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파이 브릿지>를 보고
스파이 브릿지라는 영화는 1957년, 미-소 간 냉전 갈등이 극심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우리나라도 현재 '빨갱이' 등등 레드 콤플렉스에 민감한데, 저 시절은 6.25 전쟁이 휴전한 지 4년 밖에 되지 않았던 때다.
과거 내가 초등학생 시절만 해도 북한군은 마치 도깨비로 묘사됐고, 북한은 반드시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지금이야 '러시아', '중국'이라고 하지 과거 '소련', '중공'이라고 했었고, 이들 나라로 가는 것도 쉽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과거 냉전 시기를 경험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다 더 실 감나고 생생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이미지만 봐도 미국-소련의 대비 구도다.)
(아래부터는 영화 스포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전반부는 보험 전문 변호사인 주인공이 소련 스파이의 변호를 맡게 되고, 후반부는 소련, 동독과 포로 교환 협상을 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후반부의 내용에 더 관심이 가고 감동적이겠지만, 나는 전반부의 내용에 생각할 부분이 더 많다고 느꼈다.
주인공은 자신이 하고 싶어서 소련 스파이의 변호를 맡은 게 아니었다. 당시 냉전시대에 소련 스파이도 미국에서 변호를 받는다는 그런 이미지 메이킹을 하려는 의도에서 부탁받은 것이었다.
한 마디로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형식적인 변론만 하라'는 '답정너' 변론을 하라는 것이다.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고, 제대로 된 절차는 지켜지지 않는다.
소련 스파이는 당연히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하며, 그나마 미국이니까 이 정도로 절차를 지켜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그런 분위기를 주인공은 맞이하게 된다.
내키지 않은 변호를 맡았지만 주인공은 '심지어 소련 스파이라도 변론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그런데 이건 좋게 말하면 원칙을 지키는 것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원칙을 지키기로 한다.
내가 생각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는 누구나 변론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법 이론 상으로는 그의 말이 맞다.
그러나 워낙에 냉전시대로 인해 소련에 대한 적개심이 팽배한 상황에서 주인공의 행위는 그야말로 이적행위로 여겨졌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빨갱이' 취급받은 것이다.
전철 안에서 신문에 나온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노려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누군가가 주인공의 집에 총격을 가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범인을 잡아달라고 하자, 어떤 경찰은 "왜 스파이를 변호하느냐?"며 그에게 따져 묻기도 한다.
주인공은 나름의 원칙을 지키려고 했지만, 그는 물론 그의 가족까지도 위험에 처하는 상황에 놓였다.
내가 만약 주인공이 처했던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나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파이의 변론을 맡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나와 가족의 불이익이 무서운 것 까지는 갈 필요도 없이 애국심을 주장했을 것 같다. 그리고 변론은 커녕 스파이를 비난하는 선봉에 섰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과거에 나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가족이나 조직을 이유로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직생활을 하면서, 현실에 찌들면서 나는 어떤 게 옳고 그른지도 알지만, 내 행동으로 인해 어떤 불이익이 오는 지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후폭풍은 '나'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내 주위'까지 미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막상 현실 속에서 닥쳤을 때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까지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데, 이 영화를 보면서 신념과 원칙-현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그리고 나도 비겁한 사람보다는 원칙있고 행동하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조력해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p.s
역시 스필버그-행크스 조합은 믿을 만 했다.
배우들이 다 명연기를 보여주지만 스파이 역의 마크 라이언스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다.
영화 속 소련, 독일어는 번역이 안되는 데, 그래서 더 냉전상황이 실감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