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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완 Sep 23. 2019

#7 유예

 지하생활자는 자신이 겪은 지독한 과거로 인해 본격적인 자신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상황, 더 나은 조건이 되어야만 비로소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결국 오지 않는다. 지독한 과거를 버티기로 일관한 지하생활자는 시간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다. 그의 조건이 나아질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렇게 초라한 자신을 세상에 내어놓기를 미룬다. 유예한다.


 내가 중학생일 때의 일이다. 방학이었다. 그 지옥 같은 집에서 하루하루를 뭉개고 있었다. 그럼에도 먹고 싶은 것은 있었다. 특히 피자가 먹고 싶었다. 나의 어머니에게 피자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일주일을 졸랐다. 어느 날 가난한 나의 어머니는 알겠다고 말하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곳은 빵집이었다. 가난한 나의 어머니는 가난한 내가 빵을 고를 수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한 나는 피자빵과 피자 고로케 사이에서 10분쯤 고민했다. 왜 어서 고르지 못하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먹고 싶은 것은 피자였기 때문이다. 왜 내게 피자를 고를 수 있게 하지 않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그것은 죄였기 때문이다. 나의 시선은 피자빵과 피자고로케와 그늘진 어머니의 얼굴 사이를 오고 갔다. 결국 아무것도 고를 수 없었다. 빵집을 나왔다. 돈을 아꼈다. 


 시간은 어떻게든 지나간다. 치열하게 살거나 복잡하게 살거나 침대 위에 누워만 있거나 해도 시간은 지나간다. 여러 선택지 중 침대 위에서 공상만 하던 그의 앞에 선택의 시간이 도래한다. 미루고 미루어도 세상은 그에게 결정을 요구한다. 지하생활자는 당황한다. 그토록 지독한 과거를 거쳐 와 이토록 지난한 미래를 선택해야 하다니. 지하생활자의 부족한 현실감각과 현실적인 무능함, 그리고 비현실적인 욕망이 만난다. 그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끝없이 미룬다. 


 유예의 시간들은 쌓이고 쌓여도 아무런 질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어떤 무늬도 없다. 결국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없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침대 위에서 보낸 시간들이 쌓인다. 무엇이라도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것은 피자가 아니다. 피자빵과 고로케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결국 조그만 슬픔과 함께 빵집을 빠져나온다. 그는 자신이 왜 슬픈지도 모른 채, 피자를 고를 수 없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며 유예를 합리화한다. 


 나는 언제나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렵다. 오늘 저녁의 식사 거리나 내일 입을 옷을 결정하는 일 앞에서도 피자빵과 피자고로케 사이에서 보낸 10분의 시간처럼 얼어버린다. 더 싼 대안을 열심히 찾다가 오히려 불만족스러운 비싼 값을 치르고 만다. 그늘진 표정의 어머니는 없지만 나는 언제나 결정의 자리를 뛰쳐나가버리고 싶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내가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선택하지 않은 치명적인 현실들은 내게 들이닥쳤다. 가난도 결핍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참고 또 참았다. 이제 그의 앞에 선택의 순간이 펼쳐진다. 안타깝게도 그가 원하는 것은 없다. 지하생활자에게 어울리는 싸구려 대안들이 넘친다. 아직 본격적인 내 삶이 도래하지 않았구나. 그는 다시 침묵한다. 유예한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흐른다. 생의 모든 결정들 앞에서 얼어버린 어색한 모습으로 세상은 그를 결정하고 억지로 끄집어낸다. 본격적인 자신이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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