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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완 Oct 01. 2019

#10 괴리

 지하생활자는 확신한다. 자신이 겪고 있는 생활보다 더 우월한 인간의 양식이 세상 어느 곳에서 펼쳐지고 있을 것이라고. 이것은 온갖 가난과 결핍을 겪어 온 그가 세상에 대해 필연적으로 갖는 확신이다. '내가 마주하는 현실은 그것이 아무리 벅차고 행복하더라도 세상의 평균적인 기준에 의하면 열등한 것이다. 나의 웃음과 행복과 만끽은 내가 겪는 현실이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내가 어리석고 순진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이다.'라는 확신을 갖는다.

 

 지하생활자가 현실로부터 갖는 거리감은 이런 확신에 기인한다. 그는 자기가 겪는 모든 사건들이 세상의 평균적인 사람들의 행복보다 더 뒤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의 가난이, 결핍이, 고통과 사건들이 세상의 평균에서 어긋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작되는 증상이다. 그는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세상을 경험한다. 폭력을 일삼는 열등한 아버지와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머니, 실제로 조현병에 시달리는 가족과 지독한 가난, 사회적인 배제를 체험하고 난 지하생활자는 그 상황이 극복되었거나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정상적인, 평균적인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지하생활자의 간과 경험은 뿌리깊은 신념을 만든다.


 지하생활자는 감각하는 현실을 신뢰하려는 시도를 한다. 사람이 내게 다가온다. 혹은 세상을 경험한다. 범한 람이 행하는 습관적인 친절을 베푼다. 세상이 그에게 기본적인 호의를 베푼다. 그것은 지하생활자에게 기적적이다. 지하생활자의 부모도, 형제도 건네지 못했던 것이다. 지하생활자는 확신한다. 구원 도래했다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그저 그의 습관대로 살았을 뿐이었다. 세상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지하생활자는 화와 상실감과 분노와 실망과 열패감을 느낀다. 지하생활자가 느끼는 구원이, 누군가에게는 습관일 수 있다니.


 이제 지하생활자는 다시 현실을 생각한다. 지하생활자가 기적이라고 감각하는 사실들은 세상의 평균일 수 있다. 이 평균적인 사건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눈물을 흘리고 마음껏 기뻐하는 일은 사실 열등하거나 현실감각이 없거나 자칫 세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는 그의 감각과 멀어진다. 부모도 사주지 않는 빵을 친구가 사주다니. 가족도 보여주지 않는 친절을 타인이 베풀다니. 형제도 해주지 않던 응원을 타인이 해주다니. 그리고 이 모든 기적들이 그저 평범한 그들의 생활이라니. 지하생활자는 타인으로부터 느낀 평범한(그러나 그에게는 기적적인) 감각들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자신이 겪은 지독한 지하생활과의 균형을 잡는다.


 이것은 내가 오랜 시간 품었던 생각이다. 나는 그 지옥 같은 시절을 겪고 나름의 노력을 거쳐 평범하다고 할 만한 세상에 들어와서도, 더 우월한 인간의 양식이 세상 어느 곳에서 펼쳐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내 생활에서 겪은 것들은 다분히 평범했다. 따뜻하거나 친절하거나 부드럽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믿지 못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실은 진실이 아니며, 더 우월한 무엇인가가 나를 제외한 세상 어느 곳에서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잘못된 믿음은 나를 현실에서 더욱 멀어지게 했다. 거짓 웃음과 거짓 친절, 거짓 감동은 현실을 기만하며 본격적인 세상이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었다. 내가 거짓이라고 여긴 모든 것들은 내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이었다. 그렇게 과거를 통째로 잃어버린다.


 지하생활에 필요한 껍데기를 아직 버리지 못하고 뒤집어쓴 채 오래도록 사는 것이다. 무엇이라고 이름붙일 지 고민하다가 괴리라고 부르기로 한다. 지하생활자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과 그의 진심은 괴리된다. 세상에는 따뜻한 구석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미루어 믿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것은 통째로 우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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