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한 조각 :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

by 마리샘
SE-1f622b20-31ee-11f0-b439-f7ad48ee7ce3.jpg?type=w1 손글씨까지 고운 친구가 전해준 편지 한통

그런 분위기 있습니다. 뭔가 쭈뼛쭈뼛해지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의 시간과 장소. 해마다 학교에서도 몇번 그런 느낌의 시간과 장소가 있는데 스승의 날이 그것입니다. 학창시절의 저는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들로 가득합니다. 어쩌면 좋은 기억들만 남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긴 합니다.


얼마전 고등학교 1, 3학년 2년을 함께한 담임 선생님께 갑작스런 전화를 한통 받았습니다. 다짜고자 이름을 부르시며 혼내셨습니다.


"너 자주 전화도 안하고 뭘 그렇게 바쁘게 사냐?

선생님이 궁금해서 전화 한통 했다.

너 후배 00이 만났는데 너 바쁘게 산다고 이야기하더라.

선생님이 제자에게 안부 전화 걸게 하는 멋진 놈이네."


마음 따뜻한 호랑이 같았던 담임선생님의 통화 시작 멘트 중


아이고 세상에 선생님께서 제자에게 안부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민망하고 부끄러울수가요. 종종 연락드려 안부를 여쭙는데 요 몇년 뭘 그렇게 바쁘다고 소소한 일상을 놓치고 있었을까요. 선생님은 여전히 저를 그리고 그 시절 함께했던 우리를 열 아홉 고3으로 생각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늘 나이를 물으시고는 우리 나이를 듣고 나시면 너무나 놀라시곤 합니다. 언제 너희 그렇게 나이들었냐며. 고3때 선생님의 나이에 바로 우리가 서있습니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낼 만큼 울고 웃고 슬펐던 시간들을 함께해주신 선생님이시기도 하고 함께했던 개구지고 고마운 반 친구들도 떠오릅니다. 요 몇줄 적으면서도 저는 웃음을 지었습니다. 눈물도 나구요. 참 좋았습니다.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의 시간이었던 고3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친구들과 선생님 덕분이었거든요.


최근의 이런 에피소드와 함께 맞이한 스승의 날, 과학 교담 시간에 5학년 친구가 조용히 오더니 부끄러운 얼굴로 편지를 한통 건네주고 총총 사라졌습니다. 언제나 성실한, 한없이 성실한, 그러고도 성실한 모습의 학생입니다.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있고 묻는 말에 단 한번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의 최선을 대답을 내놓은 그런 친구입니다.


수업 시간이라 읽어보지 못하고 하루의 수업을 다 마치고 오후에 차분이 앉아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선생님에겐 너무나 고맙고 감동스런 편지였습니다. 담임선생님도 아닌 교담 선생님에게, 그리고 저학년도 아니고 고학년인 친구가 이런 편지를 썼다는 건 정말 자발적이고 마음을 담아 썼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꾹꾹 눌러 한줄 한줄 몇번 다시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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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과학과 영어를 어려워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샘 덕분에 과학과 영어가 즐거워졌습니다.'


과학과 영어 수업을 하는 교담 교사로서 이 문구 하나면 새로운 학교에 와서 적응하고 매 시간 수업 준비에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한 증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알아주는 학생, 그렇게 느끼는 학생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감동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알기에 어느 순간 허투루 할 수 없는 성격으로 피곤한 일상이지만 편지 한통으로 충분하고도 괜찮은 위로를 전해받았습니다.


누구에게라도 편지를 받게 되면 꼭 답장을 합니다. 특히 학생들에게 편지를 받았을 때는 절대 그냥 넘기지 않고 손글씨로 답장을 전하고 있습니다. 작은 쪽지라 할지라두요. 중요한 부분인데 나의 정성에 대답하는 무언가가 주는 그 감동을 꼭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교직 생활 동안 학생들에게 꼭 답장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디지털이 이미 아날로그와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일상화된 시대에 손글씨로 무언가 마음을 전하는 일은 예전보다 더 특별한 일입니다.

예쁜 꽃편지지를 놓고 오랜만에 볼펜을 굴려가며 틀린 글씨 없도록 신경쓰며 답장을 써내려갔고 쓰다보니 언제나 만연체인 마리샘답게 두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편지는 다 쓰고 다시 읽어보면 안됩니다. 그럼 못 보냅니다. 다시 읽지 않고 바로 봉인합니다. 아마도 선생님같은 소리만 가득 적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악동뮤지션의 노래 '오랜 날 오랜 밤'의 가사 '머뭇거려도 거짓은 없었어'처럼 거짓 없이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SE-1f65fbb1-31ee-11f0-b439-57267063cb0f.jpg?type=w1 오랜만에 볼펜 굴리며 써본 편지. 40여년째 글자를 그리는 중.

손글씨로 편지를 전한게 정말 오래된 것 같습니다. 편지를 쓴게 아니라 감동을 썼네요.


살면서 일상에 감동을 주는 건 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살이에 왠만해선 큰 동요없이 지내는데 분명한 건 나이가 들수록 작은 것들, 소소한 작은 일들이 주는 자극적이지 않는 고마운 일들에 감동이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다'던 사춘기 가득한 어느 글귀에 웃어 넘겼는데 오늘은 정말 그렇습니다.


'스승의 날이 주는 분위기는 반갑지 않지만

학생들과 조금은 진심을 나눌 수 있어서 좋다.'


<2025년 5월 17일>


*이 글은 네이버블로그 마리샘에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marriesam/223868446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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