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까까머리 소년의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있던 사람이 TV에 나와 말을 하고 있었다. 중앙계단에 모여서 그녀를 바라볼 때 지었던 그때의 내 웃음보다 더 환하게 생글생글 웃으며. 그리고 여전히 내 동공의 열 배는 됨직한 큰 눈을 껌뻑이면서.
어, 어, 저 사람, 왜 TV에 나오지…..
TV 속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속에 찰나의 시간 배신감이 스쳤다. 분명 수많은 길거리 캐스팅에도 끄떡없었다고 들었는데. 내 정보의 불확실성일까(사실 정보랄게 있었겠냐만, 그저 사람들의 뜬소문일 뿐) 기실 내가 배신감을 가질 것은 없지만 어떤 로마 황제의 탄식처럼, “이민정 너마저”라는 마음이 아주 조금은 마음속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마음을 가득 채운 감정은 소년 시절의 기억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니 조금 더 예뻐진 모습의 그녀에 대한 반가움이었으리라. 당시 그녀가 나온 영상은 ‘그대 웃어요’라는 드라마였는데, 그날 이후로 종종 주말에 전투대기를 할 때면 어김없이 그 드라마를 틀어놓았다.
시간은 또 한 번 속절없이 흘렀다. 군생활 3년은 길었지만 이른바 국방부 시계는 성실하다는 상투적인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결국은 내게도 전역의 시간은 왔다.
전역은 기뻤다. 솔직한 고백으로, 전역 날에서야 나는 비로소 “그대 웃어요”라는 그녀의 말에 환한 웃음으로 회신할 수 있었다.
전역을 하고 취업난 와중에도 그럭저럭 회사에 입사해 안온한 일상을 누렸다. 신입사원 막내시절, 딱히 일은 없고, 회사의 사내 봉사활동에 선배들 대신 참석하곤 했다. 그때 참석한 프로그램 중 하나가 입양 대기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거기서 내가 제법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더불어 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재능이 있다는 착각도 함께..
봉사에 참여한 동료들이 건넨 아이들을 제법 잘 본다는 사회적 언어를 나는 구별하지 못했다. 단단한 착각은 결국 오랫동안 다닌 교회의 유아부 봉사로 이어지게 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은 있다. 유아부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동료들이 건넨 칭찬에 “미혼 남성 치고”, “비교적”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는 것을. 착각은 비로소 또 한 번의 자각을 통해 교정됐지만, 일상의 관성을 잘 바꾸지 않는 게으른 나는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유아부 교사를 오래 하면서 나름 지키고 있는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절대 담임선생을 맡지 않는 것이다. 한 반에 예닐곱 명의 아이들을 따사로운 웃음으로 1시간 내내 바라봐 줄 자신이 없었다. 그보다는 아이들을 맞이하며 이름표를 달아주고, 신발을 벗겨주고는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선생님께 인도해주는 것이 훨씬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투박하게 생긴 남자 선생님이 문 앞에 있자 아이들이 얼른 피해서 상냥한 담임선생님께 재빨리 들어가니 서럽게 울면서 뜻하지 않게 생기는 병목현상이 해소됐다. 뜻밖의 효과를 확인한 이후로, 교회의 다른 선생님들도 나도, 내가 아이들을 맞이하고 신발장을 관리하는 게 서로에게 가장 알맞은 역할인 것으로 정리됐다. 아이들은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신발을 벗자마자 자신의 담임 선생님께 달려갔고, 아이의 부모님은 문 앞에서 실랑이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편했다. 선생님들은 선생님들 대로 아이들이 달려들어오니 기분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어휘력이 상당한 아이들이 때때로 악당이라며 나를 몰아세울 때 교회에서 이 어찌 망측한 누명인가 싶기는 했지만 견딜만했다. 아이들을 맞이하며 명찰을 달아준 덕분에 가장 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게 되었던 것은 덤으로 주어진 행복이었다. 김춘수가 말했던가. 처음에는 무섭다고만 하던 아이들도 얼굴이 익숙해지고 내가 매번 가장 먼저 이름을 부르며 반겨주자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로 내게 안겨왔다.
유아부에서 담임을 맡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 외에도 아주 큰 장점이 있었다. 바로 부담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시라. 네, 다섯 살의 아이들에게 매주 나오던 담임의 부재는 매우 큰 일이다. 반면 내가 하던 역할은 대차게 솔직히 말하면 딱히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큰 불편이 발생할 역할은 아니었다. 종종 회사나 급한 상황이 있으면 빼먹는다고 해서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교사로서의 본분을 잊어갈 정도로 결석을 밥 먹듯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가끔 부득이한 일들이 생기면 한 주 빠지는 데 있어서 크게 눈치 보이지 않는 정도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회사 일이었겠지. 그렇게 한 주를 건너뛰고 다음 주에 다시 교회에 갔더니 선생님들이 상기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학생 때 하굣길 중앙계단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다행히 나 같은 사람들만 있지는 않았다. 선생님들이 시끄러운 연유를 물으니 바로 답이 왔다. 바로 전 주, 이병헌과 이민정의 아들이 우리 유아부에 출석했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