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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샘 Jul 27. 2020

다시, 제주 #5 : 가끔 삶은 두 번째가 더 좋다

랜선 여행 이야기 시리즈 '다시, 제주'

방학마다 여행을 다니지만 겨울방학 여행엔 반드시 '제주'가 들어있습니다. 앞선 '제주'관련 글들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 듯합니다. 도식을 위해 먼저 읽고 오시면 더 이해가 깊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이 글만 읽으셔도 좋습니다. 세상에는 원래 경계란 없는 것이니까요.


무려 넉 달 전에 예매해둔 비행기 티켓이었습니다. 그렇게 예매해두어야 여행과 일상 사이의 긴 시간을 설렘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벌써 여행 다녀온 지 며칠이 되었고 또 며칠 뒤면 또 비행기에 올라 멀리 여행을 가지만 일단 방학 중 첫 비행기는 제주행입니다. 글을 참 뜸하게 씁니다. 결핍이 빠진 일상은 왠지 싹 틔우는 글의 씨앗이 적습니다.



새벽 비행은 늘 이렇게 해 뜨는 풍경을 보여줍니다. 여행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꾸벅꾸벅 졸다 옆자리 앉은 어느 커플의 감탄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얼떨결에 보게 된 풍경입니다. 늘 익숙하고 자주 보는 것들에 감흥을 잃어버리곤 하지만 그런 수많은 익숙함이 누군가에는 설레는 대상이라는 것 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벵디. 제주말로 넓은 평지라고 하네요.


참, 글은 예전 글이지만 현재의 소식을 전하자면 KCTV제주방송에서 매년 개최하는 2020 제주어 창작동요제에 창작동요를 한곡 출품했는데 본선에 들었습니다. 조만간 좋은 기회에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글로 돌아갑니다.



공항에 내려선 배가 너무 고파서 일단 아침을 해결하기로 합니다. 제주는 아무리 멀어야 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부담 없이 끝에서 끝으로 왔다 가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잘 모르겠긴 합니다. 그리고 먹는 이야기는 잘 안 쓰는데 오늘은 이 먹는 곳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글을 갈무리하려고 합니다.


아침을 해결하여 온 이곳은 원래 입소문이 많은 곳이기도 하고'밤도깨비'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더 알려진 곳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얻은 정보는 예약 방법뿐입니다. 준비 시간에 문 앞에 붙여둔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어두는 것 그게 이곳의 예약 방식이라고 합니다.


여섯 번째 손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삼 년 동안 다섯 번 제주를 여행하는 동안 접한 제주와 이번에 여행한 제주는 달라진 점이 몇몇 있습니다. 첫째는 중국 분들을 거의 만날 수 없다는 것, 두 번째는 작년까지만 해도 있던 어떤 것들이 사라지거나 없는 어떤 것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단 것, 마지막으로 휴업일 그리고 브레이크 타임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다른 점은 식당이든 박물관이든, 꼭 가보고 싶던 장소이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반갑지만은 않은 '제주의 날씨'입니다. 이번엔 삼 일간 제주에 있으면서 이슬비, 폭우, 산들바람, 센바람, 따스한 날씨, 강추위 등 일상에 겪을 수 있는 대부분의 날씨를 다 경험했습니다.


돌문어 덮밥. 다리가 하나, 둘, 셋, 넷. 반 마리인가 봅니다.


이 식당의 주메뉴는 '돌문어 덮밥'입니다. 심지어 원하는 만큼 주문할 수도 없습니다. 글을 조금만 위로 거슬러보시면 예약하는 종이 옆에 제한된 수량에 대한 안내가 있습니다. 성인 기준으로 2인당 1개만 주문이 가능합니다. 희한하기도 하지요 자본주의 사회인데 메뉴 수량을 제한한다니요. 그런데 참 이상한 건 동네 식당에서 이렇게 하면 심하면 삿대질도 오갈 상황인데 여기 오신 분들은 다들 금방 수긍합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이 많은 테이블은 식사를 해야 하니 주메뉴 외에 다른 메뉴도 주문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한용운 님의 '복종'에 나오는 시적 자아처럼 스스로 기쁨인 듯 '복종'합니다.


