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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완 Oct 17. 2021

지하생활자의 기억

노인은 한참동안 내 말을 들었다

 약속한 날에 적어둔 주소를 찾아갔다. 버스에 내려 조금 걸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조용하고 깔끔한 고급 주택가였다. 좁지만 단정한 도로가 집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몇몇 집을 지나칠 때에는 고급 철제문 사이로 커다랗고 하얀 개가 나를 보고 짖었다. 외제차 몇 대가 도로가에 조용히 주차되어 있었다. 이 동네에는 집마다 어김없이 굽은 소나무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의 삶은 어떨까. 내가 초라한 집에서 죽음을 고민하던 사이, 누군가는 이런 곳에서 삶을 고민하겠지. 내가 아무도 읽지 않을 유서를 쓸 때 누군가는 웃음과 사랑과 풍요를 나누겠지. 하는 생각이 치밀었다. 또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으로 뒤덮였다. 이런 곳을 걷고 있는 나를 이 동네가 멸시하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적힌 주소에 도착했다. 문패의 이름은 명함의 이름과 같았다. 이런 집이라니. 우리 부모님은 평생 이런 집을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평생을 낡은 빌라촌에서 살았다. 나는 벨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노인이 보였다.      


마당에는 여지없이 소나무가 있었다. 입구에서 현관까지 가는 길은 대리석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잔디가 깔려있었다. 마당 한편은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었다. 직접 가꾸는 듯했다. 물을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단정하게 입은 노인이 있었다. 이런 집은 영화 ‘기생충’에서나 보았다.     


“왔는가.”


“..... 네”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여기에 있어도 되는지, 저 노인은 처음 보는 나를 왜 이끌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저 노인이 지푸라기처럼 느껴졌다. 침몰하는 나는, 무엇이라도 처절하게 붙잡고 싶었다. 나는 노인이 인도하는 마당의 의자에 마주 앉았다.     


“다리를 걷는 자네를 쭉 지켜보았는데, 자네는 그때 무슨 생각이었나.”


“.....”


“말해보게.”


“.......”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늘 어려웠다. 가려고 숨겨도 가려지지 않는 게 많아 부끄러운 삶이었다. 벌써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때로 눈물을 삼키고, 때로 한숨을 길게 쉬며, 때로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30분쯤. 대충 아래의 내용이다. 당신은 굳이 읽지 않아도 좋다. 읽으면 힘만 빠질 뿐, 전혀 유쾌하지 않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골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딸 둘을 낳았다. 아들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늦둥이 아들을 보았다. 아버지 나이 40에 나를 낳았다. 


 단 한 번도 풍족한 적은 없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자르고 잘라서 생활했다. 그럼에도 삶은 진행되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지방 대도시로 이사했다. 생활은 더 궁핍해졌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어리석었다. 보증을 섰다. 채무자는 모르쇠였다. 쥐꼬리만 한 월급이 절반은 잘려나갔다. 집을 팔았다. 낡고 낡은 좁은 집으로 이사했다. 좁은 집에 다섯 식구가 살 수 없었다. 부모는 원래 있던 시골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동시에, 큰누나가 이상해졌다. 우울증으로 시작한 큰누나의 증세는 처음 듣는 병명으로 발전해나갔다. 결국엔 정신분열증, 조현병에 걸렸다. 이상한 말을 쏟아냈고 가끔 칼을 들었다. 종종 유서를 두고 사라졌다. 그러면 나는 아파트 옥상에서나 큰누나를 찾아내고 데려오곤 했다. 모든 일은 13평짜리 낡은 집에서 벌어졌다. 열세 살짜리가 짊어지기에는 버거웠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학교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땅만 보며 걸어 다녔다. 숨은 붙어있으나 삶은 없었다. 혈기왕성한 사춘기 남자아이들에게 쉬운 먹잇감이었다. 하루하루는 지옥 같았다. 지옥은 하루하루 펼쳐지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삼청교육대를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월남전에 참전했다. 폭력적이었다. 가계의 실패와 맞물려 더욱 난폭해졌다. 가끔 13평 집에 와서는 교육이라면서 자녀들을 팼다. 조현병에 걸린 큰누나를 팼다. 대드는 작은누나를 팼다. 대드는 나를 팼다. 나는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명에 시달린다.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은 나의 아버지가 유일하게 물려준 유산이다.


 삶은 늘 슬프고 고달팠다. 지옥 같은 학교를 마치면 종말 같은 집에 들어왔다. 거기서 성인이 되었다. 도망치듯 대학엘 갔다. 처음 가 본 시골에 있는 학교였다. 거기서 살았다. 휴일에도 명절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차라리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게 편했다. 지옥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삶은 어떻게든 진행되었다. 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건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도전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리 2년간 책만 보았지만 몇 점 차로 떨어져 버렸다. 집과 책상 앞에만 놓여있던 정신은 어딘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돈을 벌어야 했다.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나는 어느 중소기업의 영업직 사원으로 입사한다. 월급은 180이었다. 그리고 서울에 있었다.


 월급을 쪼개어 집을 구했다. 월급의 대부분이 목숨을 유지하는 데 사라져 버렸다. 그 와중에 집값은 무섭게 올랐다. 나는 불안했고 고독했고 무서웠고 죄책감을 느꼈고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치열하게 살고 또 살아도 삶은 예정된 구렁텅이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사람이 싫었다. 아니, 이런 내 처지와 내 상태를 들킬까 봐 무서웠다. 세상의 부스러기가 된 나를 보이기 싫었다. 관계는 단절되어갔다. 가족과는 이미 오래전에 관계가 끊긴 이후였다. 이런 삶을 움켜쥔 채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직장 상사의 갈굼에, 직장 동료의 숙덕임에, 지나치는 사람의 눈초리에, 말에, 평가에 무너져 내렸다. 


 우울증은 20여 년 가까이 나를 짓눌러오고 있었다. 그 열세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나를 짓누른 채 놓아주지 않았다. 늘 울분과 억울함, 죄책감, 열등감 어느 사이를 오가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런 독한 감정은 금세 티가 났다. 그러면 그럴수록 티가 나지 않게 억누르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찌르면 터질 듯한 표정을 하며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아무것도 나아진 것은 없고, 어느 날 한강에 갔고, 뛰어내리지 못했고, 노인을 만났노라고 말했다.                                        





 노인은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울려고 하거나, 말을 멈추거나, 하늘을 보아도 잠자코 듣기만 했다. 다 듣고 나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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