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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seilleu Aug 24. 2016

사보(社報)에 대한 기억과 악연

한 달 후에 ‘김영란 법(法)’이 시행된다고 한다. 나와 같은 기자 직군의 사람들도 법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사보도 김영란법 범위에 포함되면서 사보를 폐간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나는 4년전 이맘때 사보제작에 참여한 적이 있다. 기자로 활동하다가 큰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취재기자에서 편집기자 직으로 갈 뻔하다가 당시 신설된 사보제작팀이 투입이 된 것이다.


솔직히 이 업무를 하기 싫었다. 현장을 누비면서 기자를 해야 하는데, 무능한 직원으로 분류된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또한 기자 직을 했을 때는 이른바 활동비라고 해서 통신비와 교통비 지원이 있었는데(약 17만원), 이게 사라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타격이 있었다.



당시 내가 주로 참여했던 사보는 L 공기업(땅과 관련 있는)과 K 공기업(요즘 누진세 등등 논란 있는)이었다. 공기업 중에서도 네임밸류가 꽤 높았다.


사보제작은 이른바 ‘을’의 임무를 수행한다. 지면제작에 대한 아이템을 기획하고 이걸 정리해서 '갑님'에게 보내고 갑님이 컨펌하면 진행하고, 지적을 하면 지적을 반영해서 다시 보낸다.


기사 마감도 동일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생각해보면 K는 겉으로는 매너가 있는데 이견은 허용하지 않는 ‘답정너’의 느낌, L은 걸핏하면 재계약 드립을 치는 ‘압박형’의 느낌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들은 돈을 지불하는 고객이자 주인이며, 우리는 지시를 받아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주로 했던 L은 격주로 발행했는데,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갑님이 선정한 건설 현장을 방문해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출처 : 뉴시스. 사진과 본문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갑님과 동행하는데 나는 기자가 아닌 ‘작가’로 소개받았다. (글을 써주는 사람이라는 뜻) 현장 건설사진은 물론 직원들이 나오는 연출 사진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진 프리랜서도 동행했다. 한 번은 보금자리에 입주한 가정을 찾아가 인터뷰한 적도 있다.


K는 꼼꼼하게 지적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당시 사장의 사진이 면마다 들어가서 모 일간지는 ‘저 공기업 사보는 사장 홍보 치적용’이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때도 전력난 이슈가 있었는데 한 번은 1면에 어떤 사진이 들어가서 다들 “이거 쑈 하네”하고 웃었다. 그 사진은 K 홍보팀들이 점심시간 사무실에서 불을 끄고 부채질을 하는 모습이었는데 한 마디로 ‘우리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를 나타내는 그것이었다.



그런데 국내 대표적인 공기업과 업무를 해보니 그야말로 ‘갑질’의 진수를 느낄 수 있었다. 한 때 사람들이 많이 나갈 때는 2주 간격으로 퇴사를 했는데 시시때때로 변경되고 요구받는 갑질에 지치고 그렇다고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연봉이 높기는커녕 나 같은 경우는 깎이니 그럴 만도 했다.


거기에 일에 대한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구조도 한몫했다.  


또한 공기업 특유의 보고 문화가 있어서 그런가, 예기치 않게 그들의 보고일정이 생기면 그에 따라 ‘을질’을 하러 갔다. 저녁 먹다가도 지시사항이 떨어지면 보고용 자료를 급조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보제작이 그렇게 마진이 남지도 않았다. 매 호 마다 정산되는 걸로 아는데 아까 언급한 사진 프리랜서 비용이나 각종 기고에 대한 비용도 다 우리가 부담했다.


심지어 L의 경우는 계간지도 만들었는데 낱말퍼즐 만드는 건 물론 당첨자에 대한 상품권도 우리 쪽에서 부담해서 배송까지 한 적도 있다. 결국 생각했던 것보다 사보로 인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이 적었다. 

결과적으로 투입 대비 수익이 낮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나도 이 업무를 5~6개월 하다가 그만둔 것은 갑질 문화도 있지만 사내 윗선에 대한 실망감이 더 컸다. 부당한 지시가 있으면 좀 막아주고 그래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직원들이 다 감당해야 했다.


나중에는 나보고 직접 공기업 담당자와 컨택하라고 하지를 않나, 나보고 운전을 배우라고 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내가 내 돈 내고 운전 배울 리가 없지 ㅋㅋ)


p.s

그래도 이 과정을 겪으면서 나도 기자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기자랍시고’ 갑질을 하며 상처를 주지 않았나 반성해보는 계기가 됐다. 또한 나중에 이직을 하고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예전 직장은 주간지) L을 방문했고 그때와는 상당히 다른(!!) 대우를 받았다.


인생은 길고,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되도록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건 그 와중에서 나름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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