버스뿐이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어두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집으로 걸어가야 했다. 어쩌다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기라도 하면 혼자 막차 시간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게 싫어서 그냥 걸었던 것 같다. 여름엔 해가 길어 그나마 나았는데 해가 짧은 계절에는 혼자 걸어야 했던 어둡고 긴 시골길이 유난히 더 무섭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평소 재밌게 봤던 ‘경찰청 사람들’에서 범죄 차량으로 나왔던 차와 비슷한 차가 곁을 지나기라도 하면 어찌나 오금이 저리던지. 괜히 길가에 있는 집이 내 집인 양 들어가는 척을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막차 시간 전까지 자기 집에 가 있자고 말해주는 날이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남의 집을 찾는 것이 괜히 눈치도 보이고 미안하기도 해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그런 걸 따지기엔 집까지 갈 길이 너무 멀었다.      


그때 갔던 친구의 집 분위기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약간은 서늘했던 집안의 공기, 친구의 아빠가 만드셨다는 나무 책장으로 꾸며진 나무 향이 나는 포근했던 친구의 방. 딸의 하루가 궁금해 늘 방으로 함께 따라 들어오시던 친구의 다정한 어머니. 누나 친구 왔다고 장난치는 개구쟁이 남동생과 티격태격 친구처럼 지내는 언니까지. 친구의 집 분위기는 모든 게 새롭고 좋아 보였다.      


그곳엔 컴퓨터도 있었는데 느린 속도였지만 함께 인터넷을 구경할 때면 그렇게 신기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친구의 집은 모든 게 부러웠고, 떠나기 아쉬운 곳이었다.    

 

내가 긴 시간 걸어서 집에 도착했을 때 마주하는 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집. 지극히 평범한데 그래서 편안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다.      


편지를 읽고 있자니 나는 이미 그때의 나로 돌아가 다시 어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조금은 위축되고 외로웠던 마음. 그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가 바로 그 친구였다. 


그렇다. 나에겐 늘 마음을 열어 서로를 토닥여주던 친구가 있었다. 길고 긴 길을 하염없이 걷던 어둡고, 추웠던 시간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가방 속 꾹꾹 눌러 쓴 편지들이 나에게 잊고 있던 시간을 상기시켜주었던 것 같다.      

어쩌면 살면서 더 많이 떠올려야 할 기억은 힘들고, 외롭고, 버거웠던 시간보다 그때의 나를 견디게 해 주었던 소중한 사람과 추억들이 아닐까.  

    

그렇게 살아가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지난날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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