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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쿠나 Mar 26. 2022

소년의 기억 5

남자의 아주 가벼운 지난날, 아주 가벼운 이야기 -5부-

모든 것이 처음이던 시절, 그 시절의 경험들은 많은 것이 새로웠다. TV 속 연예인이 그저 멀기만 한 스타였다면, 거리가 닿을 듯 말듯한 영역 안에 있는 또래 속의 그녀, 이민정은 그야말로 가깝고도 멀었다.

며칠간 또래들과 기다리던 시간은, 오랜 기간 숙성을 통해 명품 와인이 탄생하듯, 그야말로 한 명의 선망이 되는 내 마음속의 스타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스타를 본 이상 달릴 수밖에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는 어려웠다. 한번 돋구워진 에너지는 어딘가로 발산해야만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 돌이켜보아도 그 에너지를 분출할 마땅한 대상이 내게는 떠오르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근래에는 그런 흥분이나 환희를 잘 느끼지 않을 뿐 여전히 표출하는 법에 대해서는 몽매하다.

아마 지금도 나는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좌우간 중학시절의 나는 달렸다.


달음박질의 끝은 집이었다. 꼭 집에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길이 가장 익숙했다. 생각과 계획이 없으면 몸은 가장 익숙한 습관을 따른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강변에 있었다. 학교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예뻤다. 서울 한복판 하굣길에서 울창한 가로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것들을 알 수 없었다.

누리는 것보다 갈망하는 것이 더 많았던 시절이다. 청춘의 어리석은 이면이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청춘은 눈부시게 빛나는 것일지도......


집에 도착해서 이민정의 실물 영접에 대한 자랑을 늘어놨다. 마냥 신이 나서 떠들어댔지만 부모님은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진 않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당최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어떤 여학생일 뿐이고, 게다가 그 또래 남중생의 언어는 다채롭지도 논리적이지도 못했을 터. 흥분만 했을 뿐 그간의 서사를 제대로 전달할 입담은 내게는 없었다. 다만 그녀와 동갑이었던 두 살 터울의 누이만이 내 이야기를 공감해주었다. 자신이 국민학교 시절 이민정을 보고 사람이 저리도 생길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내 확신에 대한 증명을 해주는 것 같아 기가 살았다. 그게 뭐라고......

하여간 이민정은 누이의 증언을 통해 다시금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 말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중앙계단으로 가지 않았다.

너무 멀리,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것만 같은 사람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바라보는 것은 어쩐지 나 스스로에게 큰 고통을 가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여름날 땀 한 바가지를 흘리고도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못한 채 목이 말라죽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고 지독한 짝사랑을 예감했다기보다는, 아예 나와는 비길 수 없는 사람임을 직감했던 것이리라. 한 번이면 족하다, 일종의 자족을 선택해버렸다.

 

그때 다니던 중학교는 지금은 많은 연예인들을 배출하고, 어찌 보면 그 동네는 지금은 연예인들의 산실이 된 지역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저 평범한, 유명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아주 일반적인 중학교였다. 게다가 들리는 소리로는 이민정은 워낙 내성적이어서 길거리 캐스팅이라고 하여 종종 그녀의 미모를 알아보는 이들이 접근해와도 쳐다도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만 드문드문 접했다.


요즘에야 유튜브니 BJ니 하면서 방송의 지형이 넓어졌지만 당시의 방송국은 오직 지상파 3사와 교육방송 정도였기 때문에 TV에 나오는 것이 지금보다도 훨씬 신기하고 부러울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정이 탤런트나 연예인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괜스레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녀를 가슴 뛰게 흠모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아서, 애당초 내 세계의 범주에 편입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으로 정리한 채 기억의 상자 안에 남겨 두었을 뿐이었다.


어느덧 이사를 가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갔다. 이민정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일은 내 삶에서 없었다. 시간은 흘러 느지막이 군대에 가서 장교생활을 하는데, 어느 날 상황실 병사 녀석이 말했다.

“중대장님, 요즘은 야가 죽입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이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야, 이씨. 내가 네 친구냐. 니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왜 나한테 얘기해 인마, 그냥 너나 좋아하시고, 전화나 잘 받아 이 녀석아”

늦게 군에 갔다고 해도 고작해야 이십 대 중후반이었는데, 내 말투는 영락없는 영감탱이였다. 괜한 위엄을 잡아보겠다고 말은 그리 했지만, 아직 피 끓던 시기라 병사가 이야기 한 TV 화면에 눈이 갔다.


                                                                                                                      -계속-



작가 '원우씨'와 함께 호우시절이라는 채널로 그 시절 반짝거렸던 때를 추억하며

영화를 리뷰하고 있는 조쿠나입니다.

영화에 대한 더욱 다양한 이야기는 네이버 오디오클립 ‘호우시절’과

유튜브 ‘영화발골채널 호우시절’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두 수다쟁이의 이야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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