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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완 Sep 22. 2019

#6 기만

 지하생활자의 자세 중 하나는 기만이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많은 사례를 통해 깨닫는다. 그럼에도 삶은 끊임없는 문제를 가져다 준다.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해야 할 일은 밀려온다. 그의 머리속에는 비현실적인 야망으로 가득하다. 이제 지하생활자는 억지로 끌려나와 그늘에서 시간을 뭉개는 아이가 체육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삶을 대한다. 공을 잡으려 뛰어다니는 또래들을 비웃는다. 참여하지 않고 그늘에 가만 있는 것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기만한다.


 삶의 과제들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기만했다. 내가 품은 거창한 꿈을 생각하면 사소한 과제들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우스워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공부를 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소소하게 돈을 아낀다. 그것은 삶을 구성하는 데 유익한 자세들임을 안다. 웃는 낯을 보이며 그런 자세들을 인정하는 척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그들을 기만한다. 이같은 자세는 원래 열등감을 느껴야 할 지하생활자에게 얼마간 우월감과 만족을 선물한다.


 삶의 과제들에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속인다. 내가 품은 거창한 꿈을 생각하면 내가 겪는 문제들은 사소한 것일 뿐이다. 영어공부를 하거나 실무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거나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하는 것은 그저 평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화려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지옥과 같은 시간을 버텨 온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라며 나를 속인다. 골치아픈 과제들을 비웃으며 물러난다. 이렇게 지하생활자는 진심으로 삶에 참여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삶에 참여하는 것은 야망이 달성된 화려한 순간일 뿐이다. 그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쌓이면 지하생활자는 더 깊은 지하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기만은 때로 유효하다. 지독한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나를 속일 수 밖에 없다. 시간을 오로지 버티기만 할 때 기만의 자세는 꽤 효율적이다. 그러나 대부분 삶을 유익하게 하는 데 쓸모가 없다. 그가 두려운 것은 지독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좌절감이다. 실제로 열등하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마주하는 일이다.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어렵고 긴 과정보다 간단한 기만의 자세를 택한다. 포기한 것들을 비웃으며 물러난다.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쉽게 편해졌다. 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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