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기름은 필수, 깻잎은 다다익선
오늘은 올 여름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날이다. 컴퓨터 바로 옆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제법 강한 바람과 빗물이 느껴지지만 컴퓨터만 아니라면 창문을 완전히 열어두고 싶은 기분이다. 습도가 높은 가운데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인해 뭔가 산뜻한 기분도 들고 무엇보다 비를 쫄딱 맞아 닦아내고 싶은 상태가 아닌 한, 빗소리를 듣는 건 언제나 기분좋은 일이니까. 그래, 이럴 땐 더운 여름이지만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는 것도 혼자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쓰는 이 시간을 더욱 운치있게 만들어 줄테니 커피도 얼른 내려와야겠다. 다행히 딸이 보내준 향기로운 원두가 아직 한 잔을 내릴 정도는 남아있다. 커피가 딱 떨어질때쯤이면 이상하게 더욱 커피가 간절한 기분은 청개구리 기질 때문일까. 일단 오늘은 날씨 때문인걸로 치자. 중요한게 아니니. 아, 그럼 중요한 건 뭐지? 서문을 고치면서 오늘 쓰려던 글이 살짝 흐트러졌지만 다시 원래 쓰려던 이야기로 돌아가야한다는 것?
오늘 아침에 문득 국수 생각이 났다. 멸치와 각종 야채들로 국물을 깊게 우려낸 잔치국수가 생각난 건 아마 비오는 날 특유의 쌀쌀함으로 인한 것 같다. 그러면서 국수를 내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흐릿한 기억들을 더듬더듬어 떠올려보는 지난 시간들 속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소설 하나가 생각났다. 아마 학창시절에 다들 한번씩은 읽어보았을 듯 한데, 하근찬의 수난이대였다.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던 작가와 대표작 중 하나다 보니 당시엔 아무 생각없이 외워댔을뿐인데 이게 이런 타이밍에 빛을 발하네. 잘했어! 나 자신을 잠깐 칭찬해본다.
오늘 유독 자꾸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데, 다시 소설로 돌아오자. 수난이대에는 전쟁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부자가 등장한다. 아버지를 만난 아들은 부상당한 자신의 몸으로 인해 마치 죄인인 냥 위축되어 있다. 그런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 속상하고 착잡했을까. 그런 부자가 집으로 가면서 장터에 들러 국수로 끼니를 때우고 가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유독 그 장면이 내내 머릿속에 남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도 인상적이었지만 이상하게 내겐 마지막 부분보다 장터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국수를 주문하면서 건네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국수 곱빼기에 참지름도 많이 둘러서 달라는 아버지의 말에서 무뚝뚝하지만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진 것이었는지, 아니면 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묘사된 그 국수를 나도 저렇게 먹어봐야지 라는 생각에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내겐 그 부분이 꽤 인상적으로 남았다.
"마, 아무데서나 묵어라. 저 국수 한 그릇 말아주소."
"야"
"곱빼기로 잘 좀.... 참지름도 치소, 잉?"
"야아."
여편네는 코로 히죽 웃으면서 만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고는, 소쿠리에서 삶은 국수 두 뭉텅이를 집어든다. (이하 생략)
- 하근찬, 수난이대 (1957년)
그 소설을 읽었던 때가 고등학생 때였으니 그럼 그 전부터 나는 국수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다시 언제부터였는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본다. 이번엔 초등학교때 기억이 났다. 당시에 나는 오빠와 함께 광화문 교보문고를 종종 다녔다. 우표수집을 하던 오빠는 교보문고 앞 우체국에서 새로 나온 우표를 둘러보는 것을 좋아했고, 나는 나대로 교보문고에 가득한 책들과 교보문고 내에 있던 교보문보장에 진열된 상품들 구경과 아케이드에 있는 식당가에서 먹는 것을 좋아해서 매번 투닥대던 남매지만 서점에 갈 때면 늘 붙어 다녔다. 당시 교보문고 근처 종각역 방향으로 장터국수라는 국수체인점이 있었다. 그 시절 나와 오빠는 장터국수에도 종종 들러서 사이좋게 국수 두 그릇을 시켜서 나눠먹곤 했다. 메뉴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튀김과 함께 나오던 유부, 쑥갓등이 내겐 최고의 토핑이었다. 맞아, 장터국수. 진짜 오랫만에 생각났다. 그럼 내 국수 사랑은 그때가 가장 오래된 기억인건가? 다시 한번 기억을 곰곰이 더듬다 보니, 더 오래된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이건 장면이다. 오래된 영화 필름을 보는 듯한. 당시에 초등학생이었는지, 미취학때였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린시절' 엄마를 따라 북한산에 있는 도선사라는 큰 절을 가끔씩 갔었다. 나와 오빠는 엄마가 기도를 드리는 동안 절 옆에 있는 계곡에서 주로 놀았다. 한참 놀다 엄마와 같이 집에 가려 내려가다보면, 할머니들이 좌판처럼 이것저것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거기서 먹었던 잔치국수가 정말 맛있었다. 분식집에서 종종 보던 초록색과 흰색이 섞인 플라스틱 그릇에 막 삶은 국수와 함께 멸치육수가 부어지고, 다대기와 깻잎을 넉넉히 올려주신 따끈한 그 국수 한 그릇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엄마한테 도선사 국수 해달라고 집에서도 졸랐을 정도로 그때의 국수 맛이 아직도 기억난다.
떠올려보니 나의 국수사랑은 정말 오래된 역사와 추억을 갖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볼 법하다. 지금도 나는 국수로 끼니를 연속해서 먹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어렸을 때 먹었던 국수들에 대한 기억들은 지금도 내 무의식에 남아서 어른이 된 지금, 내가 만드는 잔치국수에는 멸치육수에 항상 유부와 깻잎은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참기름도 항상 넉넉히 두른다. 외부에서 국수를 먹을 때 참기름이 들어가지 않으면 왠지 허전하다. 그 허전함은, 어쩌면 내 무의식에 남아있던 소설의 한 부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비가 오는 덕분에 떠나본 오랜만의 추억 여행은 국수만이 아닌 어린 시절의 나를 잠시 만나고 온 시간이 되었다. 오늘 비도 오는데 간만에 국수 좀 힘줘서 만들어볼까나.
사진 : Kouji Tsu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