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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론도 Apr 25. 2023

우리가 가장 어루만져야 할 감정은..

울지 못해 병들어가는 사람들.

내 글쓰기의 첫 경험은 초등학교 때 썼던 일기였다. 종이에 한 줄, 한 줄 쓰이는 혼잣말의 후련함이 자꾸 펜을 들게 했었던 것 같다. 한 글자씩 써나갈 때마다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물어봐 주는 것 같아 나는 일기장 앞에서는 늘 수다쟁이가 되었다. 머리가 커서 '백두산'이라고 놀림당하던 남자아이와 짝이 돼서 속상했을 때도, 내가 귀여워하던 강아지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사고로 죽어있었을 때도, 좋아하던 남자아이에게 고백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며 초조해할 때도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일기장에 쏟아내곤 했다. 늘 그렇게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고마운 친구가 바로 일기장이었다. 힘들고 지치고, 외로울 때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떠오르던 친구이기도 했던 것 같다.


너무 이런 혼잣말에 익숙해진 탓일까? 어른이 되어 힘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 핸드폰 연락처를 한없이 내려봐도 눌러지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흘러나오는 한숨과 함께 과연 내 방식이 옳았을까 되돌아보게 되었다. 밝게 웃는 나는 환영받지만 우울하고 슬픈 나는 왠지 싫어할 것 같아 늘 밝은 모습만 보이려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그러다 보니 슬프고 힘들 때의 나는 보여줄 곳이 점점 사라져 갔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는 감정 컨트롤 본부가 존재하는데, 그곳에서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등의 다섯 가지 감정들이 캐릭터로 등장한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라일리는 살던 곳을 떠나 이사를 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데 그러면서 라일리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감정들을 다루는 영화이다. 라일리를 위해 스스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 슬픔이가 본부를 떠나게 되고 그를 찾으러 나선 기쁨이가 함께 사라지면서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빠진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영화는 전개된다. 이 영화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사람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전하고 있다.


우울하고 슬픈 나를 누군가가 싫어할까 봐 또는 부담스러워할까 봐 사람들은 애써 잊은 척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우울해지고 지친 모습이 나약한 거라고 누가 정의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철저히 혼자 감당하려 애쓰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게 강한 사람인 것처럼.. 그래서 정작 슬퍼해야 할 때 제대로 슬퍼하지 못해 그런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까칠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울어야 할 때 마음껏 울지 못해 사람들은 화를 내며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라일리는 슬픔이가 돌아오면서 그제야 엉엉 운다. 부모님에게 자기의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게 된다. 사람들은 모른다. 화내고 까칠하게 굴면 그 태도에 기분 나빠 그 사람의 마음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멀어질 뿐. 하지만 오히려 힘든 마음을 털어놓으며 시원하게 울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그제야 힘들었구나 알게 된다. 그렇다고 매번 울면서 힘든 마음을 털어놓으라는 건 아니지만 어떠한 감정이든 솔직해지는 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무거운 감정이 사람들을 멀어지게 할까 걱정하는 건 본인 스스로다. 그 감정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본인이다. 그래서 더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해 위로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외로운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울어야 할 때 마음껏 울지 못하고 슬픈 감정을 애써 괜찮은 척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살았다. 그렇게 살아온 결과는 나에게 남겨진 외로움뿐이었다. 나의 감정을 수용받지 못한 어린 시절이 영향이 없지는 않지만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껏 울고 슬퍼할 용기를 내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이들이 울 때는 스스로 멈출 때까지 기다려주게 된다. 내 아이에게 외로움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마음껏 울고, 마음껏 슬퍼할 자유를 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부모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어쩌면 평생을 모르고 살지도 모를 그 외로움을 빚으로 남겨주고 싶지 않다. 그런 감정을 쏟아내도 아무 일 없이 오히려 위로를 받아 다시 힘낼 수 있다는 긍정의 경험을 만들어주고 싶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은 게 부모가 된 지금의 마음이다.


하버드대에서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결정적 요인에 대해서 연구한 바를 밝힌 적이 있다.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관계이기도 하면서 이런 관계의 사람이 없다는 것은 술, 담배만큼 건강에 해롭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 관계는 바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물어 바로 그 대상이 떠오른다면 아마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거나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야 한다. 나의 슬픔을 누군가에게 보일 수 있는 용기를 내보는 노력을 말이다. 눈물이 나면 참는 게 아니라 흘려보낼 줄 아는 너그러움을 나에게도 충분히 베풀어줘야 한다.


사람에게 의지한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일지 모르나 누군가에게는 너무 어려운 숙제 같은 일일 수도 있다. 혼자서는 절대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금 유능하다 소문난 정신의학과에 상담진료를 예약하려면 기본 몇 개월을 기다려야 차례가 오는 요즘이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해 마음에 병이 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아닐까? 나는 요즘 그래서 용기 내보는 중이다.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어보고 누군가에게 그런 나의 모습을 숨기지 않는 연습을 말이다. 덕분에 전보다 많이 마음이 건강해지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연락처에서 선뜻 통화 버튼을 누르게 되지는 않지만 그 또한 곧 가능해질 거라 믿는다.


정신과 진료예약이 몇 달 후까지도 꽉꽉 차는 이유가 뭘까? 곁에 있는 이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울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누군가에게 나의 슬픔을 보여줄 용기를 내기 어려워하는 마음 또한 그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신과 의사도 아니지만 누군가의 슬픔을 봤을 때 묵묵히 앞에 앉아 들어주려 한다. 그의 눈물이 그를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어줄 것을 알기에 어렵게 보인 그 눈물이 금세 그치지 않게 재촉하지 않고 그저 들어줄 뿐이다. 사람들이 울고 싶을 때 실컷 울고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더라도 세상은 조금 건강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음껏 울어본 사람이 울고 싶은 누군가를 가만히 기다려줄 수 있듯이 위로받아 본 사람이 누군가를 위로할 줄 알게 되는 것 같다. 서로가 그런 관계가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선순환이 점점 더 많아지는 날들이 오기를 바라본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건 그 도움이 돌고 돌아 결국엔 나를 돕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마음을 내어주면 그 마음이 결국엔 나에게 돌아오듯이 말이다. 내가 지난 묻어둔 감정들을 꺼내어 글로 옮겨보는 것 또한 나에게 울지 못하고 지나간 그 시간들을 다시 돌려주어 실컷 울 수 있게 해주고자 함이다. 그렇게 내가 치유되는 그 과정이 글로 남으면 누군가도 내 글을 보고 용기 내 볼 수 있지 않을까 간절히 바라며 말이다. 이게 지금 내가 에세이를 써나가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만약, 지금 눈물을 꾹꾹 눌러 삼키고 있다면 한 번쯤은 그냥 엉엉 울어봐도 괜찮다. 그건 절대 나약함이 아닌, 불필요한 투정이 아닌, 오히려 세상 가장 건강한 어른이 되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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