그래서 주메뉴 외에 하나를 더 주문했습니다. '간장 무슨 덮밥'입니다. 이름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넌 이름이 뭐니?


이 두 가지 메뉴를 서빙해주신 분께서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고 테이블을 떠났습니다.



소스가 적어 보이지만 밑에 충분히 있으니
한꺼번에 비벼 드시지 말고
조금씩 간을 조절해 가면서 비벼 드세요.

친절하셨지만 배고픈 귀엔 잘 들리지 않았나 봅니다. 잘 들었는데 잘 개의치 않았단 게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싹 무시하고 돌문어를 가위로 먹기 좋게 자르고 전체를 다 비볐습니다. 정말 말 안 드는 인류입니다. 그렇게 한꺼번에 비비고 먹기 시작했는데 첫 몇 숟가락은 배고픔이 반찬이라고 참 맛있었는데, 숟가락이 입안에 더해질수록 세세한 맛들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짠맛, 느끼함, 매콤함. 그런데 맛있음은 점점 멀리 달아납니다. 나중엔 느끼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위로도 했습니다.


이렇게 느끼하니까 많이 주문 못하게 하고
두 사람당 한 개만 주문할 수 있는 건가?

그 느끼함에 지쳐갈 즈음 이름도 모른 채 주문되어 식어가던 다른 메뉴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다 비비지 않고 두어 번 떠먹을 만큼만 소스를 비볐습니다. 처음부터 강렬한 맛은 없었지만 그렇게 점점 입맛에 맞게 조금씩 비벼가다 보니 정말 알맞은 맛을 찾았습니다. 음식 만든 이의 말을 흘려들어 근사한 메뉴 하나를 느끼한 어떤 것으로 전락시켜버리고 마는 실수를 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아침을 해결하고 삼 일간의 여행을 이어가는 동안 이번 제주 여행의 첫 식사였던 식당의 메뉴 중에 내내 침샘을 자극한 건 애석하게 '돌문어 덮밥'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주문한 '이를 모를 다른 덮밥'이었습니다. 다시 '돌문어 덮밥'을 제대로 먹기 전까지는 미안하지만 우리의 첫 대면은 그렇게 마무리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나 저는 애초에 처음 것이 오래 머물렀던 좋은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뭐든지 두 번째나 그다음에 오는 것들이 오래 함께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자꾸 그렇다 보니 처음이 근사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근사한 두 번째를 기대해 보기도 하고, 잘 안된 첫 번째에 크게 실망하기보단 부족한 걸 채워 괜찮은 두 번째에 대한 설렘을 키웁니다. '돌문어 덮밥'도 두 번째를 기대해야겠습니다.


두 사람당 한 개만 주문 가능한 사실엔 금방 복종하고선 제대로 먹는 방법엔 그러지 못한 첫 번째를 뒤로합니다. 그리고 아마 곧 다시 만날 두 번째에선 제대로 비벼보겠단 생각을 하며 제주 여행을 시작합니다.


언제 또 글을 마무리할지 모르겠지만 다음 이야기는 '종달리' 이야기입니다.


종달리 도자기 체험공방.


<에필로그>

두 번째 '돌문어 덮밥'이 생각지도 않게 금방 이루어졌습니다. 제주에 갈 일이 금방 생겼지요. 물론 일 때문이었지만요. 이번엔 여유롭게 정말 여유롭게 자리도 앉고, 음식도 편안하게 즐겼습니다.


먹는 창박은 이런 풍경입니다. 맑은 제주도 좋지만 흐린 제주도 너무 좋습니다.


벵디에 난 창들은 제주 바다를 담은 그냥 액자였습니다. 유리창이 아니라 액자였지요. 제주는 어디라도 마음에 듭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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