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여름 여행 #1
미루고 미루다 더 미루면 가을의 어디쯤일 듯하여 여름의 시간들을 정리해 봅니다.
올여름엔 수많은 짧은 여행들이 있었습니다. 제주가 그랬고 또 딸내미들과 나선 여름 여행이 그랬습니다. 정말 올여름엔 특별한 계획 없이, 정확히는 무계획의 여행을 나섰습니다. 준비는 철저하게 했지만 발길 닿는 대로 한번 가보자는 의견이 모여 그렇게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모를 캠핑도 생각하여 짐을 꾸리다 보니 9인승 자동차가 사람 3명 앉을 자리를 빼고는 짐으로 가득 찼습니다. 카메라까지 챙기다 보니 정말 짐이 어마어마했습니다. 무계획의 여행은 원래 목적이 심플하고 가벼운 여행을 가보려던 것이었는데 출발부터 엄청나게 무거운 출발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결국 캠핑 짐은 한 번도 펴질 못했습니다. 날씨도 너무 덥고 딸내미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 안전 문제도 있어서 결국 숙박은 모두 숙소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출발하여 정한 첫 번째 목적지는 동쪽으로 향하던 길에 만난 보성역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차가 다니고 있는 역입니다. 사실 목적지라기보다는 갈 길이 멀어 잠깐 쉬어가자는 느낌이었는데 머물러 버렸습니다.
보성역 입구에는 동요 '꽃밭에서(어효선 작사/ 권길상 작곡)'의 악보가 흰색분필로 사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역 안쪽에는 말끔한 풍금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꽃밭에서'를 두꺼운 손가락으로 연주하며 노래도 불렀지요. 아무도 없어서 누군가에게 민폐는 아니었으니 너무 염려는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렇게 부르라고 치라고 둔 거라고 하더라구요.
딸내미들이 혼자 추억에 잠겨 연주하는 모습을 살짝 영상으로 남겨주었으면 바람은 있었으나 자매는 또 자기들만의 놀이에 빠져 아빠의 연주와 노래엔 관심이 없습니다. 아빠와 동요란 그저 딸내미들이 성장하며 겪어온 풍경의 한조각일 따름이지요.
그래서 이날 연주한 영상은 아니지만 1년 전 같은 보성 지역에 있는 명소 보성여관 홀에 있던 풍금을 연주했던 영상을 짧게 실어봅니다.
그래도 또 노래를 들어야겠기에 KBS '누가 누가 잘하나' 유튜브 영상 중에 재생목록에 넣어두고 종종 듣는 백솔 친구가 노래한 '꽃밭에서' 영상을 가져와 봅니다.
'꽃밭에서'라는 동요를 정말 정말 좋아합니다. 뭐랄까 애틋한 분위기도 있고 또 아빠랑 같이 채송화를 심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하지만 이 노랫말은 사실 우리의 아픈 과거인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빠와의 추억을 그리는 노랫말입니다. 아빠랑 함께 만들어 놓은 꽃밭의 꽃들은 피어 만발인데 돌아오지 못하는 아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꽃밭에서(어효선 작사 / 권길상 작곡)' 노랫말 전문
지금 세대의 어린이들에게는 다소 무거운 내용일 수 있지만 그런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아빠랑 뭔가를 하는 일은 많은 아빠들의 마음을 울컥하게 합니다. 같은 이유로 아빠와의 추억을 담은 노래들 역시 마음이 더 울컥합니다.
거기에 더해 어릴 적 우리 집 마당 수돗가에 채송화가 만발하면 정말 행복했던 기억도 있어서 더 그렇습니다. 심지어 마당 수돗가에 청포도 줄기도 있어서 시큼한 청포도를 먹었던 기억도 같이 따라옵니다. 대학생 때까지도 시골집엔 그런 추억들이 정말 많습니다.
거의 23년전에 쓴 글을 희귀한 저의 산문집 '감기 한잔, 외로움 두 스푼(이세일, 2017)'에서 한편 가져와 봅니다.
2002년 7월 5일
#꽃밭 #채송화 #수돗가 #여름이면청포도가가득했는데 #지금은아련한추억
이세일 산문집 '감기 한잔, 외로움 두 스푼' 중 '꽃밭에서 - 채송화가 있는 풍경' 전문
보성에 머무르게 된 김에 근처의 영화 벽화 골목 같은 곳도 들렀습니다.
한 없이 소소한 벽화들이 작은 동네 담을 타고 정겹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인상적인 글들도 많고 닮은 듯 안 닮은 듯한 어릴 적 극장 간판 같은 그림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장면은 바로 이 담벼락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놀라며 옛날에는 이랬냐 물어서 차마 거짓말하진 못하고 그랬다고 답해주었습니다. 무섭다는 말에 좀 뭐랄까 죄지은 느낌이었습니다. 굳이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또 안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에 대한 의지와 바람이 느껴졌습니다.
옛날에는 물리적으로 저렇게 날을 세우고 살았지만 마음만은 잘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저런 물리적 날카로움은 덜해졌지만 마음 속에 어쩌면 저것보다 더한 날을 세우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벽을 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 아니고 스스로의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안 밖으로 이중 삼중으로 두껍고 높은 벽을 매일 한칸씩 더 더해가는 스스로에게 정말 놀랄때가 많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 한참을 더 걷고 걸었습니다.
이렇게 길게 쓰려던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잊었던 추억까지 새록새록 딸려 올라어고 생각도 깊어져 글이 길어졌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또 부지런히 정리해서 남겨볼까 합니다.
<2025년 10월 10일>
*이 글은 네이버블로그 마리샘에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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