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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완 Oct 05. 2019

#11 억압

 지하생활자는 언제나 억눌려있다. 


 그의 성장과정에는 대부분 가난한 부모가 등장한다. 가난한 부모는 그들이 세상에게 당한 상처들로 얼룩져 있다. 모든 가난한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겪은 가난한 부모는 열등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갖가지 방어기제들로 둘러싸인 채 낡고 좁은 집에서 세상에 지쳐버린 몸을 쉬게 하는 것이 대부분의 일상이었다. 도전과 모험, 관용과 배려, 문화의 향유와 사회에 대한 기여 같은 것은 이미 삶에 지칠 대로 지친 이들에게 사치로 여겨진다. 그렇게 사람으로서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사치로 치부한 채 가난한 삶을 엉거주춤 이어나간다. 이 엉거주춤한 자세를 그대로 자녀에게 물려주게 된다.


 이들에게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낡고 좁은 집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의 아동기 자녀는 때로 세상으로부터 겪은 수치스러운 일을 만회할만한 손쉬운 존재로 전락한다. 이것이 구세대의 폐쇄적인 도덕관을 업으면 한심한 일이 벌어진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받는 유일한 존경을 자녀들로부터 착취한다. 그들이 배운 도덕이란 대부분 그런 것이었다. 자녀에게 예의와 복종을 강조한다. 인사와 몸가짐을 강조한다. 근거 없는 존경을 요구한다. 자녀들은 침묵을 배운다. 복종에 단련된다. 억압과 폭력에 익숙해진다. 자녀들에게 금욕은 필연적이다. 자녀들의 요구들은 묵살된다. 혹은 사치로 치부되어 도덕적으로 공격당한다. 자녀들의 불만이 그의 부모를 향하는 것과 같은 낌새가 있다면 부모에게 보복당한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열악하고 부모들은 갖은 방어기제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자녀들의 요구는 언제나 묵살당하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언제나 보복한다.


 이 아이가 집 바깥으로 나오면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아이. 자기 목소리를 낼 줄 모르는 아이. 맞고 빼앗기고 배척당해도 그러려니 하는 아이. 어른에게 이를 줄도 모르는 아이. 쉽게 복종하는 아이. 말 잘 듣는 아이. 예의가 바른 아이. 좀처럼 남들을 화나게 하지 않으려는 아이. 누군가 화를 내면 화들짝 놀라는 아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의 부모에게 배운 서툰 욕설을 내뱉는 아이가 되어 또래 아이들에게 이상한 취급을 받게 된다.


  지하생활자의 억압과 복종으로 이루어진 가정교육의 결과는 실현될 수 없는 도덕적 무결함으로 지하생활자를 몰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지하생활자는 간헐적으로 다가오던 그 폭력과 억압을 언제나 대비한다. 그때 내세울 도덕을 위해 매일 자신을 혼내며 산다. 


 또한 요구하는 자에게 뭐라도 쥐어주는 세상의 원리를 학습하지 못한 지하생활자는 세상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그는 요구할 줄 모른다. 가끔 가난한 부모가 손에 쥐어주는 하찮은 것에 감사하며 살아남은 그. 세상에 나오면 엉거주춤한 자세를 한 채 세상이 무엇이라도 내게 쥐어주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그에게 도덕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에 갖는 불만족은 필연적이다. 이제 세상을 오해한다. 나의 복종이 부족한 탓이라고 여긴다. 나의 욕심이 지나쳤다고 믿는다. 내가 사치스러웠다고 믿는다. 내가 잘못했다고 믿는다. 누구도 화나게 하지 않으려 살얼음 같은 세상을 조심스럽게 지나간다. 그리고 자신처럼 조심스럽지 않거나 용감하게 사는 사람들을 무례하거나 욕심이 많고 완전함을 추구하기를 포기해버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생활자가 세상을 이해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의 어긋난 가치관에는 지독한 압력이 작용한다. 그 압력은 지하생활의 고통과 비례한다. 우선 압력을 풀어야 하지만 쉽지 않다. 압력을 푼 다음에도 그의 언어와 생각을 세상과 조율해야 한다. 지하생활의 도덕과 가치관과 생각은 세상의 기쁨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기쁨들은 대부분 집 밖에 있다. 세상에 웃는 낯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매일매일 아주 많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다. 고통을 회피하는 것에 익숙한 지하생활자는 다시 자기만의 방으로 숨는다. 그리고는 말한다. 나의 복종이 부족했구나. 내가 욕심을 부렸구나. 세상은 무례하거나 욕심이 많거나 완전함을 추구하기를 포기해 버린 것 같다고.


 지하생활자는 누구보다 자신의 현실을 파악하고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열심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에게 무엇이 문제냐고 물어보라. 그들은 쉽게 답할 수 없다. 숨기거나 얼버무리거나 알지 못한다. 현실과의 조율이 어긋난 대답을 들을 것이다. 사실 지하생활자의 사고는 닿지 않는 부분들은 많다. 현실과 환경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자기로부터, 갖가지 압력으로부터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인지 생각하는 것을 가로막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지하생활을 견뎌내기 위해 그가 씌어놓은 쓰레기통 뚜껑 같은 것이다. 그것을 열면 썩어가고 있는 현실이 악취를 풍기며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가난한 부모는, 가난한 사회는, 가난한 나라는 사람을 이렇게 압력으로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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